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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실록(제도개선등)/김형오의 말말말

한미 FTA 처리, 시기·방법 분명히 하자

한미 FTA 처리, 시기·방법 분명히 하자


한미 FTA와 관련해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내 집무실로도 항의성 전화가 빗발쳐 업무를 못 볼 지경입니다. 욕설과 폭언은 물론 한나라당 외통위원들을 통틀어 ‘매국 18인’으로 매도하는 등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대화는 단절됐고 토론은 실종돼 버렸습니다. SNS를 통해서도 터무니없는 루머와 근거 없는 비방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미 FTA가 우리 경제의 새날을 열고, 새아침을 밝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는 내 소신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 글이 차분한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데 참고가 됐으면 합니다.


 

출처: 프레시안_이진경기자

어제(3일)였다. 국회는 경찰버스로 온통 둘러싸였다. 경찰들이 국회 출입구는 물론 곳곳에 배치됐다. 분위기가 사뭇 심각했다. 본회의가 있는 날이었지만 결국 회의는 취소됐다. 1시간가량 열린 의원총회에서 한미 FTA 문제를 놓고 의외로 차분한 토론이 진행됐다. ‘시기·방법은 지도부에 맡겨 달라’는 원내대표의 마무리 발언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고 물 빠지듯 의총장을 빠져나왔다.

의총에서 나온 발언들을 간추려보자. ‘모양내기’, ‘우왕좌왕’, ‘이미지관리’, ‘처리 가능한데도 안하고 있다’, ‘강행처리하면 회복불능상태가 온다’, ‘야당은 강행처리를 유도하고 있다’, ‘노림수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속 시원하게 해치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다’, ‘집토끼 다 떠나간다’, ‘죽으라면 죽으리라’, ‘각오, 의지가 약하다’, ‘질서 있는 단합이 필요하다’, ‘최소한 처리하려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한다’는 등 그럴 듯한 말, 좋은 말들은 다 나왔다.

출처: 연합뉴스 / 2일 외통위 회의실 입구


2일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상임위장에서는 여야간 격돌이 있었다(적어도 언론은 그렇게 보고 있다). 외통위원으로서 점심도 김밥 몇 조각으로 때우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내년도 외교통상부 소관 예산안 심의가 안건이었다. 상임위 회의실은 이미 강경야당에 의해 봉쇄, 점거된 상황이었다. 예산안 심의기간만은 회의실 점거를 안 하겠다는 여야간 (암묵적) 합의는 또 깨졌다.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도 안 지켜지는 마당이니 서로 간 신뢰는 이미 무너진 상태다. 질서유지권이 발동되었지만 경위 몇 명으로 의원은커녕 야당 보좌진도 제어 못했다. 물리력을 앞세운 야당의 강경저항에 전체회의실에서는 회의가 불가능했다. 소회의실에서 기습(?)회의가 시작됐다. 여야 상임위원, 다른 상임위 소속 야당의원, 야당보좌관 그리고 무엇보다 TV카메라, 각종 매체기자들로 좁은 회의실은 꽉 메워졌다.

우리 위원회에서만 진행된 한미 FTA 관련 토론과 논의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FTA 문외한이던 나도 웬만한 전문가 수준에 이를 정도로 어디 가서든 안 빠진다. 이쯤 되면 서로 간 타협점을 찾고도 남을 만한데 양상은 거꾸로 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견수렴은커녕, 간극은 더 벌어진다. 말 모양새, 말 쓰임도 살벌해졌다. 야당은 완전히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은 듯했다. 강행처리를 하지 않겠다는 여당지도부의 방침이 야당에게도 간파됐다. 온건한 여당 지도부와 강경한 야당 주도세력이 싸우니 결과는 매번 싱겁게 끝났다. 지금은 인내력 테스트와 같은 상황이다. 누가 실수하기만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상대의 실수를 유도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다들 백전노장들이라 아슬아슬하지만 줄타기를 잘하고 있다.

FTA를 둘러싼 여야 힘겨루기의 특징 중 하나는 ‘직권상정’ 얘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지금 정도 되면 으레 언론보도를 꽉 채울 말인데도 한 귀퉁이에 겨우 보인다. 물론 며칠 후부터는 전면으로 나올 수밖에 없겠지만, 이런 장기대치 속에서도 ‘직권상정’ 발언을 자제하는 것만으로도 국회가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든다. 불과 2년 전만해도 걸핏하면 국회의장을 압박하며 직권상정 하라고 몰아붙였던 청와대, 정부, 여당이 우선 조심스럽다. 국회의장의 인격까지 모독하며 직권상정을 부추겼던 보수언론조차 쉽게 나서려하지 않는다. 2년 전에는 직권상정을 최대한 미루며 대화와 타협을 종용하려는 국회의장의 목소리를 일언반구조차 반영하지 않은 언론과 여야 지도부였다. 여야 강경파들이 밀고 당기며 국회를 전쟁터로 전락시키는데도 서로를 편가르기나 하며 싸웠다.

여당의원으로서 내 생각을 말해보겠다. 현재까지는 대응을 그런대로 잘해왔다고 본다. 그러나 여당지도부라면 시기와 방법에 대해 확고한 입장정리가 돼 있어야 한다. 대화의 문은 열어놓고 협상의 끈은 최후까지 부여잡되 진정 더 이상 양보할 것이 있는지 아니면 대화형식만 취할 것인지도 내심 작정해둬야 한다. 청와대, 정부와의 관계는 물론, 지지여론을 안정시킬 노력도 비상히 기울여야 한다. 언제 처리하든 처리만큼은 과감함과 용의주도함을 보여야 한다. 또 지도부의 전략적 실패로 해를 넘긴다면 상응하는 모든 것을 책임질 결연함도 지녀야 한다. 그동안 외통위는 그런대로 선전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 여야 모두 국민에게 진정성은커녕 당리당략에 매몰된 싸움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을 것이다. 집권여당이 더 큰 타격을 입을 것은 뻔하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한 후 의원들 간 충분한 공감대를 이루도록 지도부가 직접 설득해야 한다. 치밀한 계획 아래 전략전술을 세우고 행동은 그에 걸맞게 해야 한다. 직권상정도 생각처럼 쉽게 처리되진 않는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많아 계획은 잘 세우는데 치밀함과 치열함이 부족한 것이 한나라당의 현주소다. 동시에 한미 FTA의 당위성을 SNS 등 다양한 소통방식을 통해 정면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 보좌진, 비서진에게 시킬 일이 아니다. 의원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4월이 곧 다가온다. 하지만 겨울보다 더 추운 4월이 아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