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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과 황제

7. 코라 교회(카리예 박물관)에서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72쪽 참고

코라 교회(카리예 박물관)에서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다

-‘호데게트리아에 관한 단상 혹은 명상-


Chora Church(Kariye Müzesi : Kariye Museum)



지금은 카리예 박물관(Kariye Museum, KARİYE MÜZESİ)으로 변신해 관람객들을 맞고 있는 코라 교회는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이 교회에 나는 몇 가지 개인적 사연이 있다. 그 사연에 앞서 코라 교회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내 책(『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72, 218, 316, 335, 471, 484쪽 참고, 구간 55~56)에도 간단히 언급했듯이, 코라 교회는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그림과 프레스코 그림이 가장 많이 남아 있어 역사적 의미에 종교문화 예술적 가치를 더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네 차례 방문하는 동안 한국인 관광객은 유감스럽게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코라 교회는 비잔틴 제국이 멸망으로 치닫던 14534월과 5, 비잔틴군(수비군)의 휴식처요 위안처였다. 성벽과 가까웠고, 여기에 유명한 호데게트리아 성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인도하는 성모란 뜻을 지닌 호데게트리아는 <사도행전><누가복음>의 저자인 성 누가(St. Luke)가 처음 그렸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완성하고 성모 마리아에게 헌상하면서 이 그림을 함께 바쳤다. 성모 마리아의 오른손이 왼손에 안긴 아기 예수를 가리키는 그림이다. 성모는 이 그림과 함께 언제나 나의 축복이 있으리라고 성화에 헌사를 내렸다. 의사 출신으로 눈썰미가 남다르고 손재주가 뛰어났던 누가의 그림은 매우 사실적이었다. 성모가 오른손으로 예수를 가리키는 이 그림에서 은 곧 예수를 의미한다. ‘호데게트리아(길을 인도하는 성모)’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 그림은 5세기 무렵 비잔틴 제국으로 유입되었다.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이며 기독교 문명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비잔틴 황제는 황궁 옆에 호데게트리아 교회를 지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과 문무백관은 물론 제국 곳곳의 유력 인사들이 이 교회를 찾았다. 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이 그림을 보러 오는 순례객들이 줄을 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비잔틴 제국은 세계를 호령하던 위치에서 신흥 강국들의 먹잇감,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주변국들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 세계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시시때때로 수도를 직접 공격했다. 북으로는 러시아에서부터 남으로는 아랍 제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와 세력들이 그리스로마 문명의 중심이자 기독교 국가의 심장인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다. 제국과 수도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고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주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한때 100만 인구를 자랑하던 세계 최대의 도시는 그 1/10로 줄어들었다. 황실의 권위는 날로 상실되고, 곳간도 빠르게 비어갔다.

믿고 의지할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황제들이 원군 요청을 위해 여러 차례 기독교 국가들을 직접 순방했지만 매번 빈손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도 형편이 나을 리 없었다. 서로마와의 동서 교회 통합 문제가 수십 년간 논의됐으나 비잔틴 교회와 주민들은 로마 추기경의 모자를 쓰느니 차라리 술탄의 터번을 쓰겠다며 완강히 반대했다.

 

그 이면에는 뼈아픈 추억이 있다. 4차 십자군 전쟁이다. 베네치아가 중심이 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애초 목적과는 상관없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여기에 라틴 왕국(1204~1261)을 세웠다. 콘스탄티노플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부녀자들은 폭행과 강간으로 짓밟혔다. 온갖 보석과 보물을 약탈당했다.

세계 최대 교회였던 하기아 소피아(‘성스러운 지혜의 교회’, 지금의 아야소피아 박물관)는 십자군에게 무지막지하게 유린되었다. 금으로 된 모든 성물성화장식품은 통째로 싹쓸이해 버렸다. 보석 박힌 황금 십자가, 대주교의 금실 모자, 금테를 두른 성경 등등이 약탈되었다. 은접시은촛대 등 은제품 또한 남아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금으로 세공된 모자이크까지 일부 뜯어내었다.

지성소연단의자 등 금이나 보석이 박힌 곳은 죄다 부서지고 난도질당했다.

비잔틴 황제가 새로 왕조(팔라이올로구스)를 세워 콘스탄티노플로 복귀하는 데는 60년이 걸렸다. 1000년을 지켜온 기독교 제국의 수도라는 자부심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찢겨졌다. 같은 기독교인에 의해 저질러진 흉포한 만행에 비잔틴 사람들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런 만큼 이미 그 치욕의 60년을 200년 동안 새기고 새겨온 비잔틴 신민들에게 교회만 통합하면 식량도 원조하고 군대도 파견하여 기도교국을 지키겠다는 로마 교황청과 서유럽 기독교 국가의 제의는 사탕발림으로만 들렸다. 서로마 교회와 교황청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콘스탄티노플을 휩쓸었다. 교황의 모자뿐만 아니라 교황청 십자가(, 그리스 십자가는 )만 보아도, 십자가에 다리 꼬고 못 박힌 예수상*만 보아도 그들은 경외심은커녕 분노가 치솟았다.

조국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내키지 않지만 교회 통합을 결심한 황제(콘스탄티누스 11)는 반대파 사제들로부터 격렬한 비난과 매도를 당한다. 존엄도 권위도 짓밟힌 채 계급장 떼고대드는 사제들을 야속해 하면서 힘없는 황제는 속만 썩어간다.

1000년 세월 가까이 사랑 받아오던 하기아 소피아도 교회 통합을 선언한 장소였다는 로 시민들의 발길이 끊겼다. 소속 사제와 수도사들도 1/3로 줄어들었다. 다른 교회로 옮겨 간 까닭이다.

  

* 예수가 한 쪽 다리를 살짝 들어 다른 쪽 다리에 포갠 채 처형당하는 모습이 로마 카톨릭의 보편적   

  십자가상이었다.


서론이 길었다.

145342, 튀르크가 왔다. 10만 대군이 성벽을 에워쌌다.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아버지(무라드 2) 때와는 달리 엄청난 대포와 함께 왔다. 같은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 출신 기술자 우르반이 만든 바실리카 대포가 한 방 터지면 지축을 울리는 굉음에 모든 도성 시민이 집 밖으로 뛰쳐나와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성벽을 겨냥해 쏜 초대형 대포는 성 안 주민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하루에 세 번밖에 발사를 못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화약 장착과 발사에도 시간이 걸리지만, 발포 후 과열된 포신을 식히고 안정시키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바실리카 왕()

대포는 제풀에 부서지고 만다. 만약 이 왕대포가 계속 작렬했다면 성벽이 오래 지탱하지 못해 전쟁을 54일간 끌지도 않았을 것이다.

병사들은 테오도시우스 대제 때 축성되고(421), 442년 콘스탄티누스의 지휘 아래 재건된 3중 성벽을 철석같이 믿었다. 난공불락 철옹성이 없었더라면 그 수많은 외침을 어떻게 막아내고 견디었겠는가.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성벽만이 보호막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지쳐갔다. 수비군은 10만 공격군(오스만 튀르크 )에 비해 숫자도 턱없이 부족한데다가(7000명 안팎) 물자도 모자라고 용병의 경우 봉급조차 제때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지휘관(주스티니아니)을 잘 둔 덕에 포격으로 부서지고 갈라진 성벽만큼은 재빠르고 철저하게 보수했다.

수비군은 휴식 시간이나 교대 시간을 이용해 성벽 근처에 있는 코라 교회의 호데게트리아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성모 마리아여, 예수께 간언 드려 저희를 사는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호데게트리아에게서 위안을 얻은 병사는 밀려오는 공격군과 맞서기 위해 다시 성벽에 올랐다.

코라 교회는 성벽 수비대만 찾은 것이 아니다. 황제를 비롯하여 비잔틴 관료와 병사 모두가 다녀갔다.

 

코라 교회는 서두에서 말했듯이 그리스어로 시골’ ‘교외를 뜻한다. 아마도 본래 성벽인 콘스탄티누스 성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 교회는 새로이 확장된 테오도시우스 2(재위 408~450) 성벽 바로 안쪽에 위치해 있는 걸로 보아 성벽이 만들어진 413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세기 때 벽돌 일부가 가장 오래 된 유물이고 9세기 때 벽돌도 있어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코라(χώρα)’라는 명문(銘文)은 성당 내부 그림 옆에 두 군데나 있다. 이 경우에는 코라살아 있는또는 무한한 ; 닿을 수 없는이란 뜻으로 해석된다.(*2편에서 다시 설명)

아무튼 기반을 파보기 전에는 설립 연대 측정이 어려울 것 같다.

 

비잔틴 신민들의 사랑을 받던 코라 교회 안의 호데게트리아는 가끔 나들이를 했다. 1453525, 그 절박한 순간에도 비잔틴 사람들은 길을 인도하는 성모를 앞세우고 도시 곳곳을 성모께서 인도하는 대로움직이는 행사를 했다. 각각 호데게트리아와 십자가를 든 사람이 맨 앞에 서고, 그 다음에 향로를 든 사제장, 남녀 평신도, 맨발의 아이들이 뒤를 이었다. 사제의 선창을 따라 하며 수많은 도성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었다. 사전에 정해진 길은 없었다. 그저 호데게트리아 성모상이 인도하는 대로 발길을 옮겼다. “도시를 구하소서. 생명을 살리소서. 성모여, 전구하소서.”

행렬이 도심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성화가 땅에 떨어졌다. 모두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호데게트리아를 들었던 사람이 너무나 놀란 탓일까. 그는 떨어뜨린 성화를 바로 들지 못했다. 두어 사람이 힘을 보탰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돌 틈에 성화 틀이 낀 걸까? 주위 모든 사람들이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는 사이에 여럿이 합세해서 겨우 들어 올렸다고 한다.

흉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시 행진을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천둥벼락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거리는 금세 물바다가 되었다. 5월 하늘에선 좀처럼 드문 현상이었다. 행렬은 중단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성모 마리아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너무나 작위적인 것 같아 오로지 팩트만을 추구하기로 한 나는 내 책에서 다루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 예화와 비슷한 날짜인 5월 하순 어느 날, 이스탄불 원로 교수와 인터뷰하면서 돌연 뇌성벽력을 동반한 폭우를 경험하고 난 뒤로 생각이 달라졌다. 그날 내 하숙집(그네들 말로는 레지던스 호텔)은 물이 방까지 쳐들어오고 전기가 끊기는 대형사고(?)를 겪었다. 개연성은 충분했다. “, 이는 나로 하여금 의심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구나싶어 나는 자신 있게 이 부분을 내 책(『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315~317쪽 , 구간 275~277)에도 언급했다.

 

마지막 날이 왔다. 1453529일 아침, 성은 무너지고 도시는 붕괴되었다. 오스만군이 물밀듯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가장 먼저 들이닥친 곳 중 하나가 코라 교회였다.

교회 안의 금은으로 만든 성찬용품과 도성 시민들에게 기적을 부르는 성스러운 그림으로 추앙받던 호데게트리아를 떼어내 네 조각으로 난도질해 그 액자를 나누어 가졌다.”

나는 이렇게 내 책 본문에 썼다.(개정판 72쪽, 구간 56~57) 물론 나의 창작이 아니라 스티븐 런치만 교수를 비롯한 후세 연구자들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책을 쓴 지 1년이 가까워오는 요즘, 문득 이런 의심이 든다. 왜 다른 그림들, 금은으로 된 모자이크 성화에는 손도 안 댄 채 유독 이 그림만 떼어냈을까?(어떤 책에서는 호데게트리아를 서로 가지려고 난도질했다고도 표현)

그래서 다시 525일로 돌아가 논리적 상상력을 동원해 그 사건을 재구성해 보았다, 이렇게.

 

그날 부주의로, 또는 몹시 긴장한 나머지 호데게트리아 성화를 땅에 떨어뜨렸다. 들어 올리려다 보니 그림이 깨져 버렸다. 떨어뜨린 사람은 너무나 놀라 다시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몇 사람이 다가갔으나 이들 또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여러 사람이 겨우 들어 올렸다는 것은 깨진 그림의 조각들을 함께 들어 올림으로써 주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때마침 폭우가 쏟아졌다. 당연히 행렬이 해산하기 좋은 기회였다. 깨진 그림은 쉬쉬하며 코라 교회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나흘 후 오스만군이 들이닥쳤다. 우상 숭배를 배척하는 그들의 눈에는 엉성하게 이어 붙인 그림이 대수롭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금은 성찬용품을 챙기느라 거친 발길을 내딛는 병사들의 진동 소리에 묻혀 그림은 땅에 떨어지고 짓밟혀나갔다.

 

이렇게 각색해 생각한다면 억측이고 망발일까?

 

나는 코라 교회를 네 번 방문했다.

첫 번째는 겉모습만 본 정도였다. 혼자 간 탓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사전 지식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두 번째 갔을 때는 제대로 된 설명을 들었다. 책도 사고, 이해의 폭을 넓혔다. 그러나 가이드로부터 들은 얘기는 며칠 지나지 않아 가물가물해졌다. 녹음을 안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세 번째 방문에선 한국인 통역사를 데려가 현지 대학 교수로부터 설명을 듣고 녹음까지 했다. 물론 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아뿔싸, 녹음이 거의 되지 않았다. 배터리가 소모된 줄을 몰랐다.

네 번째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지만 이번에도 아슬아슬했다. 어쨌든 명통역 이경숙씨의 도움이 컸다.

 

PS. 이스탄불에서 귀국한 지 한 달여가 지났건만 녹음 파일과 찍은 사진들을 열어보고 들춰볼 시간이 없었다. ‘백수 과로사라는 우스갯소리는 나를 두고 한 말일까. 이 일 저 일로 무척이나 바쁘게 보냈다.

마냥 미룰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특강을 하루 앞두고 강연 원고를 쓰다가 잠시 젖혀두고 이 얘기부터 끝내야겠다고 덤벼들었다. 1부라도 우선 마치자 싶었다. 천하에 둘도 없을 내 난필악필 원고를 비서에게 넘기고 나서 한숨 돌렸다. 이제 사진으로 담아온 그림 작업이 남았다. 비서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다.

아무튼 코라 교회의 그 유명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를 통해 본 성서 이야기, 그리고 성경에도 없는 예수 탄생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그림과 함께 2부에서 밝히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