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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술탄의 배는 산을 넘어, 비잔틴에 멸망을 고했다

 

2012-11-24 [조선일보]기사   바로가기 클릭

 

로마제국의 마지막 동양이 서양을 누른 문명사적 대사건, 콘스탄티노플 전투

가상의 '황제 일기'와 '술탄의 비망록' 통해 둘의 리더십 대결 담아

 

술탄과 황제김형오 지음|21세기북스|464쪽|2만5000원

"원군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어딘가 오고 있거나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자"(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그 도시를 나에게 달라. 그러면 성 밖 다른 도시를 그대에게 주겠노라"(오스만 튀르크 술탄 메흐메드2세).

1400년간 지속한 로마제국이 종말을 고한 1453년 5월 29일의 콘스탄티노플 전투를 역사적 사실과 소설 그리고 이스탄불 방문기 등 3부로 정리했다. 저자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 그는 4년간 5차례에 걸쳐 이스탄불을 방문·체류하면서 방대한 자료조사와 전문가 인터뷰, 답사를 통해 이 거대한 문명사의 전환점을 생생하고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2부 '황제의 일기와 술탄의 비망록'. 저자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의 옷을 입혔다. 전투가 끝난 후 황궁의 비밀금고에서 최후의 50여일간 황제가 쓴 일기를 발견한 술탄이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는 가설이다.

사실 전투 이전에 전세(戰勢)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발칸 지역은 오스만의 영향력 아래로 넘어간 지 오래고, "튀르크군 1만명보다 기독교 병사 100명의 행군이 더 시끄럽다"고 할 정도로 비잔틴제국의 군기(軍紀)는 엉망이었다. 200년 전 제4차 십자군의 침략으로 노략질당한 콘스탄티노플은 아직도 복구가 덜 된 상태였다. 끊임없는 내분과 갈등 때문에 황제는 정식 대관식도 못 올렸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최첨단 무기였던 대포를 만드는 기술자가 요구하는 돈을 지불하지 못해 오스만군으로 넘어가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튀르크 술탄 메흐메드2세가 비잔틴제국의 해상봉쇄를 뚫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 산을 넘어 전함을 옮기는 장면을 그린 그림. /21세기북스 제공

저자는 '일기와 비망록'을 통해 '황제 5년차'인 40대 중반의 콘스탄티누스 11세와 '술탄 10년차'인 21세 청년 메흐메드2세, 두 사나이의 사생결단 리더십 대결을 손에 잡힐 듯 그려낸다. 당시 최첨단 무기들이 총출동하고, 첩보전과 심리전도 동원된다. 바닷길이 막힌 술탄은 언덕에 레일을 깔고 전함 72척을 끌어올려 내해(內海)로 진입시킴으로써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을 수사(修辭)가 아닌 현실로 바꿔놓았다. 땅굴 10여개를 파서 해자와 성벽 아래로 기어오는 술탄의 군대를 황제는 역땅굴로 무력화시킨다. 하지만 베네치아, 제노바, 러시아 어디서도 기다리는 구원군은 오지 않는다. 의지할 데는 기도뿐. 기도 소리와 대성당의 종소리, 오스만군의 진군을 알리는 악기 소리, 군인과 시민들의 비명이 뒤섞인 가운데 비잔틴제국은 마지막 숨을 거둔다.

저자가 상상으로 쓴 일기와 비망록은 충분한 개연성을 갖춰 건조한 역사적 사실에 피를 돌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정치인 책'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도 좋을 만하다. "정치인으로서 늘 현실적인 문제에 묻혀 있다가 4년 전 이스탄불에서 새로운 출구를 봤다"는 저자는 "동양이 서양을, 이슬람이 기독교를 눌렀던 문명사적 대사건을 통해 우리 안목을 세계사적 지평으로 확대하자는 뜻으로 (책을) 썼다"고 했다.

 

김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