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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희망탐방

선덕여왕보다 더 애절한 사랑을 했던 여인

두 스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선덕여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에 온 두 스님은 국통인 자장율사를 만났습니다.
자장율사로부터 중국불교에 관해 얘기를 듣게 된 두 사람은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죠.

당나라로 향하기 위해 당진 부근에서 배를 타려고 했지만
기상조건이 나빴는데다 날이 어두워져서 불가피하게 한 동굴에 머물게 됐습니다.

어느 한 스님이 자던 중 갈증을 못 이겨 더듬거리던 중
마침 바가지에 물이 있길래 마셨더니 꿀맛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것이 해골에 담긴 빗물이었던 것이죠.
그때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의 작용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고
유학을 포기한 스님이 원효대사였습니다.
그래서 홀로 유학길에 오른 스님이 의상대사였죠.

▲ 유신을 사랑한 선덕여왕

의상대사는 유학길에서 중국 등주에 있는 어느 관리의 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 집에 선묘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던 거죠.

인물 출중, 가문 빵빵(진골), 두뇌 최고의 엄친남 의상이었던지라
선묘는 한 눈에 반해버리고 말았죠.

선묘는 의상을 극진히 대접했으나 스님이었던 의상은 그녀를 마음에 둘 수 없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화엄사상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데
종남산의 지엄삼장이 불교의 신학풍을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었던 의상은 지엄의 문하생이 되었고
화엄학을 공부해 스승의 대를 이을 제자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지엄에겐 의상과 쌍벽을 둘 만한 제자가 한 사람 더 있었는데,
당나라 출신의 법장이었죠.

유학의 목적이 달성될 무렵, 의상은 신라로부터 급보를 받게 됐습니다.
당나라가 신라를 치려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었죠.
그러자 의상은 법장스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귀국을 결심했죠.


▲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입니다.
대체로 위에서 2/3지점이 가장 굵은 배흘림기둥으로 
이는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고 안정감을 높여 준다고 합니다.

귀국길에서 의상은 자신이 당에서 머물며 대접받았던 곳을 찾아가
작별인사를 고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의상은 자신을 위해 선묘가 매일같이 기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안타까웠지만 자신의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냉정히 돌아섰습니다.

신라로 향하기 위해 의상이 포구에 올라 배를 타고 떠나려는 순간,
선묘가 의상을 위해 지은 옷을 들고 뒤따라왔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녀는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용이 되어 의상의 무사귀국을 돕겠다고 하며
바다에 몸을 던져 버립니다.

의상은 그 덕분(?)인지 무사히 귀국했고 나라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당과의 전쟁도 마무리에 접어들 무렵,
그는 국사에 올라 한 나라의 정신적 지주에 이르렀죠.

불교 전파와 정신적 인재 양성에 관심이 있던 의상대사는
영주 인근에 사찰을 세우려했는데, 도적 때가 닥친 것이었습니다.

▲ 부석사의 계단은 9품계로 되어 있어 시작부터 걸으면 약 25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이 계단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 올라가는 사람에겐 빨려드는 신비감을 준다고 하네요.

이 때 죽은 선묘가 용으로 나타나 번개를 일으켜 바위를 때리니
거대한 바위들이 떨어져 나왔고
산신은 봉황으로 변해 이 바위를 들어올려 둥둥 떠있으니
이것에 놀란 도적들이 참회하여 제자가 되길 청했다고 합니다.

바위가 떠 있었다고 해서 이 절 이름이 부석사가 되었고
그 뒷산은 봉황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곁에 두고 볼 수 있었겠지만
선묘는 죽어서야 님과 함께 하게 됐으니
그녀의 사랑은 선덕여왕의 그것에 비해 더 애절하고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부석사와 무량수전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추가합니다.

부석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졌지만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중수, 개축하였습니다.
그래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량수전의 양식도 고려시대의 것이죠.

▲ 고려시대의 건축물은 천장을 이렇게 두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흙으로 막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고려시대에 비해 목조건축물이 퇴조했습니다.
무량수전에 비해 경복궁이 더 못한 건물이라는 설명을 들은 바 있습니다.
이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건축에 대한 투자와 열정이 식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계단 왼쪽의 벽은 '석축'이라고 하는데 돌이 생긴 모양 그대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불국사의 석축은 인공미가 뛰어나고, 부석사의 석축은 자연미가 뛰어나는 평입니다.

▲ 양 기둥을 이어주는 나무를 보시면  크기가 다릅니다.
기둥에서 가장 하중을 많이 받는 부분은 가장 모서리 부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비대칭적으로 설계했다고 합니다.

▲ 고려시대까지는 한지가 비싸서 보시는 것처럼 나무로 문을 막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채광이 좋지 못해 절이 어두웠습니다.
조선시대에 오면서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신도 수가 줄어들면서
문을 창호지로 바꾸고 밝은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불교국가인 고려시대까지는 사찰 건물 내에는 높은 신분이 아니면 출입을 못했는데
조선시대에 오면서 일반 양민들이 절을 드나들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습니다.


▲ 무량수전에서 바라본 부석사 전경입니다.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부석사 전체를 하늘에서 보면 빛날 화(華)의 형상을 한다고 합니다.
부석사는 화엄종찰인데, 그 첫 글자의 華를 딴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