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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희망탐방

서해교전 발발, 참혹했던 연평해전의 상흔

서해교전이 7년만에 다시 발발했습니다.

■ 서해교전 상보 (2009년 11월 10일)

군관계자에 따르면 북한 경비정이  NLL을 남하하자
우리 해군 경비정이 경고방송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하하자 경고사격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북한이 사격을 했고, 남한 해군도 대응사격을 했다고 합니다.

남한 해군의 사상자는 없지만 북한 경비정은 피해가 있었다고 하네요. 
북한 경비정은 이후 북측으로 돌아갔으며, 현재 교전상황은 종료된 상태입니다.


오늘 일을 보니, 잊혀져가던 과거 연평해전의 악몽이 떠오르는군요.


다만 이런 슬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제 2 연평해전'입니다.

참극으로 기억되는 제2연평해전은 제1연평해전(1999년)이 벌어진 3년 뒤에 일어났습니다.

■ 제 2차 연평해전 피해 상황 (2002년 6월 29일 10시 25분 ~ 56분)

▷ 남한 : 고속정 1척 침몰, 전사 6명, 18명 부상
▷ 북한 : 경비정 1척 대파, 30여명 사상

대부분의 국민들이 2002년 월드컵에 취해 있었지만,
이런 무관심 속에 누군가는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청춘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 당시 참수리-357에서 가장 먼저 전사한 故 윤영하 소령입니다. 북한 공격 첫 번째 타겟이 함교였으니까요.

▲ 교전 당시 후갑판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사한 故 서후원 중사, 故 박동혁 병장입니다.


■ 제 2차 연평해전 발발 원인 및 배경

▷ 제 1차 연평해전의 패배에 대한 보복
▷ 대내외적으로 어려워진 북한의 정치적 탈출구
▷ 북한 영해 확보와 NLL(북방한계선) 무실화


그러면 왜 이렇게 남한 해군의 사상자가 많았을까요?

1차 서해교전에서 패한 북한 측이 악의적인 기습 선제공격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워낙 치밀하게 집중공격을 펼쳤던 지라 남한 해군은 손쓸 틈 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죠.
우리 해군이 즉각 대응하여 북한 해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습니다
.

아래는 당시 북한측 공격에 희생당해야 했던 참수리-357의 참혹한 모습입니다.

▲ 제 2차 연평해전에서 타격을 입었던 참수리-357입니다.

▲ 참수리-357의 측면입니다.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곳이 모두 총, 포의 공격을 받은 흔적들입니다. 쩝~

▲ 故 조천형 중사가 담당했던 21포(20mm 발칸)입니다. 집중 포화를 당했을 당시에는 전면 유리가 없었겠죠?

▲ 참수리-357의 내부인데 구멍이 엄청 크네요.

▲ 이 곳은 조타실로 故 한상국 중사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아~ 여러 군데 붉은 자국들이 보이네요.

▲ 이 부분도 참수리-357 안에 있는 측면부인데요. 북한군이 비 오듯 쏴댔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군요.

▲ 이 곳 역시 북한군의 기습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했군요.

▲ 가까이서 구멍을 찍어보니 헉~


■ 제 1차 연평해전 (1999년 6월 15일)

▷ 9시 28분경 북한 경비정이 우리 고속정에 대해 소형기관포로 선제공격
이후 우리 해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남북한 함정이 각각 10척씩 대치
▷ 남한 해군은 경미한 피해, 북한 해군은 경비정 1척 침몰, 5척 대파
▷ 당시 북한 해군은 밀어내기 작전에 온갖 것을 집어던졌는데 각종 채소도 날아들었다고 함.





남북이 서로 화해-협력해야 할 시점에 군사적 충돌로 인한 유혈사태가 더 이상 나와선 안 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제 2차 연평해전에서 청춘을 바친 이들의 넋을 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