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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헤드라인

[2017-05-20] 제11회 한국박물관 국제학술대회 기조발표문

<제11회 한국박물관 국제학술대회 기조발표문>




대한민국 문화 국격과 박물관의 역할


-개인적 경험을 중심으로 한 단상과 소견-



 

김형오 | 부산대 석좌교수, 전 국회의장

 

박물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인류의 지혜 창고입니다. 초고밀도 압축 파일입니다. 박물관에 가면 나는 타임머신을 탄 듯 시공간을 넘나들며 역사 문화 예술 기행을 하곤 합니다. 박물관에서는 시간이 왜 그리도 빨리 흐르는지요. 타이베이 고궁(故宮) 박물관에서 이제 본격적 관람을 할까 했더니 동행한 해설자가 벌써 약속한 두 시간이 지났다 해서 나머지는 혼자 관람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해 여름에 본 신안 해저 유물전도 그랬습니다. 652년 동안 바다 밑에 잠들어 있던 24000여 점의 유물을 제대로 보기엔 하루해가 턱없이 짧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나라 때 빚은 백자 접시의 단풍 든 나뭇잎 그림에 적힌 당()나라 궁녀의 오언절구(五言絶句) 1·2(·)구가 담담히 폐부를 찔렀습니다. “유수하태급(流水何太急) 심궁진일한(深宮盡日閑); 흐르는 물은 어찌 저리도 급한가. 깊은 궁궐은 종일토록 한가한데


오늘의 기조 발표는 박물관을 사랑하고 즐겨 찾는 한 인문학도의 개인적 경험을 중심으로 한 단상이나 소견, 제안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흐르는 한 조각 나뭇잎이 큰 강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발견되지 않은 또 다른 접시에 분명히 쓰여 있을 그 궁녀의 시처럼, 내가 띄워 보내는 이 은근한 붉은 잎이 여러분의 폭넓은 가슴에 잘 도달되기를 바랍니다. [3·4(·); “은근사홍엽(慇懃謝紅葉) 호거도인간(好去到人間)”]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이란 말이 있습니다. 적과 흑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Basilica of Santa Croce)에서 미술품을 보다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황홀경을 경험한 데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뛰어난 예술 작품 앞에서 압도당하고 마는 현상이라 합니다.


20091, 이스탄불에서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처음 방문한 순간, 나 역시 강렬한 스탕달 신드롬을 겪어야 했습니다. 1500년 전, 기중기도 컴퓨터도 상상할 수 없던 시대에 하늘 높이 매달린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돔은 전율 그 자체였습니다. 화려하고 정교한 모자이크, 기하학적이면서도 웅장 유려한 대리석 벽과 기둥들, 건물의 배치며 장식품 하나하나가 모두 감탄을 자아내는 걸작이었습니다. 게다가 거기에 깃든 역사적 숨결과 체온을 대하고 나면 감동은 증폭됩니다. 스탕달도 만약 이 건물을 보았더라면 또 다시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기야 이 건물의 건립자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Iustinianus the Great, 재위 527~565)도 성당 봉헌식 날 감격에 겨워 솔로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Solomon, I Have Outdone Thee!”)라고 외쳤다니, 그 순간만큼은 황제 역시도 스탕달 신드롬에 사로잡혀 있었나 봅니다. 수백 번 지진을 겪고도 고전적 위용을 자랑하는 아야소피아는 현대 건축가들에게까지 불가사의로 남아 있습니다.


이 건물은 기독교 성당(Hagia Sophia)에서 이슬람 모스크(Ayasofya), 다시 박물관(Ayasofya Müzesi)으로 변신을 거듭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침략과 수난의 역사를 보듬으며 평화와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서양과 동양,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 과거와 현재가 별다른 충돌 없이 한 건물 안에서 화해와 공존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뒤로 수없이 이 박물관을 찾았고, 최고의 전문가로부터 깊이 있는 설명을 들으며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아야소피아에 대한 강연 요청이 올 만큼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나는 일부러 짬을 내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예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 문학관 등을 찾곤 합니다. 2년 전 이맘때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초청 강연을 하러 보스턴에 갔습니다. 마음이 설렜습니다. 전직 국회의장으로서 한국 정치에 관한 강연도 나로선 뜻 깊은 일이었지만, 나를 설레게 한 것은 보스턴 미술관(Boston Museum of Fine Arts)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고갱(P. Gauguin)의 그림을 본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거기 머문 사흘 동안 날마다 미술관을 찾아가 고갱 그림 앞에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를 되뇌며 작품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는 관장의 배려로 <모나리자>(Mona Lisa)를 바로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모나리자를 가까이에서 보려고 몰려 있는 수많은 관람객들에게 미안하여 선뜻 나서지 못하자 그들은 오히려 얼른 관장 안내에 따르라고 웃으며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같은 해에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이 일본 덴리대(天理大) 도서관에서 잠시 빌려와 전시했던 안견(安堅)<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를 보러 갔던 생각이 나더군요. 장사진(長蛇陣)을 이룬 관람객들 틈에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옆방에서 상설 전시 중인 진본 같은 사본을 충분한 설명을 들으며 조용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국제회의를 박물관에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주변에 종종 전파해 왔는데 실제로 201011월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의 첫 공식 행사가 바로 이곳,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습니다. 각국 정상과 국제기구 수장들은 빗살무늬토기,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등 찬란한 문화유산을 감상하며 리셉션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같은 시각 각국의 퍼스트레이디들은 서울 용산 리움미술관에 모여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 날엔 창덕궁과 한국가구박물관 등에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체험했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매스컴을 통해 지구촌 곳곳으로 중계되었습니다. 이처럼 세련되고 품격 높은 문화 마케팅이 또 어디 있을까요. 외국을 공식 방문하는 귀빈이라면 그 나라 주요 박물관은 반드시 들르는 문화 외교의 관행을 정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박물관은 가장 머물고 싶은 곳입니다. 심사가 번잡할 때도 그곳에만 가면 안정감을 되찾고 세상을 포용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국보 78, 83)을 전시할 때면 반드시 만나러 갑니다. 그윽한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는 아집과 이기심에 젖은 내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무아지경의 심연(深淵) 가까이 갔다가 돌아 나오면 편안해진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곳, 그곳이 바로 박물관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박물관과 관련해 아름다운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벌써 20여 년 전 일입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옛 중앙청을 허무는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웠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건물이었기 때문에 부수어 버린다는 거였습니다. 나는 내가 소속한 당의 대통령이 내건 핵심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다가 정치적인 어려움도 겪었지만, 지금도 그 소신만큼은 변함이 없습니다. 건물은 사라져도 역사는 남는 법, 과거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 해서 일제 침략의 역사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멕시코시티의 아즈텍 신전은 처참하게 부서지고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이 들어섰습니다. 반면에 앞서 말한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유목 전통의 정복자가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크게 활용했습니다. 두 문명, 두 종교가 공존합니다. 어느 쪽이 더 문명적인가요. 때로는 숨기고 싶은 치부나 깊게 파인 상처까지도 보듬고 가는 것이 참된 역사이며 올바른 태도라고 믿습니다. 역사란 영욕과 명암이 있기 마련이며, 그것은 또한 미래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부끄러워할 역사는 있을지 몰라도 대체할 역사란 없습니다. 경복궁 복원을 위해서라면 중앙청 건물은 자리를 옮겨서라도 보존해야 옳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공포한 곳을, 정부 수립 장소를, 불과 5(1945~1950)사이에 일본 제국기(미 군정기·북한 인공기·한국 태극기가 차례로 펄럭였던 세계사적 격동의 현장을 영원히 잃어버렸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다 피 흘린 자국도, 전쟁과 독재의 총탄 흔적도, 군부 집권의 방패가 되었던 탱크 자취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총독부보다는 대한민국 중앙청으로 훨씬 오래 있었지만 일제의 잔재라고 부숴 버리면서 한국 근대사도 함께 지우려 했던 것입니다.


박물관은 감동과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쟁을 오스만과 비잔티움, 두 제국 군주의 리더십에 초점을 맞춰 조명한 술탄과 황제(The Sultan & the Emperor)의 초판과 개정판을 쓸 때도 이스탄불에 있는 박물관들은 나에게 깊은 울림과 강렬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곳 군사 박물관에서 마주친, 560년 전의 낡고 볼품없는 쇠사슬 몇 줄이 이 책의 주인공 술탄 메흐메드 2세를 내 머릿속에서 부활시켰습니다. 쇠사슬 방책에 가로막혀 항구 진입에 실패한 술탄은 배를 끌고 산을 넘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항구와 도성을 점령하고 드디어 세계사의 물길을 바꾸었습니다. 역사의 현장 역시, 살아 숨 쉬는 박물관입니다. 나는 당시의 피어린 전투 상황을 엮어내려고 유네스코 헤리티지인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건립한 장대한 삼중 성벽(Theodosius Triple Walls)30번 넘게 찾아갔습니다. 하루 온종일 성벽 안과 밖, 아래와 위를 뒤적인 적도 있습니다. 그 바보 같은 열정이 내 책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기록과 수집은 인간(Homo Sapiens)의 욕구요 본능인 것 같습니다. 기원전 288년에 수집 가능한 당대의 모든 문서 자료 수십 만 점을 보관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양피지(Pergamena) 대량 생산 기술을 개발한 페르가몬 도서관, 대단한 애서가였던 에페스의 켈수스와 그의 아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서관. 비록 도서는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유물과 잔해 속에서 고대인의 높은 정신문화를 느끼게 됩니다. 박물관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함께 호흡하고 또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908년 창경궁 안에 설립된 제실박물관을 효시로 친다면, 우리나라 박물관의 역사는 110년에 못 미칩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박물관의 존재 가치에 눈을 뜬 개화 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박영효는 건백서(建白書)(1888)에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책 중 하나로 박물관 설립을 주장했습니다.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을 쓴 유길준은 박물관을 일컬어 천하 각국의 고금물산을 그 대소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부 수집하여 사람의 견문과 지식을 넓히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지금의 박물관 개념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탁월한 통찰입니다.


각설하고, 1991년부터 실시된 지방자치 제도는 수많은 박물관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습니다. 강원도 영월은 박물관의 고장입니다. 사진, 곤충, 음향, 지리, , 화석, 다구(茶具), 도자(陶瓷), 민속악기, 민화, 불화(佛畫), 종교미술, 인도미술, 아프리카미술, 현대미술, 김삿갓문학, 동굴생태. 그야말로 호명하기도 숨찬 박물관들의 박물관’(?)이 바로 영월입니다. 게다가 단종의 귀양지인 청령포(淸泠浦), 그가 묻힌 장릉(莊陵) 등 역사의 애절한 현장 박물관도 있습니다. 인구 5만여 명당 한 개의 박물관(2015년 기준 전국 982-미술관 202개 포함)을 보유한 대한민국에서, 주민 수가 고작 4만 남짓인 작은 고을이 무려 26(20173월 기준)의 박물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다채로운 박물관들의 매력에 힘입어 지난해 여름휴가 만족도 조사에서 전국 종합 1위를 차지한 영월은 박람회 및 포럼 개최 등을 통해 국제적인 박물관 특구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장 시절, 국정감사 기간을 틈타 국토 기행의 일환으로 영월을 다녀온 나는 아끼던 사진기 두 대를 동강사진박물관에 기증했고, 당시 군수로부터 내 이름을 붙여 상설 전시하겠다는 감사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가 20년간 국회의원으로 일한 부산 영도는 신석기인들이 거주하던 패총(貝塚, 조개무지) 지역으로, 이곳에 살던 민가를 이전하고 전시관과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그 바로 옆에 아시아 최초로(세계 최초인지도 모릅니다) 해양박물관을 힘들여 지었습니다. 조개잡이 하던 아득한 선조의 땅에 대양 개척의 의지와 여망을 담아 보았습니다.

나에게 박물관은 배움터이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공중 도시, 잉카 최후의 요새인 페루 마추픽추(Machu Picchu)는 돌 하나, 집 한 칸, 길 한 쪽, 밭 한 뙈기가 예사롭게 설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2400m의 이 황량한 고원에 살았을까요? , 도피, 치료, 영생, 은신, 휴양, 개간(開墾) 등등의 단어들과 함께, 현대 과학자들이 풀어야 할 인간 존재의 근원에 접근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얼핏 해보았습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마야(Maya)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기자(Giza) 피라미드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시대와 지역 등 모든 것을 달리하는 두 문명 사이에서 이질성을 뛰어넘는 동질성을 발견하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카탄 반도에 있는 마야 문명의 상징 치첸이트사(Chichén Itzá)를 방문했을 때는 공원 박물관장이 한국계여서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다름 아닌 애니깽’(Anniquin / Henequen; 용설란의 일종)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이민자들의 후예였던 거지요. 어려운 형편임에도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독립운동 비자금까지 쾌척했던 그들의 의로운 삶, 그 증표들을 메리다(Mérida)제물포 거리옆에 그들이 손수 세운 조촐하지만 위대한 박물관에서 직접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카이로 국립 박물관과 룩소르(Luxor:al-uqṣur) ‘왕들의 계곡에서 본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를 통해서는 뜻하지 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추구하며 엄청난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파라오들도 결국은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그의 심장은 마트(Ma'at; 정의와 진리의 여신)의 깃털처럼 가벼워야 했습니다. ‘깃털보다 가벼운 심장이라는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를 푼 순간, 나는 정치 현장을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술탄과 황제라는 작품을 그 빈 마음에 심혈을 기울여 채울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에 갈 때마다 나는 이 귀중한 문화유산을 후세에 남기고 전한 선인들께 감사하게 됩니다. 전주에 있는 경기전(慶基殿), 그 안에 복원한 전주사고(全州史庫)를 보면서도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화를 면한,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매우 큰 사고입니다. 전주사고가 없었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이토록 생생하게 존재했을까요. 태조 어진(御眞)과 몇 백 권에 이르는 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가마에 싣고 내장산으로 가 깎아지른 절벽 위 암굴에 모셔 놓고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다가 다시 그것을 싣고 강화도로, 묘향산으로 옮긴 선비들의 지극 정성과 피나는 노력이 없었더라면 전주사고본도 왜적에 의해 소실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뒤로도 갖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그때마다 실록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안간힘 끝에 기적처럼 후세까지 전해져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이 조선왕조실록은 서울대 규장각(奎章閣)에 보관 중입니다. 나는 지금 서울대 규장각 운영위원으로 있습니다만, 처음 참여 요청이 왔을 때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전란 중에도 실록을 지켜낸 선조들의 간절한 몸짓을 생각하며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수락했습니다.


20159,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화가 전혁림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그분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경기도 이영미술관에서 개최할 때 그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90세가 넘어서도 작품 활동을 하신 노화백께 100세 축하 기념전은 내가 모시겠다고 했는데 96세에 그만 돌아가셨습니다. 약속도 지킬 겸 거장의 작품 세계를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오늘도 저 하늘에서 통영 바다를 그림으로 노래하고 계실 그분께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돌이켜보면 20년 의정 활동을 하면서 나는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고 되찾는 일에 나름대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국회의장 시절에는 공관에 8폭 병풍을 그대로 복사한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를 걸어 놓고 외국 손님을 맞을 때마다 자랑하곤 했습니다. 200811월 프랑스를 공식 방문했을 때는 그 나라 상하원 의장을 잇달아 만나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들의 반환을 강도 높게 요청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양국 대통령간의 합의(201011, G20 정상회의)가 이루어지고 이듬해 5, 마침내 297권의 의궤 반환이 완료됩니다. 빼앗긴 지 145년 만의 귀환입니다. 5년 주기로 갱신해야 하는 대여 형식이긴 하지만, 프랑스 국내 사정과 우리의 실리를 적절한 선에서 절충해 얻어낸 외교적 성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 박물관(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은 좀 실망했습니다. 아시아 밖에 있는 세계 최대의 아시아 작품 전시관은 시청과 마주보는 시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한국인 기증자 이종문 기념홀이라는 커다란 명문(銘文)이 자랑스럽게 나를 맞이했지만, 막상 전시된 한국 유물은 바로 옆의 일본이나 중국관에 비해 많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관장으로부터 현대 작품도 전시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귀국하자마자, 친분 있는 도예장(陶藝匠)에게 특별히 의뢰해 만든 커다란 달항아리를 보냈습니다. 박물관으로부터 고맙다는 공식 접수 편지를 받았지만 샌프란시스코로 시집보낸 달항아리를 아직 만나러 가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습니다.


나는 국회의장 재임 중에 외국 정상이나 고위 인사로부터 받은 기념품과 선물 170여 점을 모두 국회에 기증했습니다. 11대부터 17대까지 전임 의장들의 기증품 합계보다 더 많은 숫자입니다. 퇴임을 앞두고 이 기념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국회에서 특별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다양하고 폭 넓은 의회 정상 외교의 모습을 국민에게 상징적으로 알리면서, 이 기증품들이 또 하나의 국회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별도로 코스타리카 전·현직 국회의장으로부터 선물 받은 그 나라 관련 서적 188권도 국회 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문화유산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답답하고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것은 반구대 암각화 문제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암각화는 지독한 물고문을 당하며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고래잡이를 한 증표인 작살 박힌 고래, 새끼를 등에 업은 어미 고래를 비롯해 여러 모습을 한 인간과 각종 동식물들이 흔적이 옅어지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국회의장 시절에만도 두 차례 현장 답사를 다녀와 그 심각성을 백방으로 알리고 물에서 빨리 건져낼 대책 마련을 외쳤지만 공염불이 되고 말 상황입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선사시대의 기념비적 문화유산인 이 암각화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가 문화를 논할 자격이 있을까요.


최악의 실수라는 오명을 남긴 공주 무령왕릉 발굴처럼 졸속으로 해서도,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天馬圖)처럼 보존을 허술히 해서도 안 됩니다. 반구대 박물관에 전시된 모형도의 실물은 지금도 대곡천 사연댐 물밑에 잠겨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화재 보호에 관한 두 가지 날카로운 대립에 직면합니다. 첫째는 문화재는 물론 그 주변 일대에 어떠한 손상이나 변경도 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주의적 입장이고, 둘째는 시대와 주변 환경에 따라 적절한 변경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입니다. 각자가 자기주장만 하고 있는 사이에 반구대 암각화는 서서히 질식당하며 처참한 형태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긴 조상에게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할 우리 후손에게도 면목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역사에 죄를 짓고 있는 건 아닌가요.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했기에 반으로 잘린 자식의 시체를 갖기보다는 산 채로 남에게 주는 편을 택했던 솔로몬의 재판법정에 선 생모의 심정으로, 문화재위원과 관계자 여러분들의 대승적 결단을 촉구합니다.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백범 김구 선생께서는 일찍이 문화 국가 건설을 주창하셨습니다. 선생은 1947년에 발표한 나의 소원이란 글을 통해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백범 선생께서는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70년 전 이미 문화 국가를 꿈꾸고 설계하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예지가 빛나는 선각자다운 면모입니까. 그때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우리지만 문화를 제대로 지키고 발전시키고 계승해 나간다고 할 수 있을지, 그 무엇보다도 정성을 다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습니다.


박물관은 나라의 얼굴입니다. 브랜드이며 국격입니다. 인류의 공통 자산이고 문명의 발자취입니다. 앞으로 인류가 걸어갈 길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박물관과 문화 정책, 그 새로운 가치와 방향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뜻깊은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라며 박물관 애호가로서의 순정한 편력기, 소박한 소견을 이쯤에서 마칠까 합니다. 귀담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