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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실록(제도개선등)/김형오의 말말말

선거를 위한 ‘봄’이 아닌 미래를 위한 ‘봄’을 생각하자

<한미FTA 단상>

선거를 위한 ‘봄’이 아닌 미래를 위한 ‘봄’을 생각하자

한미FTA가 당최 진전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국회로 가서 여야 지도자를 만나겠다고 한다. 예정일은 15일인데 야당 쪽에선 선물을 가져와야 만나겠다는 태세다. 그날 만남이 성사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채 대통령은 APEC 정상회의 참석차 출국했다.


한미FTA로 인해 국회는 시위대와 경찰버스로 둘러싸였다. 집무실은 항의성 전화가 빗발쳐 업무를 못 볼 지경이다. 다짜고짜 낙선운동을 벌이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욕설과 폭언은 다반사다. 팩스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외통위(외교통상통일위원회) 의원들을 ‘매국 18인’으로 매도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서도 집단적 인신공격과 비방‧협박성 글들이 난무한다. 조직적 테러와 다름없다. 사태가 이럴진대 야당 의원들은 웬만한 용기로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가 힘든 상황이다. 절충안조차도 동의 표명한 순간 집단폭력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소신조차 밝히기 힘든 우리 국회의 자화상이다.

나는 FTA 주무위원회인 외통위 소속으로 FTA에 대해 좀 아는 편이다. 한미FTA를 놓고 많은 협상과 토론이 외통위에서 있었다. 끝내 끝장을 보지 못한 ‘끝장토론’까지 했다. FTA 추진 역사 또한 꽤 오래다.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추진됐으며, 내가 야당 원내대표 시절(2006-07)에도 공사석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요구받았고 답변도 했다. “좋은 FTA를 체결하자” “선대책 후국회동의”가 한결같은 답변이고 입장이었다. 야당이었지만 한미FTA 자체를 반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농업대국인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 농축산업의 피해는 불가피하다. 그 피해대책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 주관심사요 중점논의 대상이었다. 나는 또 여야 막론하고 농어촌 지역 의원들이 포진해 있던 당시 농해위(농림해양수산위원회, 현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소속이어서 이 문제를 직접 논의하고 지도부로서 입장도 표명했다.


정권이 바뀌고 여야 간 공수도 바뀌었다. 그러나 농축산 대책 논의는 여야 없이 적극적이었다. 당초 21조원 규모였던 피해대책 금액이 이 과정에서 22조원으로 늘어났다. 대규모 추가 지원책도 논의되고 있다. 한미FTA를 꼭 처리하겠다는 의지표현이다. 사실 난 이렇게 피해대책금의 증액에만 신경 쓰는 데는 내심 찬동하지 않는다. 농어촌 자립과 경쟁력 확보에 중점을 두지 않고, 일단 우는 아이 달래놓고 보자는 식으로 가니 말이다. 90년 초 개방화의 파고에 대비해 천문학적 금액을 지원했다. 문민정부 87조, 참여정부 119조원의 자금을 투입했다. 20여년이 흘렀건만 별 효과가 없다. 농어민 소득이 증대되거나 농어촌 삶의 질이 향상되거나 농어업 경쟁력이 크게 강화되지도 않았다. ‘밑 빠진 독 물 붓기’가 되지 않으려면 제대로 된 농정개혁을 수립해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FTA에 가장 반대해야 할 농축산업 쪽은 오히려 조용한 편이다.

절대 없다던 재협상까지 하고, 어이없는 협정문 번역 오류로 외통부는 곤욕을 치렀지만 국회에 사과하고 일단락됐다.(반대론자들은 아직도 이것을 좋은 공격의 빌미로 삼고 있다.) 정권이 바뀌고 여야가 바뀌었으니 입장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야당, 특히 민주당의 입장은 참으로 이해가 안 된다. 당내의 다수 의원이 암묵적으로 FTA가 불가피하다는데도 당 지도부는 막무가내다. 지도부가 소속의원들의 투쟁력만 부추기는 한 결코 수권정당이 될 순 없다. 국회는 대화와 타협의 장이 아닌 선동과 투쟁의 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도부의 말 바꾸기와 태도 변화는 경이로울 정도다. 한나라당 소속 경기도지사일 때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잘한 것은 한미 FTA다”라고 했던 당대표는 이제 와서 “이익균형이 깨졌으니 받아드릴 수 없다”고 한다. 추진 당시 통일부장관이었고 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가 지금은 “FTA는 을사늑약이고, 추진자들은 제2의 이완용”이란다. 당시 산자부장관으로 매우 친기업적이었던 사람도 강경반대파로 돌아섰다. 의원들로서는 선거가 다가오고 공천이 눈앞에 있으니 강경지도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FTA를 성사시키려는 온건합리파의 노력은 정말 가상하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도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결실을 맺기 어려울 것 같다.

민주당의 복잡한 당내 사정도 한몫 단단히 거들고 있다. 서울시장 재보선 후에 당 밖 세력의 흡수‧통합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지나치게 그들의 눈치를 본다. 그래서 자꾸만 강경하게 나간다. 고육지책으로 노무현 대통령 당시 합의했던 ISD조항(투자자-국가소송제도)을 들고 나와 재개정 전에는 동의 못하겠다고 한다. 합의 당시 “투자자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합리적인 제도”로 높게 평가했던 ISD가 이제는 독소조항으로 탈바꿈됐다. 말도 안 되는 억측과 논리비약, 괴담까지 등장한다. “ISD가 없어지면 미국 투자자들은 한국 법정에서만 이의제기를 할 수 있어 우리의 사법주권이 확립된다”는 논리지만 그야말로 맹점투성이다. 그렇다면 똑같은 조건으로 우리 투자자들은 미국 법정에서만 재판을 받는다. 미국의 대한투자보다 한국의 대미투자가 훨씬 많다. 이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다. 한국인을 국제중재재판소가 아닌 미국법정에만 서게 하겠다는 것인가. 이것이 국민의 재산과 권익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할 노릇이고 공당이 할 일인가. 할 말이 없으니 국제중재재판소는 미국이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중재재판관은 압도적으로 미국인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중재재판은 한국측 1인, 미국측 1인, 제3국 1인, 이렇게 구성한다. 그리고 미국 기업이 국제중재에 제소하여 이긴 사례보다 진 경우가 더 많다(승소 15, 패소 22).

더 이상 통하지 않자 이젠 우리의 의료보험, 공공요금 등 별별 것들이 다 ISD 제소 대상이라 한다. 한마디로 협정문조차 안 읽어 본 사람들의 몰상식한 상상력에 불과하다. 모르면 물어보고 공부해야 하는데 억측만 갖고 밀어붙인다. 또 재협상(재재협상)하기 전엔 안 된다 하고, 총선 후 이긴 당이 결론짓자고도 한다. 참 뻔뻔스럽다. 언제는 미국이 FTA 처리하기 전엔 안 된다고 했던 이들이 이처럼 쉽게 말을 바꾼다. 미국 상하 양원을 통과하고 미 대통령이 서명한 FTA를 재협상, 재재협상하자는 것은 국제적 무식의 소치다. 망신거리, 조롱거리밖에 안 된다. 지금 처리하면 이것이 총선심판의 잣대가 될 터인데 굳이 총선 뒤로 미루자는 것은 무조건 시간부터 끌고 보자는 전략이다. 한마디로 미국이 싫고 한국이 무역선진국이 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유독 한국에서만 수구적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또 양식 있는 진보주의자들은 왜 침묵을 지키고 있을까. 세계 경제의 흐름이 자유무역체제로 가고 한미FTA에 긴장한 일본이 FTA와 유사한 TPP(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를 미국과 서두르고 있는 형편인데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 오는 것도 싫다고 한다. 그렇게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야당과 접촉하라고 강요했던 사람들이 말이다.


국회 외통위는 열흘 넘게 야당 당직자로 보이는 이들에게 점거당해 있다. 회의는 원천봉쇄 당했다. 회의장 밖에서 불법이든 편법이든 알아서 하라 한다. 민주주의의 보루인 국회가 불법폭력에 점거․유린당해도 속수무책, 수수방관이다. 이들 불법폭력 세력들이 ‘민주주의’를 소리 높이 외쳐댈 땐 실소가 나온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 때의 탄핵 정국이나 ‘미디어법’처럼 직권상정을 유도해 국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겠다는 것 아닌가. 이들에겐 국익도 미래도 안중에 없다. 오직 권력욕만 가득할 뿐이다. 광우병 촛불시위로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이들이 이젠 끝장을 보겠다는 속셈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위기다. 정권 하반기 청와대는 힘이 빠지고 집권당은 무기력하고 선거는 가까워온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그들이 잘못 짚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국이 산다. 이보다 더한 위기도 극복해온 우리가 아닌가. FTA는 이래저래 한국의 미래가 걸려 있다. 거듭 강조하건대 내년 봄 총선이 아닌 ‘대한민국 미래의 봄’을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