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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술탄과 황제, 빙의하길 바랐던 국회의장

 

[내일신문] 2112-11-28 기사 바로가기 클릭


김형오 전 의장 '술탄과 황제' 책 펴내

비잔틴 최후 54일 일기형식 완벽복원

김형오(사진)란 이름은 우리에게 정치인으로 낯익다. 5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의장까지 역임했다. "혜택 많이 받고 운 좋았던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낮추지만 몇 안되는 '성공한 정치인'으로 꼽힌다. 18대 국회를 끝으로 여의도를 떠난 그가 반년만에 흥미진진한 역사책을 들고 돌아왔다. 주제도 이채롭다. 500년도 훨씬 더 이전에 벌어진 비잔틴제국 최후의 54일을 가공의 일기와 비방록을 통해 생생하게 복원해낸 것이다.

이 책의 시작은 비잔틴제국에 대한 '역사책스러운' 설명이다. 지루할 뻔했다. 하지만 불과 몇 쪽만 참고 넘기면 결코 '역사책스럽지 않은' 흥미진진하면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54일간의 치열했던 전쟁기록이 펼쳐진다.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던 저자는 마치 종군기자가 된 듯 패자인 비잔틴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와 승자인 오스만제국 술탄 메흐메드 2세의 일거수일투족과 머릿 속을 헤집고 다닌다. 수년에 걸친 꼼꼼한 취재는 어느 역사책 못지 않게 팩트를 충실하게 채워냈고 황제의 일기와 술탄의 비망록 형식을 빌린 기발함은 고루한 역사책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었다.

저자가 서술해낸 54일간의 전쟁은 생생하다.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포들의 발포가 개전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도대체 몇 문이나 되는걸까. 상상하였던 것보다 더 큰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87쪽 황제의 일기) "화살이 빗발치고 대포들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불붙은 나뭇조각들이 비잔틴 배를 겨냥하여 날아갔다. 우리 해군 일부는 닻줄을 끊고 쇠갈고리를 매달아 던진 밧줄과 배에 걸친 사다리를 붙잡은 채 비잔틴 전함에 기어오르려 안간힘을 썼으나 역부족이었다"(129쪽, 술탄의 비망록) "경이롭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하늘 아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술탄의 함대가 갈라타 언덕을 넘어 골든혼 바다로 진입하였다. 최소한 해발 60미터에 이르는 그 험한 산등성이와 비탈진 언덕을 수많은 배를 끌고서 넘어갔다니!"(165쪽 황제의 일기) 저자가 마치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듯 장면과 심리 묘사가 세밀하다.

이 책의 묘미는 40대 황제와 20대 술탄의 팽팽한 리더십을 비교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김 전 의장은 "터무니없이 적은 병력을 이끌고 54일을 버텼던 황제와 상대도 안되는 적을 54일동안 이기지 못해 풋내기라는 내부비판에 직면했던 술탄의 처지와 이를 극복했던 리더십은 사생결단의 대선을 치르는 후보와 참모들에게도 참고할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학자도 아닌 저자가, 그것도 먼 나라의 역사를 복원해내는 작업은 엄청난 땀과 고통을 요구했다. 2009년 국회의장 시절 터키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접한 사료를 보고 영감을 얻은 김 전 의장은 이후 100여권의 책을 읽고 전문가 수십명 인터뷰와 다섯차례 현장답사를 거쳐 책을 내놓았다. 생생한 묘사를 갈망하면서 술탄과 황제가 자신에게 빙의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김 전 의장은 "알레르기 때문에 에어컨도 켜지 못한 채 여름내내 집필하느라 고통스러웠지만 독자들의 평가가 생각보다 좋아 보람이 크다"고 기뻐했다. 그는 자신의 책이 해외에서도 평가받기를 원한다. "한국에서도 이런 깊은 연구를 통한 책이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전문분야 '한류'의 원조를 꿈꾸는 셈이다.

김 전 의장은 아직 60대 중반이다. 현업에서 더 뛰어야하는 나이다. "(불출마 뒤에도) 자꾸 정치권을 얼찐거리면 욕이나 먹지. 우리나라에서도 원로가 원로로 대접받는, 그런 지도층이 나와야 되지 않겠나. 다행히 내 취미가 이쪽(집필)이니 열심히 연구하고 쓰면 칭찬도 해주겠지." 뒤안길이 아름다운 원로가 낯선 탓일까. 그가 떠난 여의도가 더욱 을씨년스럽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