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형오가 만난 세상/김형오의 문화 카페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5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5
                              - 모던과 클래식, 골든혼 성곽 탐사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사진 고르느라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찍은 사진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보여드리고 싶은 장면들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이스탄티노플’은 그만큼 매력이 넘쳐나는 도시입니다.

  이번 편은 갈라타 타워로부터 시작됩니다. 탐사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 도시의 전경을 높은 곳에 올라 사방팔방으로 관찰하기 위해 맨 먼저 찾아갔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라타 탑을 내려와서는 골든혼을 옆에 끼고 승합차로 천천히 달렸습니다. 골든혼(할리치)은 영문(Golden Horn) 의미 그대로 한자로 쓰면 ‘금각만(金角灣)’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은 걸까요?
  이곳 사람들은 두 가지 설을 들더군요. 첫째, 골든혼에서 침몰한 배들과 함께 가라앉은 금은보화가 많기 때문이라는 설. 둘째, 석양 무렵이면 짐승 뿔 모양을 한 골든혼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때문이라는 설. 둘 다 일리 있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설을 떠나 골든혼은 그 자체가 ‘금싸라기 바다’입니다. 그만큼 지정학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니까요.

▶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세운 *갈라타 타워 안내 표지판. 화재와 지진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재건축과 보수 공사를 거듭하며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의 역사를 갈라타 지역 가장 높은 곳에서 묵묵히 지켜본 이 도시의 산증인이다.



*갈라타 타워 : 528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맨 처음 건립했으나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으며 1348년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크리스티 투리스’(그리스도의 탑)란 이름으로 재건축되었다. 오스만 시대에도 여러 차례 재건축을 하며 화재 및 기상 관측, 적의 침입 감시, 포로수용소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에는 목재였던 내부를 콘크리트로 바꾸고 일반인들에게도 관람을 허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올라가면 터키 민속춤과 밸리댄스를 감상할 수 있는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이 있다. 타워의 높이는 62.59미터, 꼭대기 장식물까지 포함하면 66.90미터이다. 벽두께는 3.75미터, 안쪽 지름은 8.95미터. 탑을 둘러싸고 외벽에 14개의 창문이 나 있다.

  골든혼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를 승합차로 둘러본 우리는 차에서 내려 해안 쪽 성곽을 탐사했습니다. 육지 성곽(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과는 달리 이곳은 외(Single)성벽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골든혼 자체가 든든한 방어선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매립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1453년 당시에는 개펄과 바위가 많아 해안 성벽으로의 접근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보여 드릴 사진에서와 같이 두께와 높이, 그리고 강도(强度) 면에서도 만만치 않은 성벽이어서 오스만군도 이곳은 주요 공략 지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세월이 흘러 개펄 해안이 점점 굳어 육지화되면 비잔틴은 그 지점까지 또 성을 쌓았습니다. 어떤 성벽은 다른 성벽보다 유난히 더 앞으로 튀어 나왔거나 2중 혹은 3중 성벽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외부 세력이 감히 쳐들어올 엄두를 못 내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증축이 돼간 겁니다. 다만 성이 축조된 이래 꼭 한 번 4차 십자군 전쟁 때 골든혼 쪽 방어선이 뚫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당시에도 온전했던 골든혼 쪽 성벽들은 육지 성곽과는 달리 지금은 옛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도로 개설 및 도시 개발 과정에서 인위적인 훼손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열 마디 말보다 한 컷의 사진이 더 생생하게 증언해 줍니다.
  자, 그럼 이쯤에서 사진과 함께 하는 오늘의 탐사를 시작해 볼까요.

 

▲ 갈라타 타워를 등지고 이경숙씨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설명에 열중하고 있다. “의장님,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헤자르펜 아흐멧 찰레비’란 사람이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이 탑 꼭대기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아시아 지역인 위스크다르 언덕까지 날아가는 신기록을 세웠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 ‘헤자르펜 타워’로도 불리지요.”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전망대에서 종이비행기나 몇 개 접어 바다 쪽으로 날리고 올 걸 그랬다.

▲ 갈라타 타워 전망대에서 카메라에 잡은 아야 소피아(사진① 왼쪽),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사진 ① 오른쪽), 이스탄불대학교 중앙 탑(사진 ②), 쉴레마니예 모스크(사진 ③).
전망대는 360도 조망이 가능한 구조여서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비롯해 마르마라 해와 골든혼(금각만, 하리치)은 물론 이스탄불 구시가지 및 신시가지 전체를 빙 둘러가며 볼 수 있다. 1453년 전쟁 당시 만약 비잔틴군이 이 전망대를 이용할 수 있었더라면 전황도 좀 더 달라졌으리라.

▲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골든혼 쪽 성벽들. 벽돌과 돌·흙 등을 이용해 기하학적이면서도 자연스런 미감을 뽐내고 있다. 돌과 돌, 벽돌과 벽돌, 돌과 벽돌 사이에는 강력한 식물성 접착제를 발라 놓았다. 오른쪽 성벽은 2중 성벽 모습을 하고 있다.

▲ 유네스코의 예산 지원을 받아 복원한 성벽 모습. 일률적이고 인위적이어서 예스런 멋이 사라졌다. 화장과 성형 수술로 치장하고 멋을 낸 미인을 보는 듯하다. 수비군이 창검이나 활로 맞서 싸우기 유리하도록 네모난 구멍 뒤는 넓고 앞은 좁은 형태이다. 일정 부분 방패 역할을 해낸 것. 부챗살 모양을 하고 있는 구멍 위의 아치는 비잔틴 양식의 성벽임을 말해 준다. 이스탄불은 1985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복원 공사가 최근에 이루어졌더라면 이보다는 나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시대의 비잔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복원된 성곽 모습을 본다면 현대 문명의 수준을 얕잡아 보지는 않을는지….

▲지각 변동으로 땅이 솟아올라 문과 자동차의 왼쪽 벽 부분이 반 지하 상태로 변했다. 1층 표시와 3층 표시 부분은 대칭을 이룬다. 1층도 지표면의 융기로 인해 거의 지하층이 된 상태. 창문들이 비잔틴 양식이다. 지붕 위를 보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란 가운데 잎이 무성한 나무가 앞머리를 건물 이마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 1500여년 된 성벽 위로 화살처럼 쏟아지는 여름 햇살 아래 각양각색 빨래들이 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마르고 있다. 중세와 현대의 기가 막힌 앙상블! 마치 퓨전 설치미술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 1898년에 완공된 불가리아 교회. 불가리아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보던 이곳의 원래 이름은 ‘성 스테판 교회’이다. 외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고딕 양식과 신바로크 양식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사전 제작한 주철 구조물을 다뉴브 강과 흑해를 거쳐 배에 싣고 와 조립은 이스탄불에서 하는 독특한 건축 방식을 사용했다. 이 교회는 정면이 골든혼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지만 터키가 비교적 타 종교에 관대한 나라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해마다 6월이면 이 교회에서 인터내셔널 이스탄불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 성벽 문을 뚫고 차도를 만들었는데 인도가 없다. 문화재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런 걸까. 성문을 통과하면 왼쪽 옆으로 작은 보행자 도로가 나 있다. 가슴과 등을 밀착시킨 청춘 남녀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성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 부분도 3중 성벽 못지않은 두께를 갖고 있다.

▲ 성벽 위에 연립 주택을 짓고 사는가 하면 성벽 사이에도 집이 있다. 빨래가 널려 있는 연립 주택 맨 꼭대기 층의 창문으로 어느 예쁜 소녀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가는 우리가 쳐다보자 부끄러운 듯 이내 안으로 숨어 버렸다. 창문 밑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면 다시 나타날까나.

▲ 1500년 된 성벽 위에 지어 올린 시멘트 건물 옆으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모던한 느낌의 화이트 하우스와 금방이라도 나무 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낡은 판잣집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성벽 틈에는 풀이 돋아나 있고, 그 밑으로는 폐건축 자재 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다. 무성하게 자란 무화과나무가 쓰러질 것 같은 집을 떠받쳐 주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 성벽 위로 연립한 현대식 주택들. 우리나라도 왕년에는 이런 적이 있었던가.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이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는 ‘이스탄티노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짧은 기간에 급팽창해 1000만을 훌쩍 넘는 인구를 갖게 된 세계적인 거대 도시가 갖는 한계일까. 유럽 쪽이 아시아 쪽보다 땅값이 비싸다 보니 특히 골든혼 성곽 지역이 더 크게 훼손된 측면도 없지 않으리라.

▲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문양 같은데 훼손도가 심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단순한 장식일까, 다른 용도가 있는 걸까. 이 도시에는 이런 애매한 문화유산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 골든혼 쪽 성곽을 누비고 있는 4인조 탐사대. 맨 앞의 모자 쓴 사람이 나, 김형오이다. 성곽 위의 아파트나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는 하도 많이 보아서 무덤덤해졌다. 왼쪽 차도 건너로 골든혼을 끼고 흘러가는 바닷물이 웅덩이처럼 보인다.

▲ 골든혼 성곽 안쪽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본부(페네르 그리스 관구)를 향해 가고 있다. 기독교의 성물과 성녀들의 묘지, 주교가 앉는 의자, 귀중한 성상 등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다.

▲ 그리스 정교회 벽면에 새겨져 있는 비잔틴의 상징 쌍두 독수리. 두 개의 머리는 왕국의 주권과 동서양을 초월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상징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은 지금도 국가의 상징으로 문장(紋章) 등에 이 쌍두 독수리 문양을 쓰고 있다.

▲ 그리스 정교회에서 만난 벽화. 정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성 조지)의 용감한 모습이다.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자 14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게오르기우스는 회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칼이나 창을 들고 용(드래곤)을 무찌르는 백마 탄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성벽과 가로등 사이를 통과해 좁은 길로 가다가 문득 그런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 좁은 길이 생명 길이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길임을 강조한 말씀이다. 물론 ‘구원’을 얻기 위해 나선 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도시에서 ‘영원’한 제국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 뒤로는 13절과 14절에 걸쳐 이런 말씀이 이어진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그리스풍으로 지어진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그리스 요리를 점심으로 먹었다. 우리가 타고 다닌 승합차와 운전기사 에르한의 모습이 보인다.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와 우리말 실력이 보통이 아닌 친구였다. 내 카메라폰에 담은 이 식당의 내부도 한 쪽 벽면은 성벽을 그대로 활용한 모습이었다.

▲ 그야말로 부서진 성벽이다. 잔해만 남았다. 그래도 그 부서진 면면을 보면 이 성벽이 얼마나 단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실감이 난다.

▲ 골든혼 성벽 바로 뒤 안쪽에 있는 오스만 시대의 수도.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난 뒤에 대대적으로 수도 시설을 확충 보급했다. 치수(治水)야말로 정치(政治)의 기본임을 알았던 까닭이리라.

▲ 성벽의 높이와 두께를 실감해 보자. 거구의 사나이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진 위로도, 그리고 왼쪽 옆으로도 성벽은 더 높고 길게 이어져 있다.

▲ 아타튀르크 다리 부근에 있는 지발리 성문 앞. 성문 위로 모스크가 보이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져 있다. 골든혼 연안 성벽에 있던 도시로 들어가는 몇 개의 성문 중 현재는 아야 성문과 함께 유이(唯二)하게(?)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성문이다. 그러나 1453년 전쟁 당시에는 골든혼이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주어 이쪽 지역의 성곽들은 온전한 모습이었다. 지발리 성문 오른쪽 벽에는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만든 현판▶이 붙어 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오스만 사령관 ‘제베 알리 베이’가 무혈입성한 문이라고 한다. 그 뒤 세월이 흐르면서 사령관 이름(제베 알리)을 따 마을 이름이 ‘지발리’로 바뀌었다. 왼쪽 벽에는 흰색 표지판이 걸려 있다. 내용은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 웬 깃발들이 이렇게 줄지어 세워져 있나. 알고 보니 대학교 깃발들이었다. 위 사진 성벽에 ‘쓰레기 투기 금지’ 팻말을 걸어놓은 바로 그 대학이다. 민가뿐만 아니라 이런 공공건물도 성벽을 담벼락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학 간판도 성벽을 이용해 붙여 놓았다.

▲ 골든혼 건너편 카슴파샤 지역. 선박과 조선소·크레인 등이 보인다. 1453년 여기에서 무슨 일이?

▲ 원근감을 무시하고 그린 골든혼의 옛 모습. 입구에 굵은 방어 철책을 설치해 놓았다. 보기에도 견고한 이 쇠사슬 때문에 술탄의 배들은 골든혼으로 진입을 하지 못한다.

 

  맨 밑에 실어놓은 두 컷의 사진은 ‘이스탄티노플 여섯 번째 이야기’의 예고편 격입니다. 다음(6편)은 ‘배가 산으로 가다’ 편이 이어집니다.

 

*P.S. 이스탄티노플 4번째 이야기에도 많은 분들이 격려의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몇 분의 글을 발췌해 옮겨보면….

  “불타는 탐구욕과 활활 끓고 있는 그 열정에 심심한 존경을 보냅니다. 건강도 살펴가며 하시기 바랍니다.”(이우종님)
  “옛 우물에서의 은어 낚시! 이스탄불이라는 우물에서 등비늘 반짝이는 은어들을 많이 낚으신 것 같군요.”(피플님)
  “다음에 꼭 그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네요. ‘이스탄티노플’ 명예시민으로서….”(두륜님)
  “그림을 보고 있으니 그 정밀한 묘사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 그림 읽어 주는 남자?”(산리마을님)
  “역사는 투쟁 속에 진보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황제와 술탄의 대결, 흥미진진합니다.”(Socio89님)
  “글맛과 묘사의 역동성과 생생함의 차원이 다르다. 진정성을 갖고 역사의 진실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며 다가갈 때 그만큼 살아 있는 글이 된다는 것도 잘 보여준다. 함락의 막바지에 운명처럼 다가오는 오스만 군대의 대포 소리와 군악대의 우렁찬 소리 사이로 들리는 비감한 교회 종소리를 회상하는 필자의 묘사는 너무나 압권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못지않은 김형오 의장의 ‘이스탄티노플 이야기’를 이제는 지인들과 나눠야 할 것 같다.”(술탄님)

  그밖에도 여러 분들이 덧글로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힘으로 이 벅찬 작업을 감당해 나갑니다. 앞으로도 의정 활동 틈틈이 시간을 내어 전심전력하겠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5편갈라타 타워(지도 윗부분, 빨간색 사각형 글씨)골든혼 성곽 일대(지도 윗부분, 빨간색 표시부분)를 탐사한 내용이다. 육지 성벽에 비해 훨씬 훼손 정도가 심한 지역이다. 성벽을 건물의 한 부분으로 삼아 이렇게 많은 집을 지은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 갈색 사각형 부분 3편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