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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분토론과 작별한 손석희, 그를 키운 것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손석희라는 악몽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라는 책에 나오는 소제목입니다. 김주하는 이 책에서 냉정하고 매몰차지만 알고 보면 속정 깊은 선배에 대한 소회를 담았더군요. 

국민에겐 최고의 언론인으로, 후배에겐 존경을 받고 있는 선배인 손석희.

오늘날까지 그가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봅니다.



만학도의 유학, 절박함을 깨닫다

언젠가 아침방송에서 그가 이야기한 것이 떠오릅니다. 마흔 셋 늦은 유학길에서의 고생담이었습니다. 그는 1997년 마이크를 놓고 돌연 가족과 함께 유학을 떠났습니다. 자비 연수였지만, 애초의 목적은 공부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모든 걸 멈추고 쉬고 싶었다고 했었죠.

그렇게 쉬다가 오겠다고 한 결심이 도리어 '열혈만학도'로 변신하는 데에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민간재단에서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이었죠. 그 스스로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했던 뒤늦은 학업이 그에겐 잊을 수 없는 성장통을 가져다 줬습니다.

"하지만 그 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학위? 그것은 종이 한 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 그것이다."

-  '지각 인생' 중에서 -

그는 뒤늦게 선택한 길임에도 삶의 절실함이 남아있는 이상 후회할 필요가 없다고 당시 소감을 정리했습니다. 좀처럼 냉정함과 차분함을 잃지 않았던 그였기에 눈물을 흘렸을 장면은 상상이 안 가지만, 그의 말처럼 절박한 무언가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손석희는 2000년 시선집중, 2001년 미디어비평, 2002년 100분토론을 각각 맡았고, 최근에는 가장 영향력 있는 방송인 1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어린 시절의 먹구름, 그 이름은 가난

그러나 방송계 파워 1인자의 어린시절은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손석희는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직업군인인 아버지는 6살 무렵 군복을 벗고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이 때부터 고난은 시작됐습니다. 재산을 몽땅 투자해서 양수기 사업을 벌인 것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죠.

(지금 OBS사장 주철환과는 처남 매부의 관계에 있죠. 주철환도 MBC시절 PD였죠.)

때문에 양철담장집에 세 들어 살며 초등학교 저학년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3학년 시절 빈부에 따른 선생님의 관심 차이는 어린 손석희에겐 분노와 설움을 안겼고, 이 가난은 성장기 내내 짓누르던 노비문서와 같았다고 합니다. 그 가난으로 인한 굴곡은 대학시절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고교시절 가족에게서 조울증의 기미가 있다는 말을 듣곤 했답니다.

6학년 때에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도 했었습니다. 전날 내린 비를 머금은 흙더미 지붕이 주저앉아 천장에 구멍이 난 것이었죠. 인부들이 흙더미를 치우고서야 안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일에 대해 당시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거기서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봤다. 천장이 있어야 할 그곳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린 손석희는 강인함이 있었습니다. 중학생시절 짝궁에게 '관성의 법칙'을 묻다가 잡담했다는 이유로 물상(과학)선생님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받았는데, 주말에 물상교과서를 다 떼버렸던 것이죠. 당연히 큰 폭으로 점수가 올랐습니다. 그 당시에 대해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어떻게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지 깨닫게 됐다."고 회고했습니다.



방송과 인연을 맺다

어린 시절부터 고집이 있었던 아이가 가난에 눌려있었지만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천금과 같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휘문고 시절에 방송반에 가입한 것이었죠. 비록 열악한 방송시설 속에서 시작한 활동이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경험을 쌓은 것이 평생의 업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당시 방송반 동기생은 송승환)

첫 대입에 실패하고 다시 재수를 한 끝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고 국민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졸업 할 무렵 한 일간지 총무부 사원으로 입사했으나 주변 친구들이 그를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방송반 경력과 방송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이유로 주변의 권유가 이어졌던 것이죠. 그렇게 도전한 것이 결국 1984년 MBC 수석 입사라는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사 후 2~3년이 지나자  MBC 간판 아나운서가 됐던 것이었죠.

(방송에 몸 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주변 권유의 몫이 컸다며 "주체적이지 못한 선택"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나운서의 행보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1992년 10월 파업투쟁 당시 노조 집행부로 활동하던 중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당시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억이 강렬했거든요. MBC 간판 아나운서가 수의를 입고 브라운관에 선 모습은 대중들이 손석희를 달리 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그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나야말로 노조 활동으로 인해 가장 큰 수혜를 받은 사람"이라며 "한 일도 없는데 무슨 민주투사라도 되는 양 대접받는 것"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이 구치소에서 나온 뒤 1997년에 미국행을 선택했을 때 이제 방송인 손석희를 볼 수 없게 된 건가 싶었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난 뒤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언론인이 됐습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고 표현해야 겠죠?



마무리하며

개인적으로 손석희의 100분 토론이 여기서 끝나지 않기를 바랐기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100분 토론>을 그만 두었을 때는 또 다른 새로운 일에 도전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것이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차분하다', '냉정하다'는 평가에 대해 인상비평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의 큰 관심과 기대에 대해 부담, 자신의 면모 이상으로 포장되는 것에 대한 경계의 의미라고 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고를 통해 논쟁하는 가운데, 누군가 중심을 잡아주길 바란다면 손석희만한 방송인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