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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5 한겨레신문 특별기고] 소 잔등의 '등에'같은 사람을 보내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 시인의 ‘낙화’에서)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보궐선거 다음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며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였다. ‘저녁이 있는 삶’으로 돌아갔다. 신선한 충격이고 감동이지만 왠지 허전하다.

14대 국회 때다. 총선 이듬해(1993년) 치러진 보궐선거로 국회에 들어온 그는 신언서판을 갖춘 에이스였다. 어느 날 같은 당 초선 의원인 나를 찾아와 자문한 적도 있었다. 나는 동갑이지만 국회 ‘1년 선배’였다. 그는 언제나 진지했고 가식이 없었다. 장관과 지사를 지냈고, 언론인이 보는 대통령감으로 선두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도 안타까운 건 2007년 한나라당 탈당이다. 그때는 타이밍이 안 좋았다. 조금 일찍 혹은 더 늦게 나갔더라면, 아니 그대로 당에 남았더라면, 그 이후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탈당은 그의 정치인생에서 평생 짊어져야 할 멍에가 됐다.

두번의 대선후보 기회도 마지막 고비를 못 넘겼다. 18대 국회 진입에도 실패했다. 당적을 옮긴 게 죄였다. 그는 국민 속으로 걸어들어가 ‘100일 민심 대장정’에 나섰다. 수해 복구에 팔을 걷어붙였고, 탄광에서 석탄가루를 뒤집어썼다. 한동안 춘천에서 토종닭을 기르며 성찰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일각에선 ‘정치쇼’라 폄하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쇼라도 좋으니 직접 민심을 듣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정치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초선 때 국리민복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의원들이 책임있는 자리에 오를수록 진영논리에 빠져 초심을 버리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손학규는 예외였다. 그는 그 첫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 시간 내어 밑바닥을 찾았을 것이다.

그의 정치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곡절이 많았다. ‘재보선의 사나이’답게 그는 이번에도 또 한번 사지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죽었다. 금배지 1년여 더 달자고 그런 모험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이번 공천 과정을 보면 집권하려는 의지가 없는 정당이었다. 교만과 독선의 포로가 되어 자기 진영 안에 갇혀버렸다. 국민을 가장 많이 말하지만 진영 밖의 사람은 국민이 아니었다. 이런 야당을 상대하는 여당은 국회 안에선 괴로워도 선거는 쉽다. 야당으로부터 소외된 국민에게 손만 내밀면 표가 오기 때문이다. 국민은 ‘세월호 심판’에 앞서 ‘야당 심판’을 했고, 빈사상태인 당을 살리려 그가 몸을 던졌다. 선당후사를 직접 실천했다. “국민 눈높이에서 새누리당과 선의의 경쟁을 하는 민주개혁 정당으로 반드시 부활해야 한다.” 그가 야당에 던진 통렬한 메시지다. ‘보수(補修)하지 않는 보수(保守)’, ‘진부한 진보’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시대가 오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를 ‘덩치가 크고 혈통은 좋지만 굼뜬 소’에 비유했다. 자신은 소 잔등에 붙어 계속 자극을 주며 잠 못 자게 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등에’로 빗대어 말했다. 야당에, 우리 정치계에 손학규는 그런 ‘등에’ 같은 존재였다. 늘 깨어 있으면서 다른 이들의 눈까지 뜨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찍은 마침표는 여야 정치인들 가슴에 강렬한 느낌표로 던져졌다.

유대교 경전에 승리에 들뜨지 않고 절망에 주저앉지 않도록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잠언이 있다. 정치는 생물이다. 뼈를 깎는 새 정치로 분골쇄신한다면 20개월 뒤 국민은 누구 손을 들어줄지 알 수 없다. 언젠가 우리 사회가 그를 필요로 해서 저녁식사 같이 하자고 초대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김형오 부산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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