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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6 한국경제] "정당 해체 수준의 충격요법 없으면 정치개혁 불가능"

당신은 한국의 미래가 두렵지 않습니까
원로에게 듣는다 - 김형오 前 국회의장

내 얼굴에 침뱉는 말이지만 정치가 신뢰를 잃은 건 '책임 의식' 사라진 탓
보스에게만 잘 보이면 공천·미래 보장받으니 당론 한 마디면 소신 '팽'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정당을 해체하는 수준의 혁신 없이는 정치개혁은 불가능합니다.”

5선 의원 출신으로 입법부 수장을 지낸 김형오 전 국회의장(67). 정계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어서일까. 그는 뜻밖에도 ‘정당 해체’라는 화두를 꺼냈다. 여의도 정치로 상징되는 대의민주주의가 그만큼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이유에서다. 충격요법 없이는 개혁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설명이었다. 김 전 의장은 “어설픈 양당제의 진영논리가 초래한 대의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 정치는 영원히 나라 발전의 발목이나 잡는 주범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정치개혁의 요체는 바로 정당을 해체하는 수준의 정당개혁”이라고 강조하는 그에게서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들었다. 김 전 의장은 2011년 국회의장을 끝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지금은 서울 마포 개인사무실에서 책 집필에 몰두하면서 1주일에 한 번씩 대학 강단에 서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 국가경쟁력 보고서를 보면 한국은 ‘정치에 대한 공공의 신뢰’ 항목에서 매년 최하위입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노출됐지만, 우리 사회의 리더십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봐요. 통합의 리더십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 거꾸로 분열의 리더십, 갈등 조장의 리더십, 선동에 편승하는 리더십이 돼버린 거죠.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리더십 붕괴로 인해 국민이 정치 실망감을 넘어 절망감까지 느끼게 된 것 아닌가 합니다.”

여의도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공자는 논어에서 병(兵)·식(食)·신(信) 세 가지 중에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면 병·식·신의 순서로 버리라고 했습니다. 가장 마지막까지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게 신뢰 아니겠습니까. 여의도 정치를 얘기할 때마다 내 얼굴에 침 뱉는 것 같아서 자괴감이 들지만, 우리 정치가 신뢰를 잃은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책임의식의 결여입니다.”

정치인의 책임의식 부족은 어디서 비롯됐습니까.

“크게는 여야 간 진영논리에 갇힌 것에서 비롯됐다고 봐요. 나를 보호해줄 사람은 나의 정당, 정당의 보스, 내 계파의 수장이라는 낡은 사고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이죠. 말로는 국민을 얘기하면서, 실질적으론 국민을 팔아서 자기 진영의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에 스스로 침몰하는 것입니다.보스에게만 잘 보이면 공천을 보장받고, 미래를 보장받기 때문에 적당히 국민으로 포장하고 넘어가는 식으로 처음부터 트레이닝을 받은 거죠.”

1987년 ‘직선제’ 개헌으로 민주화가 됐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국회의 과잉입법이 대표적인 사례인데요.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비효율이라는 비용 지출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국회가 유독 과다한 비용낭비를 초래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권익 옹호나 이익 유지 수단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집단이 많은 데도 원인이 있습니다. 일부 시민단체와 노동단체도 이런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요즘 ‘셀프 정치개혁’이 화두입니다.

“정치개혁은 출판기념회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체는 정당개혁에 있습니다. 그것이 정치개혁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모든 정당의 대표 후보들이 전당대회에 나와 정치개혁을 부르짖지만, 진정으로 개혁하고자 한다면 ‘우리 당을 없애겠다’는 사람부터 나와야 합니다.”

정당 시스템에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국회의원의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당론을 결정할 때 의총을 엽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이죠. 당 대표 등 소수가 밀실에서 정하면 당론이 되고 맙니다. 두 번째는 정당 공천권 문제입니다. 당 대표 등 실세들이 공천권을 장악하기 때문에 의원들은 눈치 볼 수밖에 없는데요. 의정활동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당 ‘저격수’로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섰는지와 얼마나 충성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정당 개혁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20년 전 초선의원 때 미국의 정당구조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당 대표는 물론 총재, 부총재, 최고위원, 사무총장 같은 직책이 없습니다. 모든 걸 원내대표 한 사람이 다 하는 구조인데, 쉽게 말해 빌딩으로 치면 골조만 있는 구조입니다. 투명하고 단순한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밀실 정치, 소수가 독점하는 정치가 설 자리가 없는 것이죠. 미국의 양당제 역시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지난 200년 이상 건재해왔는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의 정당 구조를 해체하는 수준으로 혁파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여의도 국회가 결코 제대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포퓰리즘이 문제인데요. 정치에서 포퓰리즘은 숙명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포퓰리즘은 선거 때 기승을 부리는데, 선거가 너무 자주 있어요. 선거 한 번 할 때마다 선거 비용보다 더 많은 사회적·경제적 간접비용이 지출됩니다. 무상 시리즈처럼 현혹하는 공약이 넘치는 탓에 선거 한 번 할 때마다 건전한 노동 의욕이 상실되고요. 그러다 보니 선거 후에 정치인에 대한 불신만 가중되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죠.”

개헌 논의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 개헌 논의는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 구조를 분산하자는 차원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권력을 나누면 어디로 갈까요. 국회로 갑니다. 국회의원 대다수가 개헌에 찬성하는 이유 중 하나도 국회의 권한 확장 때문입니다. 우리 국회의 가장 큰 문제가 책임의식 부재인데, 국민이 과연 이런 국회의 권한이 커지는 걸 원할까요.”

정치실패에는 통치자의 책임도 크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내년에는 선거도 없어 국정 성과를 낼 마지막 기회인데, 벌써부터 청와대 비선라인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해법은 간단합니다. 대통령이 정상적인 절차로 국정을 운영하면 됩니다. 계통과 시스템을 이용하고, 장관과 집권당 파트너를 잘 활용하면 됩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대통령은 최고 통치자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관리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국가의 ‘오너’인 국민의 대리인으로서 5년 동안 행정을 관리하는 최고경영자(CEO)라는 생각으로 국정에 임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정종태/도병욱 기자 jtchung@hankyung.com


진영논리에 갇힌 정당, 지지율 떨어지면 '쇄신 선언'


3~4년에 한 번씩 '간판'만 바꿔



한국 정당 역사는 70년이 채 안 된다. 200~300년의 의회 역사를 가진 미국이나 영국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하지만 짧은 역사에도 한국의 정당은 어지러울 정도로 간판을 자주 교체해왔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20년간 현역 국회의원을 하면서 한 번도 정당을 옮긴 적이 없는데, 정당 스스로 네 번이나 간판을 바꿔 달더라”고 했다. 현 새누리당은 1963년 민주공화당을 모태로 민주정의당(1981년)→민주자유당(1990년)→신한국당(1995년)→한나라당(1997년)→새누리당(2012년)으로 문패를 다섯 번 교체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1945년 한국민주당에서 시작해 69년간 무려 19차례나 이름을 바꿨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200년 가까이 지금의 당명을 유지 하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중국집 짜장면이 맛없다고 간판을 교체하면 손님이 들어가겠느냐”며 “본질은 주방장을 바꾸고 레시피를 바꿔야 하는데, 아직도 우리 정치는 간판만 바꾸면 되는 줄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200년 가까이 지금의 당명을 유지 하고 있다. 김 전 의장은 “중국집 짜장면이 맛없다고 간판을 교체하면 손님이 들어가겠느냐”며 “본질은 주방장을 바꾸고 레시피를 바꿔야 하는데, 아직도 우리 정치는 간판만 바꾸면 되는 줄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


■ 김형오 前 국회의장 약력


△1947년 경남 고성 출생 △경남고 졸업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통령 비서실 (1982-1992년) △14~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원내대표(2006년) △국회의장(2008-2010년) △부산대 석좌교수(현)


■ 특별취재팀=하영춘 금융부장, 차병석 IT과학부장, 정종태 정치부 차장, 박수진 산업부 차장, 안재석 IT과학부 차장, 이태명 산업부 기자, 임원기 경제부 기자


[2014-12-16 한국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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