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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초평선…칭기즈칸의 얼과 혼이 서린 몽골에 가다

 끝없는 초평선…칭기즈칸의 얼과 혼이 서린 몽골에 가다

“대자연 앞에 서니 나는 단지 ‘하나의 점’일 뿐이더라.”

 

 

지난 1000년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인물은? 10여 년 전 워싱턴 포스트(1995년)와 뉴욕 타임즈(1997년)는 21세기를 앞두고 ‘밀레니엄 히어로’를 선정해 발표했다. 미국의 양대 유력지가 꼽은 주인공은 바로 칭기즈칸. 두 매체는 ‘인터넷이 발명되기 700여 년 전에 이미 네트워크로 세계를 경영했다’는 사실을 중요한 선정 이유로 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칭기즈칸 붐이 일기 시작했다.

소년 시절 위인전 속에서 칭기즈칸을 만난 이래로 그는 나에게도 줄곧 영웅의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소년기 그가 겪어야 했던 혹독한 시련은 어린 내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다. 항상 병치레로 골골했던 나는 들쥐를 먹으며 토굴에서 한겨울 혹한을 보낸 그를 생각하며 나 같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 경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몽골 변방 소수 유목민 출신인 그는 평생을 말 위에서 내리지 않으며 태평양과 동유럽을 잇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탄생시켰다. 1백 만 명으로 1억 명을 지배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348만㎢, 나폴레옹이 115만㎢, 히틀러가 219만㎢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했다면, 칭기즈칸은 이 셋을 모두 합친 것(682㎢)보다도 넓은 777만㎢에 달하는 광활한 대지를 자신의 말발굽 아래 두었다. 그의 대를 이은 후손들이 수백 년간 제국을 이어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면적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며 가장 많은 민족과 인종들이 직접 영향을 받았던 그런 나라가 건설되었다.

▲ 21세기 카우보이는 말 대신 오토바이를 타는가. 아브라가 발가스 가는 길에 만난 말들과 오토바이가 있는 풍경이 이채롭고 재미있다.(위 사진) 몽골인들에게 말은 생활의 필수품이자 최고의 교통수단, 어쩌면 가족과도 같은 존재이다. 칭기즈칸의 전사들이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데도 말(역참, 기마부대)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몽골 어린이들은 보통 두 살 무렵부터 말 타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갓난아기 때부터 부모가 델(Del ; 몽골 전통 외투)에 감싸 데리고 다니는 걸 감안하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말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런 몽골 속담이 있다. “말 없는 남자는 날개 없는 새나 다름없다.”

칭기즈칸은 ‘말(馬)과 행동이 일치하는 장군’이었으며, 동시에 ‘말(言)과 행동이 일치하는 리더’였다.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전쟁터에서는 병사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담요를 덮고, 이슬과 눈비를 함께 맞으며 생사고락을 나누었다.

한동안 나는 칭기즈칸에 매료되어 적지 않은 책을 읽었다. 꿈과 열정과 도전이 없었더라면 일개 양치기에 지나지 않았을 사람, 누구보다도 험난하고 처절한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으나 꿈과 열정과 도전을 무기 삼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며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사람…. 나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즐겨 칭기즈칸을 이야기하곤 했다. 국회의장 시절에는 몽골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칭기즈칸 패널과 함께 받는 영예도 누렸다.

그러나 나에게 몽골은 10여 년 전 공무로 잠깐 방문했을 뿐, 오랜 세월 동안 ‘미지의 대륙’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지난 8월 말 잠시 짬을 내어 몽골 땅을 밟았다. 가능하면 칭기즈칸의 유적지를 방문해 그의 숨결과 체취를 느끼고 전문 학자들과도 만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 내가 만난 학자들

역사 기행의 묘미는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 분야 전문가를 만나 궁금했던 것을 묻고 깊이 있는 해설을 듣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칭기즈칸을 연구하는 현지 학자들을 여럿 만나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몇 분 간단히 소개하면….

• 촐몬 ; 여성. 몽골과학원 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국립 울란바토르대학교 대외학술교류부학장.

• 폰삭 ; 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과 맞섰던 친동생 아릭-버케의 후손으로 중국 내몽골에서 몽골국으로 귀화. 중국어 능통.

• 소미야바타르 ; 울란바토르대학교 대학원장. 한국 이름 ‘서미달(徐美達)’을 명함에 병기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함. 한국어 능통.

• 체렌도르지 ; 국립 몽골대학교 부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 논문을 쓴 한국어에 능통한 소장파 학자.

몽골 학자들과는 두 차례에 걸쳐 미팅을 가졌다. 칭기즈칸을 키워드로 다채로운 질문과 답변, 토론이 오갔다. 의미 깊은 자리였다. 그러나 블로그에 세세히 올리기엔 너무 전문적인 내용이라서 생략한다.

한국의 대학에서 정년퇴임 이후 몽골에서 제2의 인생을 멋지게 펼쳐나가고 있는 최기호 울란바토르대학교 총장(문학박사)이 넓은 인맥을 활용해 이 분들과의 만남을 다리 놓아 주었다. 주 몽골 한국대사관 양혜숙 선임연구원도 해박한 역사 지식과 유창한 통역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두 분에게 그리고 몽골의 학자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칭기즈칸(중앙)을 비롯한 역대 칸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몽골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왼쪽부터 양혜숙 선임연구원, 촐몬 교수, 나, 최기호 총장, 폰삭 박사, 역사연구소 연구원. 왼쪽 두 여성과 오른쪽 남성은 모두 한국 사람(?), 아니면 모두 몽골 사람(?). 우리는 이렇게나 닮았다.

▲ 울란바토르대학교 접견실에서 세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눈 다음 내 책 『술탄과 황제』 그리고 『元朝秘史(몽골비사)』 등을 들고 찰칵. 왼쪽부터 양혜숙 선임연구원, 나, 소미야바타르 박사, 체렌도르지 박사.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너무나 칭기즈칸을 모르고 있었다. 4박5일의 답사만으로 칭기즈칸의 실체에 접근하기란 애초에 난망한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수많은 느낌표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물음표를 안고 돌아왔다. 아울러 한국이, 몽골이, 세계가 칭기즈칸에 대해 앞으로 파헤치고 연구해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여정이었다.

몽골에서의 나흘 낮 나흘 밤, 그 잔상이 아직도 머리와 가슴을 스친다. 하염없이 펼쳐진 초원,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던 아름다운 구름 그림자, 인간과 자연과 가축과 게르가 어우러진 목가적인 풍경, 폭우 속의 질주, 길을 헤매고 몇 번이나 진로를 바꾸면서 찾아간 칭기즈칸의 희미한 족적…. 비 갠 아침, 폐부 깊숙이 스며들던 싱그러운 풀 냄새와 향기로운 들꽃 내음은 세상 어디에서도 맡기 힘들 것 같다.

스마트폰에 담아온 사진들과 함께 나의 몽골 여정을 지역 별로, 시간 순으로 스케치하듯 가볍게 소개하려고 한다.

 

카라툰(검은 숲)

울란바토르 시에서 서쪽으로 40km,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다. 카라툰은 칭기즈칸이 혼인 예물로 받은 검은 담비 외투를 선물로 바치며 케레이트부 부족장 옹칸과 양아들·양아버지의 맹약을 맺은 검은 숲으로 칭기즈칸이 가을에 유목을 했던 곳이다. 칭기즈칸은 중부나 서부 지방으로 이동할 때 지금의 테렐지 국립공원에서 복드산의 남쪽을 돌아 현재 만주쉬르사원이 위치한 지역을 지나 카라툰을 경유했다. 이곳은 메르키트 부족에게 납치당한 아내 버르테를 구출하기 위해 옹칸에게 도움을 요청한 장소이기도 하다.

▲ 카라툰은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옹칸과 안다(의형제)를 맺은 곳이기도 하다. 수로의 흔적이 보인다.(왼쪽 사진) 나지막한 언덕에 세워진 삼각 뿔 모양의 나무틀엔 원색의 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오른쪽 사진. 칭기즈칸과는 관련 없음.) 무속 신앙이 발달한 몽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샤먼의 주된 두 역할은 영적 일탈로 인한 질병 치료, 그리고 죽은 이들의 영혼과 소통하는 것이다. 인간 세상과 영계의 중개자인 무속인들은 무아지경(가수 상태)에 빠진 채로 심령과 대화를 나눈다.

▲ 카라툰 유적지에 세워진 기념비. 케레이트 부족장 옹칸과 칭기즈칸이 양아버지와 양아들로 맹약을 맺은 곳임을 알리고 있다.

 

촌징 불독

촌징 불독은 칭기즈칸이 그 유명한 황금 채찍을 발견한 지역이다. 울란바토르 시에서 동쪽으로 55km,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에 있다. 이 언덕 꼭대기에는 높이 30m, 세계에서 가장 큰 칭기즈칸의 스테인리스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몽골 제국 건국 800주년을 기념해 민간 여행사(Jenko Tour)가 기획, 조성 중인 종합 관광단지의 중심부이다.

3층짜리 구조물로 지하에는 개인 소장품들로 꾸며진 청동기 및 흉노 시대 유물실(1관)과 몽골 제국 시대 유물실(2관)이 있다. 1층엔 만주 지배 시기의 대형 몽골 장화가 눈길을 끈다. 그밖에 예포 등이 전시돼 있다. 2층엔 레스토랑과 기념품 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통해 올라가게 돼 있는 3층은 전망대이다.

▲ 칭기즈칸 기마상은 아주 먼 곳에서도 금방 눈에 띌 만큼 초원 한복판에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위 사진)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이 장관이다. 1층에 전시돼 있는 대형 몽골 장화(부츠)는 길이가 6m, 높이가 9m라는데 가이드 말로는 120여 마리의 소가죽이 동원됐단다.(왼쪽 사진) 사방이 탁 트인 전망대에 서면 칭기즈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다.(오른쪽 사진) 조심하시라. 바람이 어찌나 거세게 부는지 자칫하면 모자나 안경을 단숨에 빼앗길 수도 있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탁 트인 전경. 해마다 7월 중순(11일~13일)이면 이 드넓은 초원은 사람과 말과 게르(텐트형 몽골 전통 가옥)로 가득 찬다. 몽골 국민 누구나가 손꼽아 기다리는 ‘나담 축제’가 열리기 때문. 말 타기와 활쏘기 그리고 씨름(남성 3종 경기)이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이다. 어느 날 아침 비 온 뒤 돋아난 버섯처럼 초원을 덮었던 게르들은 축제가 끝난 다음 날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한다.

 

허흐노르(검은 심장의 푸른 호수)

허흐노르는 칭기즈칸이 테무친이란 이름으로 고난의 유소년기를 보낸 지역이다. 울란바토르 시에서 동쪽으로 142km 거리, 자동차로 5시간이 걸리는 험난한 코스이다. 이곳은 테무친이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처음 ‘칸’으로 추대 받은 장소로서 ‘검은 심장의 푸른 호수’라고 불린다.

1189년 테무친은 허더아랄 북쪽에 위치한 허흐노르 호반에서 알탄, 코치르, 세체-베키에 의해 칭기즈칸으로 추대되어 키야트계 연합 정권을 창출했다. 허흐노르는 테무친이 숙명적 라이벌이었던 자무카와 서로의 피를 마시며 안다(의형제)를 맺었다가 결별한 ‘배신의 땅’이기도 하다. ‘태어난 곳은 달라도 묻히는 곳은 같기’를 맹세했던 두 사람은 그러나 동지에서 적으로 운명을 달리 한다. 칭기즈칸이 마셨던 ‘검은 심장의 샘물’도 푸른 호수 옆에 현존한다.

▲ 아브라가 발가스로 가던 도중 비가 그친 뒤 초원 위로 무지개가 아름답게 곡선을 그리며 떠올랐다. 솔롱고스(몽골인들은 한국을 ‘무지개 뜨는 나라’란 뜻을 지닌 ‘솔롱고스’라고 부른다)에서 온 여행자를 환영이라도 하듯이. 마침 쌍무지개도 떴는데 내 카메라로 담지 못해 아쉽다. 눈과 가슴엔 선하게 남아 있다.

▲ 몽골의 전통 문자인 설형 문자로 기록된 칭기즈칸 탄생 840주년 기념비. 칭기즈칸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를 몽골의 대칸 36인을 목각한 호위 장승들이 둘러싸고 있다. 호수 바로 앞에 조성되었다.

▲ 칭기즈칸이 역경을 딛고 일어선 야망의 땅이자 서약의 호수인 허흐노르. 검푸른 빛깔의 심장 모양 호수가 산과 강이 어우러진 고원 한가운데에 누워 있다.

 

아브라가 발가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여는 자 흥한다."

아브라가 발가스는 정착을 모르고 살아온 칭기즈칸이 세운 대몽골국 최초의 수도가 있던 곳이다. 울란바토르 시에서 동쪽으로 200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자동차로 5시간 남짓 걸린다.

아브라가 발가스 캠프에서 하룻밤 여장을 풀었다. 식탁이 채 차려지기도 전 예고도 없이 정전이 됐고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렸다. 저녁에 떴던 보름달은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사방이 암흑천지였다. 랜턴 불빛과 촛불 아래서 동행했던 윤복룡 PD의 생일 축하 파티를 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창밖을 보니 별들이 몇 개 떠 있었는데, 역시나,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와 보니 거짓말같이 비가 그쳐 있었다. 동쪽에서는 이제 막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보름달이 지고 있었다. 달의 빛깔이 붉어 두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향긋하고 싱그러운 풀 내음이 코로 스며들어 온몸으로 번졌다. 내 평생 처음 맡아보는 강렬한 냄새였다. 페인트 알레르기가 있어 코를 찌르는 냄새에 신경 쓰였는데 오히려 그런 과민 반응이 치유될 것만 같다. 맡을수록 콧속이 맑아지고, 머리와 가슴까지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영상 40도와 영하 40도, 그러니까 80도의 온도 차이를 견뎌내고 자라는 이 풀들을 뜯어 먹는 가축들의 고기는 또 얼마나 신선하고 친환경적일까. 취사와 보온을 할 때 연료로 쓰는 초식 동물의 말린 똥, 그 연기에서도 상큼한 냄새가 맡아질 것 같았다. 칭기즈칸이 수도에 머물지 않고 평생 말을 타고 야전을 누빈 것도 이 초원의 향기가 좋아서였을 것이다. 현대의 몽골인들이 유목 생활을 접고 울란바토르에 둥지를 틀었다가 상당수는 향수병이 도져 다시 초원으로 돌아간다는 게 공감이 되었다.

▲ 초저녁엔 구름 사이로 떠오른 보름달을 볼 수 있었다.(위 사진) 그러나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면서 정전이 되는 바람에 랜턴과 촛불 조명 아래서 동행한 윤복룡 PD(몽골인 부인 엥흐치멕과 몽골 최대 민영방송사인 UBS에 근무)의 생일 파티를 했다.(왼쪽 사진) 통나무로 지은 아브라가 발가스 캠프는 화장실과 세면실이 외부에 따로 있는 것 말고는 하룻밤 묵기에 별다른 불편함이 없었다.(오른쪽 사진) 간밤에 비가 그쳐 하늘이 더없이 맑은 아침이다.

▲ 철분이 많이 함유된 생수가 나온다는 곳이지만 아쉽게도 관리인이 안 보이고 문도 자물쇠로 잠겨 있어 물맛은 보지 못했다. 여름철에는 휴양과 치료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한다.

▲ 아브라가 발가스 캠프 옆에 있는 호숫가에서. 이른 아침인데도 산책하는 여행객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야영객들이 친 텐트들도 호수 주변에 띄엄띄엄 보였다. 오늘이 캠프 문을 닫는 날이라고 한다. 아침 공기가 싸늘했다.

 

허더아랄

<몽골비사> 탄생지. 울란바토르 시에서 동쪽으로 200km 지점, 자동차로 5시간 남짓 거리에 있다. 헤를렌-바얀-올란 산맥의 남단 지역이다.

<몽골비사>는 몽골의 기원부터 칭기즈칸과 2대 어거데이칸에 이르는 역사를 웅대한 서사시적 형태로 농축해 담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지배한 몽골 유목 민족이 자신들의 손으로 완성한 유일한 사료이다.

1206년 대쿠릴타(국가의 중요 의사를 결정짓는 부족장 연합회의)를 연 칭기즈칸은 아브라가 발가스를 대몽골국 최초의 수도로 정했다. 그리고는 쥐띠 해 고라니 달(7월 비의 달)에 허더아랄의 덜렁벌덕 산(일곱 개의 작은 봉우리)과 실긴척(세 개의 여자 젖가슴), 두 지역 사이에 ‘오르도’(칸의 궁전)를 세우고 <몽골비사>를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드넓은 평야에 헤를렌 강과 쳉헤르 강이 흐르고 있어 유목 민족이 수도로 삼기에 적합한 곳이다. 중요한 유적지임에도 안내 표지판 하나 없어 찾느라 애를 먹었다.

발굴한 유물들로 채워진 흉노 박물관이 근처에 있다.

  

 ▲ 흉노 박물관은 유물 유적 발굴 현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때마침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젊은 교수를 만나 디테일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내 맞은편 빨간띠 모자를 쓴 사람은 유적 답사에 동행했던 최기호 울란바토르대학교 총장.

▲ <몽골비사> 완간 750주년을 맞아 1990년 허더아랄의 유적지 앞에 세워진 기념비. 폭 1m, 높이 3m. 몽골‧위구르 문자로 기록돼 있으며 칭기즈칸의 부조와 함께 각 씨족과 부족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 아브라가 발가스 언덕에 세워진 오보(우리로 치면 ‘성황당’ 격). 푸른색 천(하닥, 하늘을 상징)이 빨래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술이나 차를 마실 때 몽골 사람들은 액체를 넷째 손가락으로 찍어 세 번씩 튕기며 하늘의 신(텡헤르)에게 경의를 표한다. 음료에 독을 타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에 은반지를 끼고 하던 전통 풍습이다. 손짓을 할 때마다 이런 주문을 왼다. “텡헤르(하늘)! 켕게르(나)! 가자르(땅)!”

 

보르기에르기(피눈물 어린 물안개 피는 언덕)

‘피눈물 어린 물안개 피는 언덕’이란 별칭이 이 지역에 숨은 사연을 이야기해 준다. 메르키트 부족이 예수게이(칭기즈칸의 아버지)가 허엘룬을 약탈한 보복으로 칭기즈칸의 부인 버르테를 납치해 간 곳이다. 강이 흐르고 절벽이 가로막아 외부에서의 접근이 힘들고 나무숲에 몸을 숨기기 좋은 천혜의 요지이다. 울란바토르 시에서 동쪽으로 100km 지점, 자동차로 3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 피눈물 어린 물안개 피는 언덕, 보르기에르기. 흰 구름이 강물에 비쳐 마치 물안개가 핀 듯이 보인다.

▲ 깎아지른 절벽이 방패 역할을 하는 보르기 에르기. 아내 버르테를 빼앗긴 테무친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테무친은 기습 공격으로 메르키트 진영을 초토화시키고 아내를 구출했지만 그녀는 만삭의 몸이었고 곧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핏줄에 대해서는 모두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윽고 테무친은 신생아에게 ‘조치’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손님’이란 뜻. 테무친의 번민과 고통과 허전함과 기쁨이 복합적으로 배어 있는 이름이다.

 

테렐지 국립공원

울란바토르에서 북동쪽으로 약 75km 지점에 있는 테렐지 국립공원은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몽골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승마·산악자전거·암벽 등반·하이킹·래프팅 등 다양한 레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곳곳에 호텔과 게르 캠프장이 흩어져 있다.

큰 산들이 병풍처럼 우뚝우뚝 솟아 있는 이곳은 과거 동남쪽에서 오는 적군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때문에 몽골은 이곳에 주력군을 상시 배치했고, 지형을 잘 아는 영리한 적은 울란바토르 분지를 피해 만주쉬르사원 쪽으로 우회, 카라코룸을 공격하는 전술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 테렐지 국립공원은 ‘몽골 속의 이국’ 같은 풍경이다. 중생대의 화강암 지대 위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절벽이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 테렐지 국립공원에서 야크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고산 동물인 야크는 젖·고기·털·가죽·배설물(연료) 등을 제공하며, 짐을 나르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몇 컷 더…

▲ 17층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 ‘모네’에서 내려다본 울란바토르 시내 전경.고층 빌딩 너머로 산자락에 게딱지처럼 늘어선 게르들이 보인다. 도시와 시골이 혼재된 모습이다. 몽골은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예외다. 130만 인구가 서울의 강남 3구를 합한 크기 정도의 면적 안에 밀집해 살고 있다.

▲ 임시 전시장에서 만난 공룡 화석. 약 7천만 년 전 몽골 고비 사막에 살았던 육식 공룡 ‘타르보사우루스 바타르’이다. 키 2.4m, 몸길이 7.3m. 밀반출된 이후 영국과 미국 등지를 떠돌다 몽골 정부의 강력한 반환 요청으로 67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몽골 정부는 현재 화석 발굴과 연구를 위해 공룡 박물관을 짓고 있다.

▲ 비가 내리자 초원은 돌변했다. 순식간에 길이 지워지고, 시냇물은 강물로 변해 진로를 가로막았다.(위 사진) 내 스마트폰에 담긴 초원 풍경은 그대로가 ‘비오는 날의 수채화(파스텔화)’이다.(왼쪽 사진) 애마 역할을 해준 랜드크루저도 빗줄기에 가려 번호판이 지워졌다.(오른쪽 사진)

▲ 시선을 달리 하면 소나기가 퍼붓는 먹장구름 하늘, 햇살이 맑은 파란 하늘 무지개가 영롱하게 뜬 하늘을 한 곳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몽골 초원이다.

▲ 초원에는 갯벌에 난 게 구멍처럼 곳곳에 들쥐 구멍이 나 있었다. 들쥐들은 풀밭을 뛰어다니다가 사람 발소리가 들리면 잽싸게 구멍 속으로 몸을 숨겼다. 테무친에게는 이 들쥐들을 잡아먹으며 연명하던 시절이 있었다.

▲ 허흐노르로 가던 길에 만난 에델바이스.(왼쪽 사진) 별 모양 벨벳을 연상케 하는 이 야생화의 꽃말은 ‘소중한 추억’이다. 몽골 초원 곳곳에는 각양각색 들꽃들이 만발해 있었다.(오른쪽 사진)

▲ 초원에선 ‘할가이’란 이름의 이 독초를 조심해야 한다. 살갗에 닿으면 벌에 쏘인 듯 따끔따끔하다. 작은 가시가 옷 속을 뚫고 들어오므로 바지를 입었더라도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 독초가 혀에 닿는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낙타는 즐겨 먹는 풀이다. 소와 말과 양들도 조금씩 섭취한다는 걸 보면 독성은 없는 모양이다. 몽골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할가이에 쏘이면 즉시 그 부위에 소변을 발라 소독을 시킨다고 한다.

▲ 보르기에르기에서 야영하던 청년들이 요리한 몽골 전통 음식 ‘허르헉’. 친절하게도 접시에 담아 나누어 주었는데 별미였다. 허르헉은 양고기를 달구어진 돌과 함께 솥에 넣은 다음 물(보드카를 약간 첨가하기도 함)을 붓고 안팎으로 열을 가해 조리한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가 약하고 담백해 우리 입맛에도 무난하다. 함께 쪄낸 감자 맛도 각별했다. 찜통에서 꺼낸 돌은 혈액 순환 등 건강에 좋다 하여 손가락으로 돌려가며 만지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 양과 염소들이 비 그친 초원에서 물을 마시거나 풀을 뜯고 있다. 양과 염소는 성품이 하도 겸손하여 평생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없이 묵묵히 땅만 보며 살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죽일 때는 등을 땅에 대고 눕혀 하늘 구경 한 번 시켜 주는 것이 몽골의 오랜 도살 풍습이란다.

▲ 고원 지대여서일까? 하늘이 한층 낮게 내려앉아 눈길을 멀리 던지면 마치 초원과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드넓은 ‘스카이 캔버스’ 위에 구름이 시시각각 형태를 달리하며 멋진 그림을 펼쳐 보인다. 대지에는 구름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합종연횡,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이 구름 무리들을 보면서 칭기즈칸은 거대한 제국의 미래를 구상했으리라.

 

광대한 하늘과 드넓은 초원, 끝없는 초평선 앞에 서니 어느 순간 문득 그런 깨달음이 왔다. 나는 결국 아주 작은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저절로 마음의 옷깃이 여며졌다.

“흙과 / 작은 풀꽃들과 / 흘러가는 바람과 구름더미 / 한 번씩 콧김 푸르르 내뱉는 말떼 / 그밖에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 / 무연히 흘러가는 대초원 / 푸른 하늘 끝자락과 아득히 맞닿은 그 아래로 / 가물가물 보이는 천막집 / 물끄러미 먼 곳을 바라보는 어린아이 / 그 아이 등 뒤로 뉘엿뉘엿 / 해가 떨어지는 / 지평선.”

=이동순 시인의 몽골 기행 시집 <발견의 기쁨> 중 ‘풍경화’ 전문)

마지막으로 아브라가 발가스로의 1박2일 여정에 몽골인 부인 엥흐치멕과 함께 동행했던 몽골 최대의 민간방송 UBS 윤복룡 PD가 찍은 동영상을 올린다. 클릭하면 잠시 동안 몽골 초원을 드라이브하는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