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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남성의 ‘루저‘ 판타지 <남자의 서쪽>

         

윤대녕은 일상을 ‘마른 코딱지’같다고 했다.  윤대녕과 더불어 한국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구효서!  


며칠 전, 서울의 한 대형서점 한국소설 코너를 뒤져 어렵게 찾아낸 책이 바로 <남자의 서쪽>.  최근 일고 있는 패배자, 루저 논란 탓이었을까?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계산대로 달려갔다. 그리고 밤을 새워 읽었다.

                             △ 구효서 <남자의 서쪽>. 소설 속 주인공은 요즘 말로하면, 100% '루저남'이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중년의 로망은 이 시대엔 루저로 가는 지름길이로구나....라는 것.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삭막한 시대에 이런 문학작품은 과연 어떤 존재가치를

  지니게 될까........라는 것이었다.


그래도....여전히 꿈을 꾸고 상상을 해야만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소설가는 꼭 필요한 존재들이겠구나, 란 생각에 구효서의 <남자의 서쪽>을 소개한다.  꿈만 꾸고 실행은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루저로 손가락질 받지는 않을테니까..... ^^



- 중년 남성의 로망은 젊은 여성인가,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인가?


마른 코딱지 같은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나이가 따로 있을까? 대개 길(Road) 위에 서있는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들은 젊다. 젊은 마음에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우연을 가장하며 다가오는 이런저런 에피소드에 몸을 맡기며 잔잔한 희망을 찾아나간다.


     △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면서부터 인생을 알았다(?)는 중년들의 증언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정말일까?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은 40대 중반에 같은 직장의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먼저 관심을 표명하며 다가온 30대 초반의 직장동료와 술을 마시고 호텔방에서 불꽃놀이를 보며 섹스를 한다. 이때부터 남자는 베트남에 출장 갔다 만난 한 남자를 떠올리게 되고, 여자와의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내내 그 남자의 자유로움을 동경한다.


구효서는 이 소설에서 독특한 표현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회고록을 쓰듯 써내려간 <남자의 서쪽>이란 소설은 한 남자에 보내는 편지글 -> 여자와의 만남 등을 묘사한 소설형식 ->편지 ->소설-> 편지 .......등의 형식 교체를 통해 일종의 몽타주 기법을 연상시키며 진행된다.


편지글은 회색톤, 소설형식은 컬러톤 등으로 색조를 달리하며 진행되는 극영화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2008년 출간돼 화제를 불러일으킨 소설가 김다은의 <훈민정음의 비밀> 등에서 본격화된 서간체 문학의 실험형태란 생각이 들 정도로....)


책 페이지로만 보면 155쪽인 이 소설은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로 흘러간다. 특히 편지글 형식에서 보이는 독백조의 표현은 읽는 사람들에게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예를 들면 이런 표현을 들 수 있겠다.


-‘저의 사고라든지 무의식 따위에 어떤 모양새가 있다면 왠지 그 수핵과 흡사할 거라는 생각 말입니다.’ ,

-‘당신이 준 광물질은 저에게 시간과 그것의 초월에 대해서만 생각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바다는 1만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1만년 뒤의 내 존재에 대해 생각게
  하는거야’    



이상의 표현들은 구효서의 소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 및 상상’과 ‘시간 개념의 재해석’의 변주로 다가온다. 특히 구효서는 1만년 이란 시간 단위를 현재의 앞 뒤에 배치하고 그 시간적 의미를 되묻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자주 질문하곤 한다. 이 소설에서도 그 시간이란 질문은 여전히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가라앉아 있다 물이 빠지면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베트남의 ‘하롱베이’를 동경한다. 이는 40대 중반까지 가라앉아 있다 떠오른 주인공 자신의 열정(?)과 일탈에의 욕망을 잘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구효서는 베트남 하롱베이의 유래에서 아마도 그런 연상작용을 일으켰던 게 아닐까?  하롱베이의 유래와 가라앉아 있던 욕망의 비유는 매우 적절해 보인다.



- 왜 소설가들은 불교를 동경하는가? 


한국의 소설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한다. ‘이제부터는 불교적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라고.... 그래서일까? 구효서 역시도 이 소설 속에서 불교적 시각을 슬쩍 끼워넣고 있다. 이런 식이다.


‘우리가 보는 달이라는 것. 그것은 평생 한 면 밖에 볼 수가 없어요.... 내가 말했다. 달의 뒤쪽 세상이라는 것도 분명 있는 것이겠지만, 볼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과 같아. 그런 거 아닐까. 내 열여섯 이전의 삶이라는 것, 기억이라는 것,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있겠지. 하지만 알 수가 없고, 그래서 없는 것과 같아. 상관없어요. 달의 한 면만을 보고 산다고 해서 불편할 게 없듯, 열여섯 이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서 특별히 불편할 건 없어. 없는 건 없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저 불꽃들 말야....어둔 하늘에서 자신의 흔적을 어떻게든 남기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구효서가 과연 이런 시각을 어떤 식으로 소설 속에 본격적으로 녹여내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도 2009년 현재 52세이니까...그도 역시 생노병사를 경험하는 '인간 존재'이니까...


결국 이 소설은 동경하던 그 남자가 사실은 주인공 자신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소설의 줄거리 대신 소설가 구효서의 <남자의 서쪽>에필로그의 일부를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서점에서 꼭 사서 읽어보길 권하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차를 타고 소래 포구며 하일 염전이며 수리산 산자락을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다.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누워 노랗게 핀 애기똥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까닭 모를 눈물이 나왔다.


피어나고 스러지는 것, 밤이 오고 아침이 오는 것, 불어오는 서풍에 속절없이 허연 잎을 뒤짚는 거제수나무만이 현실이었고, 그런 것들만 눈에 띄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서캐처럼 허옇게 쏟아져 나오는 빌딩의 남자들은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애써 책상에 앉았다가도 어느새 밤이 오면 무병을 앓는 처녀처럼 양말도 신지 않고 거리를 배회했다. 포장마차에서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들. 술 취한 음성으로 털어놓는 남자들의 하루 무용담을 지나다 들을라치면 내 일이 아닌데도 덜컬덜컥 비통해졌다.


내 나이를 세며, 그들의 나이를 짐작하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로 하염없이 고개를 젖혔다. 훌쩍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미 살아온 나날들은 버리는 데만도 또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하리라.


이 삶이 꿈이든 꿈이 아니든 , 그것이 행복이든 행복이 아니든, 어차피 주어진 터전 위에 나서 자라고 늙어가는 것이라면 끝까지 헤어나지 못할 무명에나 풍덩 빠질 것을. 문득 문득 다 소용없어, 소용없어 중얼거리기는 왜 중얼거리게 생겨먹은 것인지 인간이란.


갈수록 우연과 불연속적인 것들에만 눈이 커지고, 지금까지 움켜쥐었던 것들이 거짓말처럼 하찮게 여겨지면서 , 나는 그런 나에게 동조할 만한 남자 하나를 소설에서 만들고 싶었나보다.


남자. 그는 어떻게 떠나는지. 어떻게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지. 일탈은 과연 꿈인지, 아니면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일이 일탈인지.                -1997년 6월 구효서



        

                                                                 
                                                                                                                                                      - posted by 백가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