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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우체국(서신)/보낸 편지함

[국민일보] 특별기고 - 담장 안에 있는 ‘그대’에게


  교도소 담장 안에 있는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그대 얼굴도, 이름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득 편지와 함께 지난봄에 펴낸 내 책을 그대에게 보내고 싶어졌습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아름다운 나라』. 국회의장 시절 국정감사 기간을 이용해 백령도에서 울돌목까지, 울산 반구대에서 평화의 댐까지 우리 땅을 동서남북으로 가로지르며 만난 벅찬 감동과 길 위에서의 사색을 러브레터를 쓰듯이 편지 형식으로 옮긴 책입니다. 내가 이 책을 전국의 54개 교도소 및 구치소에 각 3권씩 보내기로 마음먹은 건 작년 4월에 받은 한 통의 편지 때문입니다. 발신인은 청송교도소에 수감 중인 서른세 살 재소자. 그해 봄에 출간한 내 책(『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 한 권을 보내 달라는 부탁과 함께, 교도소 담장 밑에서 주워 말렸다는 들꽃 한 잎이 편지지에 붙어 있었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면서…. 나는 그 노란 꽃잎이 마치 노란 나비 날개처럼 가슴 뭉클한 사연을 싣고 팔랑팔랑 교도소 담장을 넘어 내게로 날아온 느낌이었습니다. 그가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잠시나마 담장 너머로 바깥나들이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내 책에 사인을 했습니다.


  감옥은 독서와 사색 그리고 집필의 시간을 갖기에는 안성맞춤인 공간입니다. 『김대중 옥중 서신』(김대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야생초 편지』(황대권) 등이 감옥을 모태로 태어났습니다.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인 호치민의 『옥중 일기』, 인도 독립운동가 네루의 『세계사 편력』,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등도 감옥에서 잉태되었습니다. 모파상·체홉과 더불어 세계 3대 단편 작가로 꼽히는 오 헨리도 3년간의 수감 생활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과 구상을 토대로 『마지막 잎새』를 비롯한 수많은 명편을 썼습니다. 그들에게 감옥은 도서관·대학·집필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감옥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닙니다. 비좁은 방 안이 광대무변한 우주로 탈바꿈합니다. 무의미하고 건조했던 하루하루가 가치 있고 뜻 깊은 시간으로 거듭납니다. 적어도 휴식과 충전의 기회로는 삼을 수 있습니다.

  그대도 칠레 광부들 이야기를 알고 있겠지요? 지난가을 칠레에서 생중계된 한 편의 휴먼 드라마가 지구촌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감옥보다 더 깊고 어두운 절망 속에서 33인의 광부들이 69일 동안 캐 올린 것은 사랑과 신뢰, 용기와 도전, 그리고 인간의 존엄이었습니다. 까마득한 지하, 캄캄한 갱도 안에 환한 등불을 밝혀 준 것은 다름 아닌 기도와 찬송이었습니다. 살아나온 광부들의 티셔츠에는 CCC(칠레대학생선교회) 로고와 함께 ‘주님, 감사합니다’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대에게도 충분히 그런 기적이 가능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만든 구조용 캡슐 ‘피닉스’를 타고 ‘불사조’가 되어 더욱 강하고 성숙해진 모습으로 교도소 담장 너머 밝은 햇살 아래로 귀환하게 될 그대를 소망하고 응원하며 기도하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가 어떤 사연으로 거기에 갇혀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바라건대 이 한 권의 책이 참회와 성찰과 성장의 시간을 살고 있는 그대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고, 나아가 ‘이 아름다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해준다면 더 큰 보람과 기쁨이 없겠습니다.

  곧 한 해가 저물고 새 달력이 벽에 걸립니다.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시기를…. 아울러 겨울이 깊어갈수록 그대를 더욱 그리워하고 안쓰러워할 가족과 친구, 지인들에게도 기도와 함께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동봉한 책 마지막 장에 실린 이 한 줄의 글을 그대에게 바칩니다. “희망은 담을 문으로, 벽을 창으로 만듭니다.”

[2010. 11. 28. 김형오 전 국회의장 국민일보 특별기고]


 

 <편집 메모>

  이 편지를 국민일보에 기고하면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약속대로 162권의 책을 재소자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많은 답신을 받았습니다. 

  *수용자들을 위한 교양도서로 유익하게 사용하겠으며, 이를 계기로 우리 직원 모두는 보다 넓은 마음으로 수용자 교정교화 활동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제주교도소장)
  *의원님의 따뜻한 마음이 책을 읽는 모든 수용자의 지식 함양과 심성 순화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춘천교도소장)
  *수용자 교정교화가 '굽은 나무 펴기'보다 힘들다고 하지만, 의원님과 같이 넓은 마음으로 우리 사회를 걱정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이들이 새 삶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 교도관들은 용기백배하여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부산교도소장)
  *의원님께서 기증하신 도서는 수용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어 이들의 참다운 사회 복귀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부산구치소장)
  *앞으로도 수용자들이 새 삶을 찾아 건전한 사회인으로 새출발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천안교도소장)

  *우리 모든 교정 직원은 흐르는 강물에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수용자 교화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보내 주신 책은 수용자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담장 안에서 보낸 편지에도 귀기울여 주심에 삼사드리며 2011년에도 국민의 목소리에 화답하는 희망의 정치를 기원하겠습니다.(영등포교도소장)
  *온정어린 후원 덕분에 수용자들은 보다 인간적인 배려를 통하여 앞으로의 인생을 희망과 감사의 자세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홍성교도소장)

  그밖에도 편지 보내 주신 많은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도 어느 교도소 형광등 불빛 아래서 누군가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선물한 책을 읽고 있겠지요? 책을 읽다가 가슴 위에 펼친 채로 잠이 들면 그 책이 담요처럼 그 분을 따뜻이 덮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꿈꾸시기를….
  잊을 건 잊는 잊을 망자 忘年을 잘 마무리하시고, 바랄 게 많은 바랄 망자 望年, 희망찬 새해를 맞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