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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의 길'을 따라 걸은 1박 2일


‘백범의 길’을 따라 걸은 1박 2일


 

- 김 형 오 -


출간을 준비 중인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가제) 집필진과 함께 마곡사(麻谷寺)를 찾았다. 충청남도 공주시 태화산 기슭에 자리한 마곡사는 치하포 의거(1896년)로 수감되었던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년) 선생이 1898년에 탈옥한 후 반 년 정도 원종(圓宗)이라는 법명(法名)으로 승려 생활을 하며 머물렀던 곳이다. 우리가 마곡사에 간 날은 마침 김구 선생이 태어난 날(8월 29일)이기도 해서 감회가 새로웠다. 『백범일지』에서 마곡사를 찾아가는 장면은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평소 생각해왔다. 특히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世間)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出世間)의 길을 간다.”는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어느 종교인이나 철학자의 심정을 보는 듯했다.

김구 선생이 속세를 떠나 마곡사에 들어갈 당시의 심경을 떠올리며, 우리도 복잡하고 바쁜 도심을 떠나 김구 선생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마곡사에 도착하자 주지인 원경(圓鏡) 스님이 직접 나와 맞아주셨다. 선생(원종)이 머물렀던 절의 주지가 법명이 비슷하여 더욱 호감이 간다. 스님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마곡사 템플스테이 지도법사인 일양(溢洋) 스님의 안내로 마곡사 순례를 시작했다. 넘칠 일(溢)자와 바다 양(洋)자를 쓰신다는 일양 스님. 바다가 넘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사찰 안에서 장난삼아 ‘쓰나미’라고 불린다는 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스님의 안내로 처음 만난 것은 대광보전(大光寶殿) 앞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이었다. 라마교의 양식으로 만들어졌다는데, 그래서인지 이전에 봐왔던 석탑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첫 인상은 조금 이상하게 생겼다는 느낌도 들었다. 고려 초기의 석탑 양식에 상부는 라마교 형식을 그대로 닮은 구리로 된 조형물을 올렸다. 풍마동(風磨銅)이라는 원나라 제품이라 한다. 티베트·네팔 등지에서 보던 스투파 형식의 구리 불탑의 축소판을 보는 느낌이다. 탑 주변에는 아직도 붉고 노란 꽃이 한 꽃송이에 피어 있는 화초들이 우리를 반긴다. 꽃 모양이 왕관을 닮았다 하여 ‘금관화’라는데 외래종이다. 

         금관화 둘레와 오층석탑, 심검당과 대광보전                고려석탑과 원나라 양식이 결합된 오층석탑과

                                                                                 상부의 풍마동


                             금 관 화                        대광보전 현판 : 표암 강세황의 낙관이 뚜렷하다

오층석탑을 본 후 대광보전으로 향했다. 대웅보전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本殿)이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순조 13년(1813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년)의 현판이 도드라진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불상이 불전의 가운데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 않고, 왼쪽에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 모셔진 불상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인데,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반 관람객은 놓치기 쉽다며 스님이 직접 불상 뒤로 안내한다. 앞의 불상 크기의 커다란 관음보살상이 지그시 내려다본다. 앞에는 진리와 빛을 상징하는 비로자나 불상, 바로 뒤에는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 그림, 절묘한 배치가 아닐 수 없다.

           대광보전 안의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비로자나불               관음보살 그림


법당 불상 앞바닥에는 앉은 뱅이가 걸을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며 짰다고 하는 삿자리(갈대 또는 나무를 깎아 엮어 만든 자리)가 인조 카펫 아래 덮여 있다. 물론 앉은 뱅이는 삿자리를 완성한 후 걸어 나갔다고 한다.

대광보전 전면 기둥에 있는 주련(柱聯)*에 눈길이 간다. 백범이 환국 후 마곡사를 다시 찾았을 때(1946년) 찍은 사진을 보면 색칠을 다시 한 듯 주련 글씨가 선명했지만, 지금은 색이 완전히 바래서 고아(古雅)한 느낌을 준다. 돌아 나오니 친절하게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잘 설명된 안내판이 있다.

淨極光通達(정극광통달) 청정함이 극에 이르면 광명이 걸림 없으니
寂照含虛空(적조함허공) 온 허공을 머금고 고요히 비출 뿐이라.
却來觀世間(각래관세간) 물러나와 세상일을 돌아보면
猶如夢中事(유여몽중사) 모두가 마치 꿈속의 일과 같네.
雖見諸根動(수견제근동) 비록 육근(눈, 귀, 코, 혀, 몸, 뜻)이 유혹을 만날지라도
要以一機抽(요이일기추) 한 마음을 지킴으로써 단번에 뽑아버릴지어다.

* 주련 : 사찰이나 서원 또는 한옥의 기둥이나 바람벽 따위에 장식으로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기둥에 시구(詩句)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 부른다. 주련은 불교사, 서예사, 미술사적으로 가치를 지닌 하나의 독립된 문화유산이다. 사찰에서는 주로 부처님의 말씀 또는 고승들의 오도송이나 열반송을 주련으로 써 붙인다.

이 중 “물러나와 세상일을 돌아보면(却來觀世間) 모두가 마치 꿈속의 일과 같네(猶如夢中事)”라는 구절은 첫머리에 백범이 마곡사를 찾을 때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간다”는 표현과 겹친다. 마곡사를 떠난 지 수십 년이 되어서도 백범은 주렴 구절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대광보전은 안팎으로 구성과 장식이 풍부하고 건축 수법이 독특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광보전에서 나와 계단을 따라 뒤편으로 올라가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향했다. 마곡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밖에서 바라본 대웅보전은 이층짜리 건물이었지만, 내부로 들어가자 천장이 높은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독특한 형태였다. 천장 가운데 유리창을 내어 법당 안으로 자연 채광이 되도록 했다. 바로 그 부분이 밖에서 볼 때 1층과 2층을 구획 짓는다. 이곳에는 석가모니(釋迦牟尼)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藥師如來)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나란히 자리하고, 지붕을 받치는 네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일양 스님이 “이 중 한 나무 기둥을 잡고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서 우리 일행에게도 한 번 해보라고 권유한다. 수많은 참배객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인지 기둥에는 윤기가 흐른다.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유형문화재 제191호)가 봉안되어 있다. 마곡사 옛 스님의 솜씨라는데 그림의 크기도 수준도 보통이 아니다. 내 생각을 말하라면 대웅보전은 마곡사의 건물 중 가장 뛰어난 건축물이다. 16세기 말 축조되었다고 한다.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金生, 771~?)의 글씨라는데 증명할 길은 없다.

대웅보전 주련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古佛未生前(고불미생전) 옛 부처님 나시기 전에
凝然一相圓(응연일상원) 의젓한 동그라미 하나
釋迦猶未會(석가유미회)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으니
迦葉豈能傳(가섭기능전) 어찌 가섭이 전하리.
本來非皂白(본래비조백) 본래 검지도 희지도 않으니  
無短亦無長(무단역무장) 짧지도 또한 길지도 않도다.

대웅보전 주련

                      마곡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내부의 높은 천장을 바라보는 일행

마곡사의 중심 불전인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을 본 후, 백범당(白凡堂)으로 향했다.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 있을 당시 생활했던 공간은 원래 심검당(尋劍堂)이었으나, 선생을 기려 호를 따 백범당으로 별도 배치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사진과 친필 휘호 ‘행복(幸福)’, ‘양심건국(良心建國)’ 등이 걸려 있고, 옆에는 김구 선생이 광복 이후 1946년 다시 마곡사를 찾았을 때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백 범 당                                          백범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

심검당은 현재 오층석탑의 오른편, 대광보전 가기 전에 있다. ‘ㄷ’자형 건물인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정면 건물로만 보인다. 마곡사에 여러 건물들이 새로 들어서서 측면 건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모퉁이 어느 방에 백범이 기거했을 것이다. 영·정조 시대의 명필 송하 조윤형(松下 曺允亨, 1725~1799년)의 심검당(尋劍堂) 글씨가 오른쪽에,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년)의 마곡사(麻谷寺) 글씨는 왼쪽에 나란히 걸려 있다. 해강의 ‘마곡사’ 글씨가 이 절의 로고인 듯 여기저기 해강의 글씨로 표지를 해두었다. 해강의 글씨는 드물게도 대나무 그림이 배경을 이룬다. 삼일만세운동 때 명월관(明月館) 주인(?)인 죽농 안순환(竹儂 安淳煥, 1871~1942년)의 그림이다. 교수들과 함께 가니 의외의 사실들도 많이 알게 된다. 김구 연구 전문가들로서 한문과 한국 근현대사에 해박하여, 나 같은 사람의 수준을 올려 주기에 딱 좋은 여정이 되었다.

‘칼’은 백범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인가. ‘칼’을 씻고자 찾아온 그를 ‘칼을 찾는 집(尋劍堂)’이 맞이한다. 물질의 칼이 아닌 마음의 칼을 찾으라는 뜻이리라. 심검당 글씨는 마음을 씻을 칼을 찾는 이의 마음을 칼같이 차갑게 하는 듯하다. 옆의 부드러운 마곡사 글씨와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마곡사 편액                                                    심검당 편액

백범당부터 김구 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백범 명상길이 시작된다. 마곡천(麻谷川)을 따라 걷다가 만난 곳은 김구 선생이 승려가 되기 위해 머리를 깎았다는 삭발터. 젊은 나이에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과 고초를 다 겪은 그였지만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백범일지』에서도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며 당시의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마 곡 천                                               백범 김구선생 삭발터 

마곡천을 건너 산행을 시작했다. 산 속의 아름다운 숲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마곡에서 가장 지기(地氣)가 강하다는 군왕대(君王垈)였다. 우리는 지기를 느껴보기 위해 땅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강한 기운 덕분일까? 땅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조선의 7대 왕 세조(世祖, 1417~1468년)도 이곳에 올라 “내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이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인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라며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김구 선생도 이곳에 올라 땅의 기운을 느끼며, 조국과 우리 민족의 힘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다잡지 않았을까?

                     군왕대로 올라가는 길                                군왕대의 지기를 느껴보았다.

군왕대를 뒤로 하고 마애불(磨崖佛)이 있다는 백련암(白蓮庵)으로 향했다. 백련암으로 가던 길에 영산전(靈山殿)과 매화당(梅花堂)에 들렀다. 영산전에도 군왕대와 마찬가지로 세조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생육신(生六臣)의  한명인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이 계유정난(癸酉靖難) 소식을 듣고 마곡사에 은거할 때의 일이다. 세조는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마곡사로 행차했으나, 김시습은 미리 알고 마곡사를 떠난다. 세조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타고 온 가마를 두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이 때 사용했던 가마는 현재 마곡사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영산전에는 세조의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영산전의 옆에는 매화당(梅花堂)이 자리하고 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서 처음 도착한 곳이 바로 매화당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스님들의 선방(禪房)이지만 한때 호신술로 유명했던 매화당 권법의 발상지가 바로 여기라고 한다.

                              영 산 전                                            세조의 친필 영산전 현판

영산전 주련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空生大覺中(공생대각중) 허공이 큰 깨달음 속에서 생겨난 것이
如海一漚發(여해일구발) 마치 바다에서 물거품이 하나 일어나는 듯하니
有漏微塵國(유루미진국) 티끌같이 수없는 중생의 세계도
皆依空所生(개의공소생) 모두 허공을 의지하여 생겨났도다
漚滅空本無(구멸공본무) 물거품이 소멸하듯 허공도 본래 없거늘
況復諸三有(황부제삼유) 하물며 다시 삼제가 있을 수 있을까?

영산전 주련

백련암을 찾아 가는 도중에 “백범이 머물렀다.”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백련암에는 백범의 흔적은 없고 바로 뒤의 마애불만 보았다. 안내자도 설명도 없어 조성연도조차 불확실한 수수한 마애불은 말없이 우리를 내려다 볼 뿐이다. 내려오는 길은 가팔랐다. 웬일인가 싶었더니 스님이 가리킨다. “저 송림(松林) 좀 보세요. 주지 스님이 이리로 올라가라 했는데 우리는 내려갑니다.” 과연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다. 자랑할 만한 숲이요, 공기의 질이 다른 것 같다.

                              백 련 암                                                 백련암 마애불 앞에서

마곡사 순례를 마친 후, 마곡사 주지 원경스님과 차담을 잠시 나누었다. 원경스님으로부터 김구 선생에게 있어 마곡사, 마곡사에 있어 김구 선생의 의미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차담 후, 오늘의 답사를 정리하고 ‘백범의 길’ 집필에 대한 방향을 정하기 위한 회의를 본격적으로 가졌다. 앞으로의 답사와 조사 방향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고, 특히 아직 우리가 찾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던 자료 수집에 전 국민이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안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김형오 협회장과 원경스님                                     원경스님과의 차담

첫날의 모든 일정을 마친 후, 각자의 방사로 돌아가 개인시간을 가졌다. 밤 10시,태화산(泰華山)의 맑은 공기와 선선한 바람이 방 안을 감돌고, 마곡사의 은은한 범종 소리가 귓전에 남는다. 일정을 함께 한 교수 한 분이 말했다. “이렇게 빠듯한 일정을 자로 잰 듯이 지키면서 마음 편히 온종일 보내 본 행사는 근래 처음이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전국에 뿌려진 백범의 발자취를 더듬는 이 쉽지 않은 일이 결코 어려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보다 편안한 기분으로 잠이 들 수 있었다.

                                                        범종루의 동정각
 

[1부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