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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격 문화 마케팅의 새로운 모델
-G20 정상회의, 국립중앙박물관 개최를 반긴다

  11월 11일 개최되는 G20 정상회의의 출발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는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고 최선의 선택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최정상의 리더들이 신라 금관과 백제 금동향로 등 빛나는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뒤 겨레의 얼과 혼이 깃든 박물관에서 글로벌 경제 현안을 주제로 만찬을 곁들인 첫 정상회의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이 얼마나 가슴이 뛰는가. 처음 그 뉴스를 듣는 순간 나는 참으로 반갑고 뿌듯했다. 우리도 이제 문화국가의 반열에 들어서는구나 하는 감동이 일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립박물관은 시공간을 초월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 곳에 담아 놓은 초고밀도 압축파일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만큼 그 나라의 문화를 일목요연하게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또 있을까. 나는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중요한 국제회의를 박물관에서 열면 좋겠다는 생각을 주변에 전파해 왔다.

출처: www.encyber.com


  국립중앙박물관은 내가 즐겨 찾는 곳이다. 연작으로 낸 내 두 권의 책에도 세 편의 글로 소개해 놓았다. 국회의장으로 있던 지난해 10월에는 두 번에 걸쳐 그곳을 방문했다.
  그때 나는 최광식 관장에게 “내년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의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다면 행사를 치를 만한 여건이 되느냐”고 물었다. 2005년 용산으로 옮겨 개관한 박물관이 시설과 규모 면에서 충분히 그런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 관장은 자기도 그런 생각을 평소 하고 있었다면서,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 뒤로 나는 청와대를 비롯한 핵심 관계 기관의 책임자들을 만나면 내 아이디어를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올해 4월에 펴낸 내 책(『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도 최 관장에게 쓰는 편지글 형식으로 그 내용을 다시금 언급했다.(맨 아래 인용문 참고) 그런 만큼 G20 정상회의의 국립중앙박물관 개최는 내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나 말고도 그런 제안을 한 분들이 많으리라고 본다. 이 행사를 책임진 분들 또한 남다른 안목과 예지로 회의 및 만찬 장소를 정했을 것이다. 그 모든 분들의 판단과 결정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예술성이 세계 주요 매스컴을 통해 생중계된다면 그 가치를 환산하기 벅찬 최고의 문화 마케팅이 될 것이다. 이 행사를 통해 나는 대한민국의 국격이 한결 높아지고 코리아의 브랜드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아래에 인용한 글은 지난 4월에 발간된 내 책에서 옮겨온 내용이다.

  “외국에 나가면 나는 짬이 날 때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들르곤 합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예술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이니까요. 국제회의를 박물관에서 하면 어떨까도 생각해 봅니다. 예컨대 오는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의를 한번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다면 어떨까요? 그게 여의치 않다면 정상들과 동행한 퍼스트레이디들을 박물관으로 초대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남부럽지 않은 문화유산을 지닌 나라니까요.” (『…이 아름다운 나라』 103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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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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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플로렌스 2010/10/28 14: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혜안과 예지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요.

  2. 컬처클럽 2010/10/28 17: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나이스 아이디어
    문화 선진국이
    결국은 문명 선진국입니다

  3. 시경식영 2010/10/29 0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그래도 G20정상회의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는 뉴스를 듣고 형오님 책에서 본 부분이 번뜩 떠올랐습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사료로 남기시는 점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작권까진 안되도 먼저 말하고 기록한다는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입니다.

  4. 원더풀 코리아 2010/10/29 08: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G20 재무장관 회의 경주 개최에 이어
    G20 정상회의가 국립중압박물관에서 열린다면
    세계에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각인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 알프스 2010/10/29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지력과 통찰력으로빛나는 성과 거두어 몇년 뒤 열릴 정상회의에는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하시기 바랍니다

  6. 크리에이터 2010/10/31 0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물관을 정상회의 장소로 쓸 수 있다는 사실,
    이 얼마나 창조적이고 획기적인 아이디어입니까.
    G20 정상회의의 멋진 성공을 기원합니다.

  7. 컬처 코리아 2010/11/14 0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대를 보는 큰 눈, 밝은 눈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문화 강국으로의 도약을 기대해 봅니다.

국정감사 여적(餘滴)=길 위에서의 이삭줍기
‘애니깽’,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름 

 

※읽기 전에 잠깐!
  ‘여적(餘滴)’이란 ‘글을 다 쓰거나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뒤에 남은 먹물’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칼럼은 얼마 전 막을 내린 국정감사, 그 뒷이야기쯤으로 해석해도 무방하겠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국감 얘기를 쓰려는 건 아닙니다. ‘길 위에서의 이삭줍기’란 표현에서 보듯이, 외교통상통일위원회(외통위) 소속 의원으로서 남미(멕시코·콜롬비아·페루)로 출장을 갔던 길에 짬짬이 만난 의미 있는 여정을 네티즌들과 공유하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내 아이폰이 카메라와 녹음기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그래서 사진 상태가 썩 좋지 않음을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일부는 자료 사진입니다.)


  1905년 4월 4일 일본의 인력 송출 회사가 모집한 한인 1033명이 영국 상선에 몸을 싣고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 5월 16일 멕시코 유카탄 주의 중심 도시인 메리다 시에 도착합니다. 이로부터 저 잔혹한 멕시코 이민 1세대, ‘애니깽’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멕시칸 드림이 멕시칸 악몽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 같은 제목으로 만들어진 애니깽 소재 연극(왼쪽)과 영화(오른쪽)포스터. 1997년 개봉한 <애니깽>(김호선 감독, 장미희·임성민 주연)은 제작 기간 3년, 제작비 30억 원, 출연진 1만 여 명이 동원된 대작으로 34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연극과 뮤지컬(원작 김상렬)로도 만들어져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김선영의 3부작 대하소설『애니깽』, 김영하의 장편소설 『검은 꽃』도 애니깽을 소재로 하고 있다.

  지난 10월 10일, 메리다 시에 도착한 우리 팀은 한인 후손들의 증언과 이민사 박물관의 전시물들을 통해 멕시코 이민 1세대 선조들의 슬프고도 감동적인 삶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진들을 고르고 녹음을 듣고 관련 자료를 찾으면서 나는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 일입니다. 1905년은 나라의 운명이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혼미하고 위태로울 때였습니다. 가난에 찌든 농민과 도시 노동자, 그리고 변화를 갈망하던 이들에게 조국은 더 이상 희망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과 영국인 브로커의 감언이설에 속아 한 조각 희망을 움켜쥐고 정든 고향을 등지게 됩니다.  



▲ MBC에서 멕시코 이민 100주년을 맞아 제작한 다큐멘터리 속에 비친 에네켄 농장. 100여 년 전 출신성분이 각양각색인 한인들은 노예 사냥꾼들의 사탕발림에 속아 지구 반대편으로 망망대해를 건너왔다. 저 무성한 에네켄 잎들은 그들의 애환을 기억하고 있을까. 

애니깽은 스페인어 ‘에네켄(Henequén)’의 한국식 발음 언어. 당시 메리다 지역 경제의 중심을 차지했던 에네켄은 *용설란(龍舌蘭)의 일종으로 이민자들은 모두 이 에네켄 잎을 잘라 모아 다발로 묶은 뒤 가공 공장으로 옮기는 일(펭카)에 투입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음이 ‘애니깽’으로 변하고 그 의미가 확장돼 나중에는 22개 에네켄 농장에 분산 배치되어 노예처럼 일하던 이민자들과 그들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키가 2미터에 이르고 줄기와 가시가 억센 열대 선인장. 잎 모양이 용의 혀(龍舌) 같다 해서 우리말 이름은 용설란(龍舌蘭)이다. 초록색 이파리에 강도와 끈기가 강한 섬유질이 함유돼 있어 롤러로 으깬 후 펄프를 긁어내어 굵고 질긴 선박용 로프를 만드는 데 주로 쓰인다. 20세기 초에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해운업이 호황을 누려 특히 수요가 급증했다. 온대 지방에선 관상용으로 키우지만 꽃을 보기가 쉽지 않다. 1백년 만에 꽃이 핀다 해서 ‘세기의 식물(Century Plant)’이란 별칭을 갖고 있는데, 꽃을 피우고 나면 곧 죽는다고 한다.





▲ 2005년 메리다 시내 중심부에 세워진 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탑. 메리다 시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동네의 컨벤션 센터 앞에 조성되었다. 재외동포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인회 목사가 디자인했다. 그래서인지 세련된 맛이 덜하다. 탑 맨 꼭대기에는 양옆으로 에네켄 이파리를 뜻하는 상징물이 솟아 있다. 중앙에 있는 자석 모양 조형물은 유나이티드(United), 즉 연합·단합을 상징한다. 탑을 받치고 있는 5층 계단식 석조물은 원래 3단으로 설계되었지만 준비한 석재가 남은 데다가 좀 더 튼튼하고 위엄 있게 보이려고 2층을 더 높여 지었다고 한다. 기념탑 앞에서 찍은 인물 사진은 왼쪽부터 올센 부회장, 나(김형오), 울리세스 박 회장이다. 한인 후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메리다에는 한-멕 우정병원도 지어져 있다. 

 배에서 내리는 순간,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멀리 두고 온 가족들과는 연락이 두절되었고, 고국으로 돌아갈 길은 영원히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부초(浮草)와 같은 유랑 난민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허위 광고와 사기 계약에 의한 불법 이민의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들은 *까레이스키와는 또 다른 형태의 유민이었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살고 있는 한국인 교포(고려인, 高麗人)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1937년에서 39년 사이 스탈린은 일본과 밀약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배후지)를 말살시키려고 17만 명이 넘는 우리 동포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생명력으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집단 농장을 경영해  소련 내 소수 민족 가운데서 가장 잘사는 민족으로 뿌리를 내렸다.


  애니깽들은 당나귀보다도 더 처량한 신세였습니다. 온종일 뙤약볕 아래서 가시에 찔려가며 *중노동을 했습니다. 하루 1만 개의 할당량을 못 채우면 채찍이 사정없이 온몸을 훑었습니다. 독기를 가득 품은 방울뱀들도 발밑에서 이들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산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905년 중국인 허후이(河惠)의 편지가 황성신문에 실리면서 한인들의 비참한 처지가 고국에 알려졌다. 그는 “이곳 토인이 지구상 5, 6등 노예란 소리를 듣는데 한인은 그 밑의 7등 노예가 되어 영원히 우마(牛馬)와 같다”고 그 참상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 황제는 눈물지으며 동포들을 빨리 송환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미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뒤라서 외부협판 윤치호의 멕시코행도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약속된 임금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헐값으로 살인적인 노동과 착취에 시달리면서 값싼 술로 고통과 시름을 달래려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메리다 시에 ‘제물포 거리’(아래 사진 설명 참고)가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지상 낙원 멕시코에 가면 일당 1원30전에서 3원까지 보장한다고 황성신문에 모집 광고를 냈지만 실제로는 하루 35전밖에 주지 않았다. 그나마 하루 식대 20전을 떼고 지급했다.

 

▲ 메리다 시의 중심부인 산티아고 광장 앞에 위치한 이 ‘제물포(인천) 거리’는 가슴 뭉클한 탄생 배경을 갖고 있다. 에네켄 농장의 한인 광부가 이 동네 한 바에서 술만 마시면 곧잘 “제물포, 제물포, 제물포!”를 외쳐댔고, 그러면 주위 사람들도 같이 외치곤 했다. 바의 주인은 왜 그리 구슬프게 ‘제물포’를 연호하는지 까닭을 물었고, 그 절박한 외침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로 시작되는 흑인 영가(한 늙은 흑인 노예가 고향 버지니아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은 미국 가곡)의 사연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감동한 주인은 주점 상호를 ‘제물포’로 바꾸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일대 거리 이름도 아예 ‘제물포 거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왼쪽 건물이 바로 ‘제물포’ 술집. 현재는 정부 소유 전당포(멕시코 전당포들은 모두 국영이란다)로 운영되고 있다.
 

  1909년, 4년간의 ‘노예 계약’이 끝나 권리를 찾으려 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돼 갔습니다. 이듬해 한일합병이 되자 이들은 국적마저, 돌아갈 조국마저 상실해 버렸습니다. 무능하고 무력한 식민지 조선에 의해 이들은 역사에서조차 버려지고 지워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쿠바로 재이민을 갔습니다. 물론 그 모든 비극의 이면에는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막으려는 일제의 교묘한 음모와 야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민 비자에도 한인들의 출생지는 조선인데, 국적은 일본으로 표기돼 있었습니다. 일본 외무성 비밀문서를 통해 이미 확인된 사실입니다.)

 



▲ 제물포 거리에 붙어 있는 현판. 2007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에서 설치했다고 새겨져 있다.(왼쪽 사진) 이민사 박물관 벽에 걸려 있는 낡고 얼룩진 태극기. 그 옆에 나란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오른쪽 사진) 

  그러나 멕시코 100여 년 이민사는 좌절과 절망의 역사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도전과 개척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현장에서 한국 근현대 이민사의 깊은 수렁을 벗어나 건강하게 움트고 있는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멕시코 전역에서 에네켄처럼 굳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3만 명의 한인 후손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이들은 각계각층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계·법조계·학계·의료계·예술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리더로 떠오르거나 성공 신화를 써나가는 주인공들도 있습니다.  



▲ 1905년 4월 4일, 한인 1033명을 태운 영국 상선 ‘일포드(ILFORD)’호가 뱃고동을 울리며 제물포항을 떠났다.(위 사진) 배에 탄 사람들은 나름대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배와 기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며 40여 일간의 고된 여정(우리는 비행기로 가는데도 20시간 가까이 걸렸다) 끝에 도착한 지구 건너편, 낯선 대륙에서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아래 사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탕수수밭의 꿈은 순식간에 가시밭 현실로 바뀌어 있었다. 한 사람 당 에네켄 잎 1만 장을 채취해야 그날 하루 작업이 끝났다.

   현재 6세대까지 내려온 한인의 후손들은 멕시코 전역에 3만 명 남짓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메리다가 5000명으로 가장 많고, 멕시코시티 2000명, 티후아나 1500명 순입니다. 이들은 6개 지역 별로 한인 후손회를 결성하고 있습니다. 유카탄 주 인구 200만 중 100만 명이 메리다에 거주하는 걸 감안하면, 메리다 지역에는 주민 200명 중 한 명 꼴로 한인 후손들이 살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후손 숫자는 센서스에 의한 것이 아닌 추정치입니다. 그만큼 살기가 각박했다는 반증이지만, 정확한 통계는 또한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나는 메리다 시에 머무는 동안 거리 곳곳에서 저 사람 혹시 한인 후손이 아닐까 싶은 얼굴들을 심심찮게 만났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친근감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 농장 관리인들은 말을 타고 다니며 게으름을 피우거나 일손이 더딘 노동자들을 보면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방울뱀에 물려 죽은 한인들도 많았다. 4년만 일하면 큰돈을 벌어 금의환향할 수 있다던 이들의 꿈은 허물어져 내린 지 오래였다. 

  국적도 모두 멕시코고 모국어를 잊은 후손들이 거의 다지만, 그래도 ‘아버지·어머니·할머니·할아버지’ 등의 호칭과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한국어로 할 줄 알았습니다. <아리랑>이나 <애국가>를 부를 줄 아는 후손들도 드물지 않다더군요. 5세대, 6세대를 내려왔지만 한국인의 모습만큼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이민 1세대 중에 여자는 2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아 현지 원주민 여성들과의 결혼이 잦다 보니 혼혈도 급속히 진행되었습니다.

 

▲ 1905년 5월 멕시코 도착 직후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위). 짚신과 한복 차림이 눈길을 끈다. 멕시코 이민사 100여 년을 통틀어 가장 오래 된 한인 1세대들의 기념사진이다. 앳된 소년의 모습까지도 보인다.
반면에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아래 사진은 위 사진보다는 좀 더 세월이 흐른 뒤인 것 같다. 남녀 아이들 옷차림이 비슷하면서도 단정한 걸로 보아 한글학교 교사들과 찍은 기념사진 같기도 하다. 위 사진과 아래 사진에는 아마도 동일 인물이 있겠지만 내 눈썰미로는 찾기 어려웠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샘솟는 사진들이다.
내가 아이폰에 담아온 이 사진들은 모두 한인 후손들이 가보처럼 간직해 오다가 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들이다.

  그날 메리다 시의 심장부에 있는 이민사 박물관에서 무엇보다도 나를 감동시킨 것은 한인 1세대들의 독립운동, 그 흔적들입니다. 설명을 해준 박물관장 *제니 장 씨도 이 대목을 얘기할 때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열정에 차 있었습니다. 애니깽이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숭고한 이름인 것은 그런 숨은 역사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1세대, 2세대 애니깽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 국민회와 연결고리를 갖고 주권을 상실한 조국의 독립운동 비자금을 대는가 하면, 광복 후에도 조국의 불우한 동포들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한글학교를 세워 후손들에게 모국어와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려고 애썼습니다. 그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말입니다.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오래 된 우리말 책들이 나의 감동을 증폭시켰습니다.

*Genny Chans Song. 이민 1백주년을 기념해 2005년에 문을 연 이민사 박물관의 관장인 그녀는 한인 후손이다.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로 열강하듯 설명을 해주었는데 간간이 한국어(낱말 수준)를 섞어 썼다. 마이 아버지 정, 마이 어머니 송, 마이 할아버지, 마이 딸 식으로 가족 관계를 얘기할 때는 특히 그랬다. 이들은 이름 뒤에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쓴다. 조상이 고씨 성이면 코로라, 최씨 성이면 산체스로 쓰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제니 정 관장은 변호사인 아들 명함 뒤에 자기 이름과 주소를 적어 주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그녀가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순백으로 빛나고 있는 추억들. 나비넥타이를 맨 다섯 명의 청년은 예쁜 드레스 차림의 아가씨들과 합동 결혼식(약혼식?)을 올리고 있는 걸까? 화동을 들러리 세운 결혼식과 아마도 목사가 주례를 선 듯한 예식 장면도 보인다. 3대 아홉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 찍은 듯한 가족 사진은 단란하고 행복한 모습이다. 이때만 해도 한국인들끼리의 결혼이 드물지 않았었나 보다. 

  한 순간 케네디 대통령의 명언이 내 머리를 스쳤습니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라.” 

  멕시코 이민 1세대들은 국가로부터 혜택이나 도움은커녕 냉혹하게 버림받은 존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조국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했고 또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 내 심금을 울린 초창기 이민자들의 나라 사랑 증표들. 발행일자가 1918년 12월 5일로 되어 있는 신한민보(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민 단체가 창간한 대한인 국민회의 기관지) 호외.(위 왼쪽) 대한인 국민회 입회 증서.(위 오른쪽) 대한인 국민회 총회에 낸 의무금 증서.(아래 왼쪽) 1946년 고국의 헐벗고 굶주린 동포 난민을 구제하자며 모은 성금 장부.(아래 오른쪽) 

  그런 그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민주국가와 국민은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재외 교포들도 우리 국민들입니다. 앞으로는 투표권도 갖게 됩니다. 나는 재외 국민들이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만큼 대한민국도 재외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 이민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한국의 전통 각시 인형들. 화사한 한복 차림에 부채춤을 추고 있다.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교민들은 모두 소중한 우리 국민, 우리 핏줄들입니다. 과거를 토대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열어 나가야 합니다. 앞으로 더욱 활발한 인적·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도록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서 역할을 다하자고 다짐하며 나는 메리다 시를 떠났습니다.

  멕시코 대사관 국감을 통하여 우리는 한인 후손들 문제에 대해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째, 한인 이민 1백주년 기념탑이 너무 초라하다는 겁니다. 이 기념탑과 더불어 한인 이민사 박물관에도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3만여 한인 후손들은 우리에게도 소중한 인적 자원입니다. 이들을 할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과 좀 더 가까워지게 해야 합니다. 그 방안으로 이들에게 한글 교육과 직업 교육을 시키는 프로그램을 정부나 민간 차원에서 만들면 어떨까요. 그리하여 교육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다면 국력도 그만큼 신장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여러분 의견은 어떻습니까.



P.S. 한인회장 울리세스 박과 부회장 올센(어머니 성이 이씨인 이 두 분은 친척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민사 박물관 관장인 제니 장씨가 끝까지 동행하며 친절한 안내와 열정에 찬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 분들이 안내한 현지 음식점에서 우리는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리고는 조그만 선물로 성의 표시를 했을 뿐인데도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블로그를 통해 특별히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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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ny Can 2010/10/27 0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로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국정감사 카메라는 남미에 안 따라갔나요?
    이런 현장을 생중계했더라면 훨씬 더 재미있고
    유익한 국감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애니깽,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름의 주인공들은
    어쨌든(Any) 할 수 있다(Can)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애니캔(AnyCan)이란 별칭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2. 가을국화 2010/10/27 1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라 안팎으로 한 많은 역사를 가진 민족이 우리 민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 이상 이런 비운의 역사를 쓰지 않기 위해서
    보다 강하고 당당한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3. 모개 2010/10/27 1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 글이었습니다.
    투박하고 빛 바래진 사진들이 이 서사(敍事)의 진정성을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김형오 전 의장께선 학자같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학자같다는 말씀이 틀렸다는게 아니라 국정에 임하는 자세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외교, 통상, 국방, 영토, 원전, 종교, 개헌 ....
    어떤 문제이건 시류를 따르기보다는
    꾸준한 연구와 깊이있는 검토의 결과물을 내놓고 화두를 던지는 분이 아닌가싶습니다.
    정치하는 분들이, 하고싶어하는 분들이 롤모델로 삼아야 할 분이 아닌가 싶고.


    재외동포 참정권 등, 제도의 시행과정에선 당면한 문제들의 예민한 모서리도 함께 드러날 것입니다. 이미 일부 재외교포들은 혼인을 통해 한국인이 되고서도 그 2세와 함께 다문화가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어렵사리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국적이나 참정권 문제 등등 현안이 있을 때마다
    고민없이 끊고 맺고 가닥을 잡아나갈 게 아니라
    이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그들에게 누구이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겠다는 생각 해보았습니다.


    이 홈피가 던지는 여러가지 질문들,
    제게 그랬던 것처럼 많은 분들의 가슴에 느낌표와 물음표를 남길 것 같습니다.

    • 윷걸 2010/11/01 23:00  댓글주소  수정/삭제

      학자적인 식견과 탐구욕, 문필가적인 감성과 구성력이 순금처럼 혹은 순은처럼 반짝입니다.

  4. atman 2010/10/27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장님 안녕하세요?
    슬픈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읽었습니다.
    G-20의장국이니하는
    전 세계에서 내노라하는 대한민국의 국격에 맞도록
    이런 내용을 국민들이 많이 알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5. 휴머니스트 2010/10/28 0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장님은 남다른 휴머니스트인 것 같습니다.
    21세기 미래의 정치는 그런 휴머니스트가 이끌어가야 합니다.
    어떤 드라마나 휴먼 다큐멘터리보다도 감동적인 포스팅이었습니다.

  6. 규현 2010/10/29 0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도 안통하고 길도 모르고 할 수 있는건 오직 에네켄 잎 만장을 채취하는것 뿐.
    하지만 이것은 비단 역사속의 일이 아닙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농장에서 일하며 영어를 배우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애니깽들처럼 노예살이는 아니지만은요.
    국력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 포스팅입니다.

  7. 일필휘지 2010/11/03 05: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적으로 쓴 글이 내 마음을 온통 물들였습니다.
    먹물의 진액만 벼루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8. 김형오 2010/11/03 1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애니깽 이야기"에 이렇게 뜨거운 반응 주셔셔 감사합니다. 바쁜 틈틈이 이것만은 꼭 함께 공유했으면 해서 올린글입니다.여적으로 올렸지만 사실 국정감사란 이런 곳, 이런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악 조사 개선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여건이 그렇게 되는 날이 오겠지요
    나는 외국에서 만나는우리 동포 우리 핏줄의 그 끈끈함과 저력을 느끼고 존경하게 됩니다. 제글에 감동받으셨다하는데 저는 오히려 여러분의 격려 말씀이 제 눈가를 적십니다 그동안의 피로가 눈녹듯합니다 함께 고생한 제 보좌진들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여러분 격려에 힘입어 에니깽의 문제 개선에 힘쓰는 한편 여적으로 또 다른 글 한편 올릴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9. 필링 2010/11/04 0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성과 이성과 지성의 삼두 마차가 이끌어가는 수레에는
    참으로 값지고 탐나는 보석들이 가득 실려 있습니다.
    여적으로 올릴 예정이라는 또 한 편의 글이 기대됩니다.

  10. 에스프리 2010/11/07 0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슴이 미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용설란 가시에 찔려, 방울뱀에 물려, 농장주의 채찍질과 무자비한 학대에 시달려
    외롭게 숨져간 한인 1세들에게 삼가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후손들의 번영과 행복을 빕니다.

  11. 화룡점정 2010/11/08 0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먹물이 말라가는 벼루에서 마지막 먹물을 찍어 당신이 그려낸 것은
    용의 눈, 그것이었습니다.

  12. 각시인형 2010/11/13 0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으면서 어느새 눈물이...
    용설란 잎사귀에 그런 슬픈 사연이 숨어 있는 줄은 처음 알았어요.

  13. BlogIcon 박주현 2012/01/25 0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곧 멕시코로 일을 하러 떠나게 되는 섬유디자이너입니다. 멕시코와 관련된 애니깽에 대한 이야기를 한비야 선생님의 책을 통해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애니깽" 검색을 통해 이 글을 읽게되었는데, 멕시코에 가게 되면 꼭 이민사 박물관에 다녀와야겠어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한국인이라는데에 자부심을 느끼게 합니다. 지난 100년간 우리의 선조들이 일구어낸 오늘날이 너무 자랑스럽네요...

꿈의 메신저, 희망의 대변인
-슈퍼스타 허각의 탄생에 부친다

  케이블 방송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며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K2>가 마침내 대장정의 막을 내렸습니다. 나는 여기서 지난 8개월, 그 뜨거웠던 열기를 재방송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허각’이라는 두 이름자를 세상에 각인시킨 스물다섯 살 한 청년의 ‘슈퍼스타 탄생’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깜짝 스타’라지만 나는 결코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으렵니다. 물론 허각은 ‘허걱!’이라는 감탄사를 연상시킬 만큼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루아침에 반짝, 스타로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한 부모 가정에서 중학교만 마치고 막노동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으면서도 그는 결코 한 순간도 노래에 대한 꿈, 가수를 향한 열망을 접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준비된 스타’였습니다. 


  또한 그는 실력으로 승부를 건 진정한 프로페셔널입니다. 가창력은 출중하지만 외모와 스타성에서 밀린다는 게 세간의 평가였습니다. 실제로 결선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숱한 탈락의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온라인과 전화 투표에서의 약세를 심사위원 점수로 만회해가며 감동의 드라마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런 그를 보는 시청자들의 시선도 차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결승 무대에서는 온라인과 전화 투표, 심사위원 점수 모두에서 압도적 표차로 경쟁자인 존박을 따돌리며 최종 우승자로 우뚝 섰습니다. 

  이 가진 것 없고 ‘빽’도 없으면서 외모마저 평범한 무명의 젊은이는 우리 사회 ‘보통 사람들’에게 어느 순간 꿈의 메신저, 희망의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전직 환풍기 수리공이라지요? 그는 국민들의 막힌 속을 뻥 뚫어 주었습니다. 시원한 통풍창을 내주었습니다. ‘소통의 정치’를 목말라하는 국민들 가슴에 바람개비 같은 돌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나는 이 8개월간의 긴 장정을 ‘모두가 승리한 게임’으로 결론짓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1등 말고는 모두 패자처럼 돼 버리지만 이 게임에서는 누구 하나 진 사람이 없습니다. 이 게임에 참여한 모든 젊은이들은 그 도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준우승자인 존박에게는 벌써부터 광고 모델 제의가 빗발친다고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 공정한 한 표를 던짐으로써 ‘국민 참여 경선’의 모범 사례를 보여 준 134만 시청자들, 그들 역시 모두가 진정한 승자였습니다. 

  세상은 역시 아름답습니다. 꿈은, 그리고 희망은 살아 있습니다. 젊은 그대들이여, 누구를 탓하지 마십시오. ‘네가 문제고 그들이 잘못이고 사회가 부당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날씨 탓을 하며 움츠려 있지 말고 뛰쳐나가십시오. 높이 솟아오르고 쟁취하십시오.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순간 세상은 변화합니다. 꿈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면 그대도 제2, 제3의 허각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젊은 그대들에게 아직 희망이 열려 있는 기회의 나라입니다. 

  *P.S. 나는 음악을 잘 모릅니다. 더구나 요즘 가요의 빠른 리듬은 따라 하기조차 숨이 가쁩니다. 허각에 대해서도 까마득하게 몰랐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조차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그의 스토리가 소개된 기사를 읽고 난 뒤로는 이 청년의 기사를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들어본 적도 없는 그의 노래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나이를 잊고 세대를 초월해 마치 내가 젊은이가 되어 무대의 열기 속에 함께 어울려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듣는 것이 아닌 읽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그는 참 신비한 마력을 지닌 청년입니다. 이 당차고 싱싱한 청춘에게 거듭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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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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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데렐라 2010/10/26 0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데렐라는 신발(유리구두)를 신고 스타로 탄생했지만
    허각은 꿈을 품고 슈퍼스타로 등장했군요,

  2. 2010/10/26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걱! 헐!
    허각, 허공 위에 집을 짓다.

  3. 드리머 2010/10/26 0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꿈을 향한 슈팅
    김 코치 땡큐

  4. 모리 2010/10/26 1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차고 싱싱하기에 '젊음'이고 '청춘'이어라...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기를 활짝펴고 살 수 있는 취업시장을 만들어 주십시요.

  5. 레고박스 2010/10/26 1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끔 들어오게 되는 형오님 블로그에서 많은 롤모델을 접하게 됩니다.
    젊은 술탄의 패기, 열정의 사나이 허각, 칠레의 광부들 이야기..
    차갑고 냉철하게 무한경쟁으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젊은이 마음에
    따뜻한 녹차 한잔을 건네주는 것 같은 푸근함에 매료됩니다.
    저는 이곳이 뉴스나 신문보다 더 좋습니다.

  6. SISSY 2010/10/26 19: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특별히 좋아하는 것, 뛰어나게 잘하는 재주 하나 없이
    그럭저럭 살아온 내 인생을 반성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현재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항상 즐기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져도 될까....?

  7. 취중진담 2010/10/26 2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선에서 허각을 보고 비주얼(외모) 때문에 희생자가 될 걸로 짐작했었어요.
    처음엔 좀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고 할까나요?
    그는 자신의 욕심을 당당하게 내비치지도 못할 정도로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치 이 시대 88만원세대의 표상 같았다고나 할까요.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며 허각의 자신감도 점점 커지는 것 같았어요.

    보통 사람이 순수한 열정만으로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모습을 통해
    수많은 이 시대의 서민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8. 미스포터 2010/10/26 2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앞에 베테랑 뮤지션들도 날카로운 지적과 프로듀셔적인 안목을 새로이 재해석할수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 지도층도 실력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혜안을 가졌으면 합니다.
    안목을 새로이 재해석 하는 기회가 되셨기를..

  9. 대변인 2010/10/28 1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김황식 총리는 조계사에 들렀다가 허각, 존박이 누군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을 못하시더군요. 의장님께서 이곳에 포스트한 내용의 100분의 1만이라도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온 국민이 김 총리의 대중적 관심도에 깜짝 놀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텐데, 아쉬운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사회의 흐름에 늘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돌리는 의장님 멋있습니다.
    특히 남의 탓 하기 전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라는 말씀, 가슴에 확 와닿습니다.

  10. 예스아이캔 2010/10/30 15: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습니다, 허각은
    나도 할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우리 모두의 가슴에 다시금 일깨워 주었습니다.
    88세대는 이 젊은이처럼 88한 세대로 거듭나야 합니다.

  11. 드림드림드림 2010/11/07 0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타는 명멸합니다.
    준비된 스타 허각을
    반짝 스타로 지게 할지
    롱런 스타로 키울지는
    우리 모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대들은 그대들이 심고 키운 장미꽃에 대해
    책임질 자세가 되어 있나요?


 

국정감사, 이것만은 고칩시다.


국정감사가 끝났습니다.

그동안 의원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피감기관과 취재진도 수고 하셨습니다. 손꼽아보니 제가 맞이했던 국정감사가 횟수로만 19번째더군요. 그러나 국감이 끝날 때마다 뭔가 허전합니다. 언론의 "몰아치기 국감, 보여주기 국감"이라는 비판 때문만은 아닙니다. 매해 반복되는 국감 제도개선에 대한 본질적 문제를 남겨놓고 또 이대로 타성에 젖어 그냥 넘어 가야하나 하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2010국감]국정감사 마지막 날 국회 풍경 (뉴시스)

                             

국정의 핵심 사안을 놓고 치열한 논의가 전개되기 보다는 겉치레 국감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날밤을 새며 자료를 정리하고 새로운 대안도 제시하며 애쓴 의원들의 노력도 부각되지 못했습니다. 증인, 참고인과의 별 소득 없는 논쟁만이 오간 듯합니다. 피감기관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제대로 된 자료도 제출하지 않았고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내용 없는 호통도 여전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전 국감장에서는 별로 없었던 위험물,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이 증인(?)으로 등장해 보는 이들을 섬뜩하게 했습니다. TV를 통해 본 저도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국민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요? 제도를 개선해서 국감장을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서도 격조 있고 심도 있게 만들 방법은 없을까요?


지금과 같은 반짝 국감, 몰아치기 국감에 대한 개선 요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습니다. 지금의 제도는 20일이라는 기간 동안 5백 곳이 넘는 기관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살인적 일정에 질의시간은 고작 7~15분, 과연 올바른 국감이 진행될 수 있었을까요? 취재기자들도 매일 수백 건 이상 일제히 쏟아내는 의원들의 보도 자료를 꼼꼼히 챙길 수 없는 형편입니다. 피감기관 중 일부는 일 년에 한번 정도 겪는 연례행사나 불편한 신고식 정도로 생각하는 곳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국민의 대표 앞에서 오히려 큰소리치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국감, 수준 있는 토론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을지도 모릅니다. 국정감사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2010국감]국정감사 마지막날, 국회는 만원(뉴시스)


저는 대안으로 줄곧 상시국회, 상시국감을 주장해왔습니다. 물론 상시국회, 상시국감을 걱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지금도 괴로운데 상시국회를 하면 매일 국회로 불러들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상시국회, 상시국감이란 캘린더 국회를 뜻합니다. 연말에 내년도 달력이 나오듯 연간 의사일정이 예측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본회의는 언제 열고, 상임위원회는 언제 연다, 상임위별 감사는 언제 한다, 이렇게 말입니다. 장차관들도 매일같이 국회에 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선진국에서는 모두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정기국회는 예산국회입니다. 국민의 살림살이를 꼼꼼히 살피고 정부의 잘잘못을 따지고 난 후 예산안을 제때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국민이 국회를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국정감사가 늦게 끝나니 예산심의를 늦게 시작하게 되고 그러니 헌법에서 정한 예산처리기간도 노상 지키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 헌법도 법률도 지키지 못하면서 누구보고 지키라 하겠습니까? 그래서 정치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상시국회(상시국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이번 기회에 일하는 국회,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국회가 되도록 상시국회, 상시국감을 추진해야 합니다. 매년 반복되는 문제 있는 제도를 더 이상 방치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래야 국회도 정부도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본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제기하는 문제는 법률사항이어서 시간이 좀 걸린다면 이것 하나부터 좀 고쳐나갑시다. 이유야 있겠지만 이번 국감에서 보였던 소품 전시장 같은 모습만은 그만두었으면 합니다. 생물(동물이든 식물이든)이나 위험물질 같은 것은 사진이나, 동영상 등으로 충분히 자료화가 가능합니다. 상임위(국감장)의 이런 해프닝이 본회의장으로 전염될까 우려됩니다. 국민의 대표기관이라는 자부심은 진중한 행동, 절제된 언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의원들과 각 당 지도부가 결심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국감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 뜨거웠던 열정을 잠시 식혀서 국회를 차분하게 국정논의의 장으로 만들어갑시다. 현명하신 의원동지 여러분의 고견을 기대합니다.


2010.10.25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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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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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괜찮다 2010/10/25 09: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도 국회가 좀더 선진화되었으면 합니다. 다른 분야에 비해 국회가 많이 제도적으로 낙후되어 있습니다. 국민들 생각해서 이번에 한번 좋은 방햔 기대합니다.

  2. 모개 2010/10/27 2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정감사를 지켜보면 현 국정감사의 한계가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루에 한 두 기관씩,
    20여 명이 수십 개기관을 국정감사하는데 몇가지 사안 밖에는 질의가 안됩니다.
    올해는 더 부실했습니다.

    때로는 '죄송'을 연발하며 한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고
    태풍이 불땐 "수그리!!(경상도 방언입니다)" 하다가
    지나가면 끝나는 걸로 아는 건 아닌지.... 싶을 때도 더러 있습니다.


    상시국감, 꼭 관철하시기 바랍니다.

  3. 모리 2010/10/26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감장에 구렁이 들고 오고 인형들고 오고..
    참 남사시럽습디다.
    앞으론 모두 참고영상으로 대체하는것도 깔끔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디지털 국회 디지털 국회하면서 꼭 실물을 보여줘야 합니까?
    어차피 국민들은 방송매체로 접하는데 말이죠.

  4. BlogIcon 장석빈 2010/11/04 15: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일 반짝 하는 국정감사는 한계가 상당히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피감기관들은 오히려 큰 소리 치기에 바쁘고...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당연히 있습니다. 상시국감이 꼭 되었으면 합니다. ^^;

내 맘 속의 고향을 찾아
-사진으로 스케치한 아주 특별한 네팔 기행

<편집 노트>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며칠 전 (주)택산상역 우헌기 대표이사로부터 20여 컷의 사진을 메일로 받았습니다. 김 전 의장과 우헌기 대표는 대학 동문으로 지난 8월 이스탄불에도 함께 다녀온 오랜 친구 사이입니다. 김 전 의장은 친구가 보내온 사진들을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문가 수준의 퀄리티와 함께 거기 담긴 사람이며 풍광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 대표에게 캡션과 함께 짤막한 글을 부탁했습니다. 아래 글과 사진들이 그 결과물입니다. 신문으로 치면 특별 기고라고 할까요. 좋은 사진과 유려한 글 솜씨로 블로그를 빛내 주신 우헌기 대표님에게 감사드립니다.
※ 모든 사진은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우헌기 택산상역 대표이사는 '천년의 미소'라는 블로그(http://blog.naver.com/hgwoo0920) 아이디에 어울리는 인상을 갖고 있다. 신라 불상의 은근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사람과 풍경에 관심이 깊고 여행을 좋아하는 그의 어깨에는 늘 카메라가 매달려 있다. 빛나는 인문학적 지식과 통찰력으로 지인들을 감탄시키곤 한다. 보기와는 다르게 등산은 물론 스키, 스킨스쿠버다이빙, 빙벽 등반 등 다이내믹하면서도 익스트림한 취미를 갖고 있는 만능 레포츠맨이다.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매일매일 가슴 설레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영원한 청년이기도 하다.


추석 연휴를 이용해 네팔에 다녀왔다. 이번이 세 번째다. 그 중 두 번은 ‘랑탕국립공원’을 찾았다. 이번엔 트레킹만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그곳을 방문했다. 그곳에 사는 ‘따망족’들의 호흡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의 기억을 찾아, 향수를 달래기 위해, 사람도 자연도 너무나 변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현실의 고향이 아니라 ‘내 맘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고향’을 찾아 떠났다.
  따망 사람들은 오래 전에 티베트에서 넘어와 2000~3000m 고지대에 정착하여 어렵게 생활하는 소수 민족이다. 그들은 가파른 산 중간 중간에 있는 조금 평평한 곳에는 어김없이 계단식 논밭을 만들고 마을을 이루어 산다. 농토의 크기에 따라 몇 가구에서 몇 십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지금 그들이 사는 수준은 우리 어릴 때보다도 더 열악한 것 같다. 농토와 재배하는 곡식 종류가 한정되어 있어 식량도 풍부하지 않았다. 과일나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5년 전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 그곳은 마치 고향처럼 느껴졌다. 모든 모습이 너무 친근하고 편안해서 나는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여기서 한 서너 달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돌아왔다. 그곳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내 어릴 때 모습과 너무 유사했기 때문일까. 그곳의 모든 불편이 내게는 오히려 더 평화로웠다. 전기가 없는 그 마을 사람들은 해가 지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났다. 일상생활을 해와 더불어 시작하고 마무리했다. 땔감을 장만하는 모습이나, 꼴을 베는 풍경도 눈에 익다. 주변 환경도 우리와 유사한 것이 많다. 작은 정원에는 분꽃도 있고 무궁화도 있다. 쌀, 토란, 밀, 파, 배추, 감자, 고구마, 호박 등 그곳 사람들의 주요 먹을거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들이다. 그들은 빵과 커리와 기장죽을 곁들인 밥을 주로 먹는다. 향신료를 쓰지 않아 음식이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난 우리와 비슷한 외모, 해맑은 얼굴, 순박한 삶의 모습에서 어릴 적 우리 시골 사람들을 보았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가 지게로 짐을 나르는 것과는 달리 물건을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메고 다닌다. 짐승 털로 만든 외투는 매우 무겁다. 비가 올 때는 우비 역할도 한다.

이곳 사람들은 보통 머리에 뭔가를 쓰고 있다.
어른들은 모자를 쓰고, 어린이들은  이 아이처럼 머리에 수건을 두르기도 한다.

카트만두에 사는 어린이들.
때깔도 다르고 생긴 모습도 많이 다르다. 카트만두에선 중동 사람, 인도 사람 등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카트만두 시 동네 어귀에 있는 힌두교 신 앞에 선 어린이.

제대로 씻지도 못한 얼굴, 땟국 물이 흐르는 옷 등 어릴 시절 나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으리라.

길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부드러운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풀 뜯는 소가 내는 워낭 소리다. 스위스 관광 상품인 소 방울 소리보다 훨씬 부드럽다. 주변을 둘러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소를 돌보고 있다.
이 할아버지의 복장이 전통 의상이다. 모자는 안 쓰고 있지만 허리에 두꺼운 띠를 두르고, 큰 칼을 차고 다닌다. 사냥용은 아니고 길 가다 방해가 되는 풀이나 나무를 만나면 베는 데 사용한다. 소꼴을 벨 때도 이 칼을 쓴다. 낫을 사용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사진 찍기 좋도록 포즈를 잡아주고 혹시 안약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감기약 등 비상약은 가지고 다니지만 안약을 준비하지 못해 미안했다. 다음에는 그런 약도 좀 준비해야겠다. 단, 의사의 처방이 없어도 되는 약으로.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직녀.
이 여인의 의복(모자, 허리띠)이 따망족들의 전통 복장이다.

머리에 짐을 매달고 길 가던 여인을 카메라에 담았다.
등 뒤에 매단 짐이 아니라면 머리띠로 착각했을 것 같다.

가뜨랑에서 만난 전통 모자를 쓴 할머니.
이 할머니가 한 전통 귀걸이가 매우 큼지막하다.
모델이 돼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바나나 두 송이를 드렸더니 답례로 구운 옥수수 몇 개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풀 베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잠시 부탁하여 찍은 사진이다.
이곳 사람들은 대체로 사진 찍자는 요구에 잘 응해준다. 가끔은 피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먼저 찍은 사람들을 모니터로 보여주면 십중팔구는 응해준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사진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는데 답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카트만두에 있는 여행사로 보내면 그 사진을 다시 가는 포터 편에 보내줄 수 있다. 여행 도중에 만난 한 오지 여행가는 내게 사진을 찍었으면 반드시 인화해서 보내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자기는 즉석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거나, 작은 인화기를 휴대해 현장에서 현상해 준다고 했다. 이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진을 꼭 보내 줘야겠다.

허름한 집들 사이로 멀리 어린이와 개가 보인다.
막 ‘응가’를 마친 어린이, 그걸 먹어치운 개다. 여기에선 익숙한 광경이다.

전통 복장을 한 15세 소녀. 수줍은 듯, 우수에 잠긴 듯한 표정이 눈에 밟힌다.
옷이 유난히 깨끗하다. 이렇게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그런 산골에서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 소녀는 지나는 여행객들에게 음식을 파는 식당 집 안주인의 여동생이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곳에 사는 것 같진 않았다. 아마 카트만두에서 언니 집에 다니러 온 모양이다.

가뜨랑에서 나따리 온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식당에서 만난 전통 복장을 한 자매. 왼쪽이 언니(식당 집 안주인)다.

키질하는 여인. 전통 복장(모자, 조끼, 허리띠, 치마) 차림이다.
치마는 수를 놓은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 앞뒤로 둘러 입는다. 우리가 치마 위에 앞치마를 두르듯 앞, 뒤 치마를 치마 위에 두른다.

짐을 지고 지나가다 잠깐 쉬고 있는 동네 사람.
이들은 이렇게 등짐을 지고 산길로 물자를 나르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마다 짐꾼들이 쉴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두었다. 짐을 쉽게 내리고 다시 질 수 있도록 돌로 단을 만들어 두었다. 인가 없는 곳에서 밤을 새워야 할 사람들을 위해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간이 가옥도 있다.

길을 가던 두 사람.
짐승 털로 만든 외투를 입은 이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 짐을 지고 우산을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비가 올 때는 그대로 비를 맞는다. 겉옷이 충분히 우의 역할을 한다. 허리띠가 이색적이다. 이들은 짐을 지고 산길을 가면서도 샌들을 신고 다닌다.


다른 동네로 일보러 가는 여인.
샌들을 신고 있다. 머릿수건, 허리 띠, 앞치마 등 전통 복장 차림이다.

여인들은 귀걸이, 목걸이 등 장신구를 좋아한다.
어린이나 어른, 노인 모두 마찬가지다.

눈에 익숙한 모습이다. 코를 흘리는 저 어린이.
내 시계가 5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이곳 사람들의 집. 2층 구조다.
아래층은 축사나 창고로 사용하고 위층에 사람이 거주한다.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려 습기를 피하려고 그럴 것이다. 돌을 쌓아 벽을 만들고, 지붕에는 돌을 얹은 너와집이다. 창틀은 장식을 했다. 가파르고 좁은 사다리 계단이 어린들이 오르내리기에는 위험해 보인다.

마을길과 가옥들. 집 크기나 모양이 모두 닮은꼴이다.
다락 밑으로 송아지가 보인다. 집 앞에 조그마한 채소밭도 가꾸고 있다.

굴뚝이 없다. 부엌이 집안에 있고 연기는 그냥 지붕이나 벽에 난 구멍을 통해 나간다. 지붕을 덮고 있는 것은 안개가 아닌 연기다.
이곳 사람들은 밥을 지을 때 발생하는 열을 왜 난방으로 사용하지 않을까?

학교를 잠시 쉬고 세계 여행 중인 네덜란드 대학생 두 명을 안내하던, 영어가 완벽한 여행 가이드. 식견도 풍부했다. 자기 조국의 앞날에 대한 희망과 걱정도 많았다. 이야기 끝에 그 많은 아이디어와 식견으로 네팔의 발전에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자기가 관광장관이 되면 뜻을 펼칠 수 있다고 했다. 물어보니 자기는 왕손이란다. 어디서 영어를 배웠는지는 물어보지 못 했지만, 유학을 했거나 외국인 학교에 다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반쯤 졸고 있는 아기를 등에 업고 있는 어린이.
우리 어렸을 적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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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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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마일 2010/10/21 17: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느낌이 풍부한 사진들입니다.
    이례적으로 이웃에게 블로깅을 허락했군요.
    이 블로그의 열린 정신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김형오 의장님과 우헌기 사장님의 우정도
    참 부럽고 보기 좋습니다.

  2. BlogIcon 마리오카트만두 2010/10/22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팔 한번 가보고 싶네요.
    정말 멋진 풍경입니다.
    산을 배경으로 키질을 하는 여인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네요.

  3. 나는야언제나술래 2010/10/22 1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를 찾는 숨바꼭질,
    여행이란 역시 그런 것인가 봅니다.

  4. 타임머신 2010/10/24 0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땐 그랬지, 우리도 이랬었지,
    그런 생각과 감동 속에서 잘 보고 갑니다.

  5. 모리 2010/10/26 19: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하하 코흘리개 녀석 귀엽군요.
    옛생각이 모락모락 납니다.
    우리나라도 가난할때 열심히 살아보자 그렇게 애썼는데
    지금은 자살율도 높고.. 풍요속의 빈곤인건가요..
    괜시리 마음이 쨘해집니다.

  6. 최은희 2012/02/03 0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양지회보에서 읽고 여기와서 사진까지 보고갑니다. 평화로움이 가득하네요. 사막의 마라톤을 원본을 읽고 싶어서 왔는데.. 어디 있는지 찾아봐야겠네요.

‘기적’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어떤 소설, 어떤 영화나 드라마가 이보다 더 감동적이고 손에 땀을 쥐게 할까요? 칠레에서 생중계된 기적의 드라마, 희망의 시네마가 지구촌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21세기 가장 인간미 넘치는 한 편의 휴먼 다큐멘터리가 절망과 상심을 순식간에 기쁨 가득한 축제로 바꾸었습니다. 환희에 찬 샴페인을 터뜨리게 했습니다. 국정감사 때문에 남미를 순방하고 있는 나도 현지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시시각각 전해지는 뉴스를 접하며 박수를 치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구조용 캡슐 ‘피닉스’를 타고 33명의 ‘불사조’들이 무사 귀환할 때마다 달려가 손을 잡아 주고 싶었습니다.


칠레 국민을 비롯한 온 인류의 간절한 염원이 절망의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던져 희망의 생수를 길어 올렸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극한 상황을 이겨낸 33명의 광부와 그 가족, 미증유의 재난을 국민 통합과 단결로 승화시킨 칠레 정부, 한 마음 한 뜻으로 무사 생환을 기원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전 세계인의 인류애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일궈내지 못했을 고결한 인간 승리입니다. 비좁고 어두운 갱도 안은 지금까지 어떤 정부나 조직에서도 구성해 본 적이 없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사회 공동체’였습니다.

두 번째로 구조돼 나온 마리오 세풀베다가 던진 한 마디가 심금을 두드립니다. “신과 악마가 지하에서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공포와 싸우며 언제 올지 모를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던 그들의 심경을 그 이상 더 적절하게 표현할 말이 또 있을까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결국 그들은 악마를 물리치고 신의 손을 잡았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습니다.

햇살 아래로 나온 33명의 광부들, 그들의 검은 얼굴은 모두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캄캄한 지하에서 69일 동안 그들이 캐 올린 것은 희망과 신뢰, 용기와 도전, 그리고 인간의 존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이란 희망과 이음동의어입니다. 까마득한 지하, 캄캄한 갱도 안에 환한 등불을 밝혀 준 것은 다름 아닌 ‘희망’이었습니다.

참치 두 스푼, 우유 반 컵, 비스킷 몇 조각으로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낳은 것은 나보다 남을 먼저 위하고 생각하는 따뜻한 ‘배려’였습니다.

역시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도, 무너져 내린 삼풍백화점 콘크리트 더미 아래서도, 아이티 지진 참사 현장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아름답게 하고 존엄하게 하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보았습니다.

빛나는 리더십과 끈끈한 동료애, 아름다운 희생정신은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던 칠레에 화합과 소통이라는 큰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33명의 ‘나’가 ‘우리’로 뭉쳤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역과 이념 그리고 세대 간의 불협화음이 깊어지고 있는 우리도 이 사례를 귀감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한 번 기적의 불사조들에게 뜨거운 박수와 찬사를 보냅니다. 당신들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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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러클 2010/10/19 1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정감사로 남미를 순방 중이신 와중에 보내 주신 한 편의 글이 우리 가슴을 감동으로 물들였습니다. 신문에서, 텔레비전에서 읽고 보며 느꼈던 감격이 이 글을 읽으면서 더욱 증폭되어 다가옵니다. 역시 인간만이 희망입니다. 사랑과 기적 그리고 희망을 캐어 올린 칠레의 검은 영웅들, 만세!!!

  2. 팔레 2010/10/19 14: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드라마 어떤 영화도
    역시 헌실보다는
    극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정말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3. 러브러브 2010/10/20 0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난을 극복하는 인간의 의지,
    거기에는 사랑과 희망이 키워드였습니다.

  4. 살아야 하는 이유 2010/10/20 0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아야 하는 이유를 느낄 수 있었던 감동적 드라마였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숭고한 가치를 보여준 그들에게 다시한번 박수를 보냅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의미를 다시 일깨워준 김형오의원께도 고맙다고 전하고싶네요. 우리 항상 열심히 삽시다.

  5. 쏘시오 2010/10/20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원님이 칠레 인근 남미에 계셔서였을까요. 글을 읽고 나니 '칠레의 기적'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아니, 화면으로, 사진으로 표현된 것 보다 훨씬 더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미문에 항상 감탄하는 바이지만, 그 수려함에 덧붙여 진심은 더욱 배가돼 전달됩니다. 그대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배달부이십니다.

    • 프레드 2010/10/20 1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편 배달부는 벨을 두 번 누릅니다.
      한 번은 동감으로, 또 한 번은 감동으로.

    • 틴틴파이브 2010/10/22 1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는 몇 번인가.
      나는 수첩에서 그대 이름을 찾는다.

  6. 희망은힘이세다 2010/10/24 0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비극을 해피엔딩하게 하는
    희망이야말로 얼마나 힘이 센 존재인가.

  7. 밤톨 2010/10/26 1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장님은 감수성이 남다르신듯 합니다 ㅎㅎㅎ
    눈물도 많으시고 그리 마음이 여리셔서 어찌합니까

  8. 해뜰날 2010/11/15 0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는 바다에서, 산에서 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700미터 막장, 절망 속에서 태양은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9
                              - 해상 전투의 현장에서


  2차 대전의 명장 *조지 스미스 패튼이 만약 정복자 메메드 2세를 평했더라면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패튼은 “군인이 소유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철저하고 완전하며 거만한 자신감”이란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술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감, 그것도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완전무장한 신념의 사나이가 바로 술탄 메메드 2세였습니다.

  *1885~1945년.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맹활약한 미국의 육군 장군. 북프랑스에서는 하루에 110킬로미터를 진격했을 만큼 저돌적인 작전과 무자비한 욕설로 유명했다. 멕시코 원정 당시에는 반란군 지휘소를 기습, 장군을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보닛에 매달고 개선했다. 줄담배에 진주로 장식한 권총을 차고 호통과 엄격한 규율로 병사들을 통제했지만 병사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그를 더 존경했다. 패튼은 늘 자신만만했다. 스스로를 연합군 최고의 야전 사령관이라고 굳게 믿었다. 패튼의 모토는 오직 진군뿐, 방어란 말은 그의 사전에 없었다.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톱카프 궁전 전망대에서 찍은 바다 사진. 저기가 바로 내가 탐사할 해상 전투의 현장이다! 내 마음은 벌써 바다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는 저 하얀 배 위에 탑승해 있었다.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던가요?
 “우리는 바다에서, 해변에서, 상륙지 들판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적과 싸울 것이다.”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모두 동원한 총력전을 펼칠 거란 의미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술탄의 자세와 각오도 처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강렬했습니다. 육상·해상·공중전(불화살과 대포알이 허공을 날아다녔으니까요)은 물론, 4편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선 지하(도성 침투용 땅굴) 전투까지 치렀으니까 말입니다.

▲ 지대가 높아(해발 267미터) 도시 전체를 조감도처럼 실감나게 전망할 수 있는 참르자(소나무 언덕)에서 내려다본 보스포루스 해협 일대. 해협 위 오른쪽이 유럽이고 아래쪽이 아시아다. 왼쪽 소나무 숲 너머로 보이는 아시아 연안 동네인 위스크다르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군인들이 *같은 제목의 노래를 즐겨 부르고 미국의 흑인 여가수 어사 키트가 터키어로 리메이크하는 등 국내외 여러 가수가 부르면서 우리 귀에도 익숙해진 지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위스크다르(우스크다라) 머나먼 길 찾아왔더니…”로 시작되는 노랫말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제목은 <캬팁>인데 ‘캬팁’은 하급 공무원을 일컫는 말. 위스크다르에 살고 있는 아가씨가 공무원 총각을 사모하는 내용이 담긴 애틋한 연가이다. 노래하는 사람 기분에 따라 빠르게 부르면 흥이 나고 느리게 부르면 애잔한 곡조가 되는 묘한 매력을 지닌 터키 전통 민요이다.

  육상 전투는 이미 서술했으니 오늘은 전편에서 말씀드린 대로 해상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 전에 잠깐, 왜 그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외교적인 배경을 더듬어 볼까요?

  *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연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입니다. 1453년 전쟁에도 그 이면에는 정치적·외교적·종교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읽히고 설켜 있었습니다.

  *1780~1831년. 독일 태생으로 열두 살에 입대해 사관학교에서 병학(兵學)을 공부했다. 프랑스 혁명 때는 프로이센 왕국의 사관으로 활약했으나 예나의 패전 이후 러시아군에 투항, 나폴레옹으로부터의 해방 전쟁에 진력했다. “전쟁은 외교의 연장”이란 자신의 말을 증명 혹은 실천이라도 하듯 1815년 프로이센으로 복귀해 군사학자 및 참모장 등을 지냈지만 콜레라에 걸려 급사했다. 사후에 출간된 『전쟁론』은 이 분야의 손꼽히는 고전.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는 별개로 계속되는 정치적 행위이며 도구일 뿐”이라는 전쟁 철학을 갖고 있었다.

  황제 역시 비잔틴 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외교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스만의 술탄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루멜리 히사르를 세우면서 해상 통제권을 장악하고 제국의 목을 조여오자 유럽은 아연 긴장합니다. “아직 어린 술탄”이라는 느긋한 평가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메메드 2세”로 인식이 급변합니다. 힘없는 황제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외교에 매달립니다. 도성 시민과 성직자들이 굴욕감을 느끼며 반대하던 동서 교회의 통합마저도 받아들일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유럽 각국은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강 건너 불 보듯하는 안이한 상황 인식과 무관심, 각 나라를 연결하고 이끌 리더십의 부재 등으로 황제의 사절들은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교황과 베니스의 미미하고도 형식적인 지원, 제노아 군인 주스티니아니가 이끌고 온 700명의 용병, 그게 전부였습니다.

▲ 카슴파샤 인근 수상 레스토랑에서 찍은 골든혼 풍경. 이 만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봉쇄 사슬이란 장애물을 선박의 육상 이동이라는 기발한 방법으로 돌파한 술탄의 해군과 비잔틴의 다국적 해군이 1453년 4월 28일, 드라마틱한 해상 전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콘스탄티노플 도성 시민들은 맞은편 언덕에서 전쟁에 패한 자국의 병사들이 공개 처형 당하는 장면을 눈물로 지켜보았으리라. 그날의 격전과 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유람선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운명’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혼신의 힘을 쏟아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이 자기 편을 들어 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황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쩌면 1100년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그와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결코 피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고 매순간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비장하게 맞섰습니다. 마지막이란 걸 알면서도 여러 차례의 항복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구차하게 사는 대신 아름답게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양쪽 무두가 펼친 치열한 첩보전과 심리전 속에서 술탄은 현명하게도 비잔틴 쪽의 역정보, 허위 사실 등에 결코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서방 국가들의 지원이나 개입이 지지부진할 거란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육로로 지원군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기독교 국가였던 헝가리와는 동맹 조약을 맺어 예방 조치를 해놓았습니다. 갈라타에 거주하던 제노아 사람들에게도 압력을 넣어 그들이 비잔틴 제국을 돕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압력을 받은 세르비아는 오스만 군의 선봉에 서서 도성을 공격했습니다. 술탄은 그렇게 힘의 외교로 이웃 나라들의 손발을 묶고, 스파이를 활용해 도성 안의 민심을 흔들었습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나와 함께 종군 기자가 되어 배를 타고 해상 전투, 그 격전의 현장으로 떠나 볼까요?

▲ 자, 이제 출항이다! 나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단단히 끼고 썼다. 이 선글라스를 통해 보면 마술처럼 1453년 당시의 해상 전투가 눈앞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우리 일행을 태운 배가 바다를 종횡 무진하던 날은 날씨가 무척 맑았습니다. 하늘도 바다 빛깔이었지요. 그러나 육지에서 볼 때의 바다와 배 위에서의 바다는 느낌이 전혀 달랐습니다. 훨씬 더 광활하게 다가왔습니다.

  32킬로미터에 이르는 길고 좁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흘러갑니다.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바다의 윗물과 아랫물이 교차해 흐릅니다. 윗물은 흑해에서 마르마라 해 쪽으로, 아랫물은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 쪽으로 그렇게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생성 이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빙기에 빙하가 녹으면서 원래는 호수 상태였던 흑해의 얼음물이 빠져나가면서 지표면을 침식시켜 생긴 해협이란 의견, 또 하나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 간에 급격한 지각 변동으로 깊은 틈이 벌어지며 생긴 해협이란 견해다. 종이를 양손으로 잡아당기면 찢긴 부분은 들쑥날쑥하지만 맞대면 원래 모습이 되듯이, 해협 역시 들쑥날쑥 분리된 모습처럼 보이지만 보스포루스 물을 모두 빼낸 다음 양쪽 해안을 맞대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는 주장이다. 이별할 때 반으로 쪼개어 둘이 하나씩 나눠 가졌던 연인들의 거울처럼….

  염도 높은 지중해 물(아랫물)과 염도 낮은 흑해 물(윗물)이 몸을 뒤섞으며 남북으로 서로 엇갈려 흐르기 때문일까요? 보스포루스는 유속이 매우 빠르고 물살이 거세어서 뱃길이 결코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해풍도 모자를 빼앗아 갈 듯 세차게 불어 턱 끈을 단단히 조여야 했습니다. 게다가 급커브 길이 많고 안개도 짙게 끼어 이 지역에선 *해상 사고가 심심찮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에도 그런 사고들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유조선끼리 충돌해 폭발하면서 주위의 석유 저장고까지 폭발시켜 보스포루스 전체가 불타는 느낌이었던 일, 모터보트끼리 부딪쳐 승객 열세 명이 어두운 바다 속으로 사라진 일, 짙은 안개 속을 항해하던 화물선이 보스포루스 해안에서 10미터쯤 육지로 올라가 단숨에 바닷가 목조 저택 두 채를 무너뜨리고는 세 명을 즉사시킨 뒤 3층 거실로 머리를 처박고 들어온 일 등등.


▲ 크루즈 선장은 일반 관광객들의 유람 코스와는 사뭇 다른 내 주문을 소화해 내느라 고생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름다운 풍광보다는 해상 전투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선장은 그래서 난감한 표정으로 더러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형 크루즈 선들의 출입 금지 구역까지 거센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항해술이 노련한 베테랑 선장이었지만, 배가 뒤집힐 듯 기우뚱거리고 물살이 뱃전으로 쳐들어올 때는 바닷가 출신인 나도 조금은 불안했다. 지금도 고마운 건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선장이 해류와 해풍 등 주로 1453년 4월과 5월에 치러졌던 해상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해댄 나에게 무뚝뚝하지만 친절하게 상세한 답변을 해주었다는 점이다. 해전 당시 술탄의 함대에 합류했더라면 혁혁한 공을 세웠을 것 같은 선장이다.

  그러나 이런 해상 사고는 전쟁과 비교하면 견줄 바가 못 됩니다. 1453년에는 이 일대 바다가 온통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 최강 해군과 전함은 모두 해양 도시 국가인 베니스의 차지였습니다. 베니스는 자국의 이익이 걸린  이 싸움에서 비잔틴 제국을 돕기 위해 자금 및 식량 지원과 함께 함대를 출동시켰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러 있던 베니스 선박들도 전함으로 개조되어 전력에 힘을 보탰습니다. 오스만 군의 포위전이 시작되었을 때 전투 장비를 갖추고 골든혼 봉쇄 사슬 안에 머물러 있던 선박 수는 모두 26척이었습니다. 골든혼 해역, 특히 방재 구역의 지휘권은 제노아 공병 출신 바르톨로메오 솔리고가 쥐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페라 지역을 관리하는 제노아 인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그에게 골든혼의 지휘권을 맡긴 것 같습니다.

▲ 베니스의 조선소에서 배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인부들과 기술자들. 제노아와 함께 오리엔트 무역을 양분하고 있던 당시의 베니스는 상선을 비롯해 군사용 함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냈으므로 조선 기술이 굉장히 발달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가브리엘레 트레비사노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같은 베니스 선장인 알비소 디에도 역시 끝까지 남아서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해 황제를 기쁘게 했습니다. 해군의 전투력과 항해술, 실전 경험만큼은 비잔틴이 오스만보다 우세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을 위해 싸운 베니스 선장 출신 해군 제독. 4월 20일 해전 당시 야음을 틈타 골든혼의 쇠사슬을 살며시 풀고 요란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3척의 베니스 갤리선을 끌고 나와 오스만 군을 혼란스럽게 한 뒤 아군의 배들을 안전하게 골든혼 쪽으로 인도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4월 28일 기습 공격전에선 총지휘를 맡아 베니스 갤리선 2척을 몰고 골든혼 안쪽으로 쳐들어갔지만 사전 기밀 누설로 실패, 근근이 목숨만 구해서 돌아왔다.


  때문에 술탄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를 퍼부어 해군력의 약세를 만회하려고 전함을 대폭 보강해 해전 경험이 풍부한 발토글루 제독이 이끄는 *대규모 함대 1453년 3월 말경 마르마라 바다에 집결시켰습니다. 선박 수로는 비잔틴 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13세기 초 십자군이 그랬듯이 함대를 골든혼 안으로 들여보내 그쪽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성으로 진입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골든혼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막강한 봉쇄용 철제 사슬이었습니다. 이 쇠사슬은 그 전부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도성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3단 갤리선, 2단 갤리선, 노 딸린 갤리선, 푸스테(기동력이 뛰어난 가볍고 긴 배), 파란다리아(운송용 바지선), 쌍돛배, 외돛배, 소형 연락선 등으로 구성. 선원과 노잡이는 용병이 대다수였지만 죄수와 노예들도 섞여 있었다. 해군의 전투력 보강을 위해 술탄은 1452년 겨울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적의 전함과 병참 기술도 필요하다면 즉각 도입했다. 함대의 총 규모는 140척부터 480척까지 문헌마다 견해가 제각각이다.



▲ 15세기와 16세기 무렵 지중해를 항해하던 군사용 선박. 노를 저어 움직이는 갤리선에 커다란 삼각돛을 달아 속도와 기동력이 매우 뛰어났다. 베니스는 전투용인 경(輕)갤리선과 수송용인 중(重)갤리선을 건조, 최강의 해상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지중해 각국에선 죄수를 강제 동원해 전투용 갤리선의 노를 젓게 하는 일이 오래도록 성행했다.

  1453년 4월 12일, 발토글루는 증원군인 흑해 함대가 도착하자마자 큰 배들을 쇠사슬이 막아선 골든혼 입구 쪽으로 출동시켰습니다. 화살이 빗발치고 대포들이 불을 뿜었습니다. 불 붙은 나뭇조각들이 비잔틴 배를 향해 날아가는 가운데 오스만 군 일부는 닻줄을 끊고 쇠갈고리와 사다리를 붙잡은 채 배에 기어오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각도가 엇나간 포탄도 비잔틴 군의 키 큰 갤리선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는 해군 제독 *루카스 노타라스 대공(大公)의 증원 함대까지 파견돼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 군은 결집된 조직력으로 높이가 낮은 오스만 군의 배 안으로 창과 화살과 투석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발토글루는 후퇴 명령을 내려야 했습니다.

  *종교 통합에 있어서는 황제의 반대편에 섰던 비잔틴 제국의 종교 지도자. 하지만 전쟁 당시에는 골든혼 쪽 성곽 방어의 총책임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도성 함락 이후 술탄이 중용하려 했지만 처자와 함께 죽음을 택함으로써 명예를 지켰다.


  이 패배에 모욕감을 느낀 술탄은 며칠 뒤 탄도가 높아진 개량 대포를 갈라타 곶 바로 건너편에 배치하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첫 포탄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 포탄이 갤리선에 명중해 배를 침몰시키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비잔틴 군의 배들은 페라 성벽을 보호막 삼아 봉쇄 사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오스만 군의 집요한 해상 공격은 비잔틴 군의 육상 방어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육지 성벽에 투입됐던 수비군을 골든혼 방어를 위한 지원군으로 분산 배치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1453년 4월 20일 아침, 교황이 무기와 식량을 가득 실어 보낸  제노아 갤리선들과 옥수수를 선적한 비잔틴 대형 수송선이 남풍을 타고 마르마라 해역으로 재빨리 접어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술탄은 해군 제독 발토글루에게 배들을 나포하되 여의치 않으면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임무를 완수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라는 엄포도 덧붙였습니다. 발토글루는 곧바로 대함대를 이끌고 몇 척 안 되는 만만한(?) 먹이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해풍이 드센 거친 바다에서 단련된 비잔틴 군의 함대를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술탄의 해군은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4척에 불과한 기독교 군 함대에게 100척이 넘는 오스만 해군이 참패하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발생했을까요?

▲ “술탄은 왜 격전이 치러지고 있는 바다로 뛰어들었을까? 그것도 배가 아닌 백마를 타고….” 그런 캡션과 함께 6편 맨 마지막에 올렸던 사진이다. 짐작했겠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격상 멀리서 명령만 내린 채 지켜보고만 있을 술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함대가 고작 4척뿐인 적의 배를 앞에 두고 고전을 면치 못하자 속이 탄 술탄은 싸움에 가담이라도 할 것처럼 관복이 물에 젖는 줄도 모른 채 말의 다리가 허용하는 깊이까지 직접 말을 몰고 바다로 뛰어들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해전을 진두지휘했다.

  그날의 바다는 보스포루스 해류와는 정반대로 역풍이 몰아쳐서 물살이 무척 드세고 거칠었습니다. 오스만 해군은 갤리선을 조종하느라 애를 먹은 반면 비잔틴 해군의 배는 선체가 높고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집중 공격을 하기에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비잔틴 배들은 오스만 배들을 줄곧 따돌리며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아크로폴리스 아래 지점을 막 돌아 골든혼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갑자기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배의 돛들이 힘을 잃었습니다. 물살의 한 지류가 남쪽의 보스포루스 해협 쪽으로 급류하다가 여기서 만나 북쪽의 갈라타 해안 쪽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지점입니다. 그런 만큼 물살의 끌어당기는 힘이 남풍 뒤엔 특별히 더 강해져 비잔틴 배들은 그만 거기에서 거미줄에 걸린 곤충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발토글루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형 선박들로 비잔틴 배들을 에워쌌습니다. 그러나 배 위에서 쏘는 경(輕)대포로는 앙각(仰角-올려다본 각도)을 맞추기 힘들었습니다. 발토글루는 자신이 탄 3단 노 갤리선의 앞머리로 비잔틴 수송선의 선미루(船尾樓-배의 고물에 만들어 놓은 선루)를 들이받으며 병사들로 하여금 적군 배들로 쳐들어 올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얼핏 비잔틴 배들이 수많은 오스만 배들에게 일방적으로 포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상황은 딴판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준비된 제노아의 해군 병사들이 물통으로는 불을 끄면서 도끼를 휘둘러 배에 올라오려는 적군의 손과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찍었습니다. 비장의 병기인 ‘그리스의 화염’(4편 참고) 또한 눈부신 활약을 했음은 물론입니다.
  오스만 군은 노 때문에도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배들끼리 노가 서로 뒤엉키는가 하면 공격을 받아 부러져 나가는 노도 많았습니다.
  전투는 비잔틴 수송선을 둘러싸고 가장 불꽃이 튀었습니다. 3척의 제노아 갤리선은 수송선이 곤경에 빠지자 일제히 힘을 합해 수송선에 찰싹 달라붙었습니다. 마치 네 개의 웅장한 요새가 탑을 치켜올리고 오스만 함대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모양새였습니다.
  오스만 배들은 선해전술(船海戰術)이라도 쓰듯이 막대한 타격을 입으면서도 끊임없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위기의 순간, 그러나 해풍은 비잔틴 군 편이었습니다. 해가 지면서 돌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세찬 북풍이 휘몰아치자 비잔틴 배들은 돛을 한껏 팽창시키고는 오스만 배들의 포위망을 뚫고서 골든혼 쪽으로 질주했습니다. 어둠도 비잔틴 군 편이었습니다. 피아조차 식별 못하는 짙은 어둠 속에서 비잔틴 배들은 아군의 엄호 아래 잠깐 열린 쇠사슬을 넘어 의기양양하게 골든혼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계속된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해전은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발생시켰습니다. 비잔틴 군은  ‘적군은 1만 명 넘는 사망자를 낸 반면 우리는 며칠 뒤에 죽은 두세 명의 부상병을 제외하면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내지 않았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후세의 사학자들은  상당히 과장된 통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처절한 전투로 인해 그 일대 바다가 며칠 동안이나 피로 물들었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원군의 배들이 무사히 도착해 합류함으로써 비잔틴 군은 병력은 물론 무기와 식량까지 늘리게 되었습니다.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도 다시 지펴졌습니다.

▲ 해상 전투 장면을 묘사한 세밀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의 방향이 제각각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런 기본 개념조차 염두에 두지 않고 그린 걸까? 아니면 바다에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상태? 그래도 활과 화살, 창과 칼, 소총과 대포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의 긴박했던 전투 상황을 읽을 수 있다.

  해전에서의 거듭된 패배는 오스만 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술탄은  *발토글루를 비겁자며 배신자라고 몰아세우면서 당장 목을 베려 했지만 부하들의 간청으로 겨우 목숨만은 살려 두고, 자신의 측근 함자 베이를 새로운 해군 제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익히 아시다시피 배들을 육로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골든혼 진입에 성공했습니다.(6편 참고)

  *불가리아 태생의 배교자.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발토글루는 오스만의 해군 제독이 되어 기독교 군과 싸웠다. 아군의 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눈까지 심하게 다쳐가며 술탄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패전의 대가는 혹독했다. 간신히 참수형을 면했으나 직책은 물론 사유재산을 모두 박탈당한 채 곤장까지 맞는 형벌을 받았다. 술탄에게 버림받은 뒤로는 무명인이 되어 가난하게 살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물고 물리는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졸지에 골든혼을 장악당할 위기에 처한 비잔틴 황제는 6편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비상 대책 회의를 열어 밤중에 몰래 오스만 함대에 접근해 배들을 불태워 버릴 기습 작전 계획을 짭니다. 또 한 차례의 대규모 해상 전투가 이번에는 골든혼을 무대로 벌어지게 된 겁니다. 그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해 볼까요?

  최초의 예정일(디데이)보다 4일 늦은 4월 28일, 동이 트기 두 시간 전쯤 트레비사노가 직접 지휘를 맡은 베니스 갤리선 2척의 호위 아래 단단히 무장한 비잔틴 군의 대형 수송선 2척(한 척은 베니스 배, 다른 한 척은 제노아 배)이 페라 성벽의 보호 구역을 살그머니 빠져 나왔습니다. 갤리선 후미로는 트레비존드에서 온 자코모 코코 선장이 이끄는 3척의 푸스테와 가연성 물질을 실은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이 조용히 뒤를 따랐습니다. 이제는 적들의 배를 불바다로 만들 순간이 다가왔다면서 행동 개시를 하려는 순간, 아뿔싸, 해안가에 묵묵히 있던 오스만의 대포가 잠든 바다를 깨우는 굉음과 함께 불을 뿜으면서 선제 공격을 해왔습니다. 동참하기로 한 제노아 인들의 선박이 준비되지 않아 거사가 연기되는 사이에 기밀이 새나가 오히려 오스만의 역공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페라의 탑에서 비치는 불빛을 조명탄 삼아 오스만의 대포들은 목표물을 조준해 줄기차게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수많은 배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돌격 대장 역할을 맡았던 코코 선장은 용맹무쌍하게 앞장서 싸우다가 포탄을 맞고 침몰한 푸스테와 장렬하게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트레비사노도 갤리선을 버리고 선원들과 함께 구명보트로 옮겨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해안까지 헤엄쳐 나온 비잔틴 병사들은 도성 시민들에게 잘 보일 만한 공개된 장소에서 모두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술탄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육로를 통한 선박의 골든혼 진입에 이은 이 해전의 승리로 그는 더욱 확고한 해상 통제와 더불어 성벽 돌파를 위한 강력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 원근법과 음영을 무시하고 그린 이슬람 세밀화. 화가가 달라도 화풍이 같아 누구 작품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무표정한 얼굴들이 쌍둥이 형제들처럼 닮은꼴이다. 범선이 육지로 달리는가 하면, 백마를 탄 술탄은 활과 화살로 무장한 채 바다로 뛰어들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담긴 ‘1페이지 그림책’을 해독이 까다로운 암호를 풀 듯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상상력이 자유자재로 발동한다.

  전세는 점점 비잔틴 제국에 불리해져 갔습니다. 1453년 5월 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다리다 지쳐 베니스 함대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면서 쌍돛 범선 한 척을 오스만 해군 몰래 파견했습니다. 투르크군으로 위장한 12명의 자원병이 오스만 깃발을 꽂은 그 배를 타고 성공적으로 골든혼과 마르마라 해를 빠져 나와 북풍을 받으며 에게해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정작 베니스 함대는 아직 콘스탄티노플로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지금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서 콘스탄티노플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던 탓입니다.
  에게해를 샅샅이 뒤졌지만 베니스 함대를 찾지 못하고 그들이 곧 나타날 조짐도 발견 못한 쌍돛 범선 선장은 선원들에게 어찌 해야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자체 토론 끝에 그들은 만장일치로 복귀를 결심했습니다. 죽든 살든 황제에게로 돌아가 탐색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 신하된 자들의 도리요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떠난 지 20일 만인 5월 23일, 이 무명의 용사들은 이미 오스만 군의 말발굽에 짓밟혔을는지도 모를 콘스탄티노플로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서 위험을 무릅쓴 채 다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순간을  도성 안에서 황제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들의 최후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특수 임무를 띠고 출항했던 쌍돛 범선이 절망적인 소식만을 가득 싣고 귀항하자 이제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대상이라고는 천년 성벽과 성모 마리아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 마르마라 해는 남쪽 지중해와 북쪽 흑해 사이의 내해(內海), 바다 안에 있는 바다(Sea in Sea)이다. 연안에는 아홉 개의 작은 섬들이 있는데 *‘왕자 섬’이라 불린다. 여러 종류의 배들이 흑해로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폭이 좁고 안개가 자주 끼어 선박끼리 충돌하는 일이 많아 이를 막으려고 시간을 정해 교대로 일방통행시키기 때문이다. 낮에는 흑해에서 마르마라 해로 가는 배들이, 밤에는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로 가는 배들이 보스포루스를 통과해 항해를 한다.

  *비잔틴 시대에 왕족이나 고관, 사제들의 유배지로 쓰이던 섬들. 황제의 명에 따라 수도원들도 이곳에 많이 지어졌다. 1453년 당시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앞두고 발토글루를 보내 이 섬들을 점령하게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섬이었던 프린키포만의 수비대원 30명은 끝내 항복하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전사하거나 사로잡혀 도륙되었다. 섬 주민은 모두 노예로 팔려 갔다. 19세기 후반부터 이 섬들은  휴양지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아홉 개의 섬 중 네 개는 무인도다. 섬 안에서는 차량 운행이 금지돼 있어 천연의 아름다움과 정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 내가 ‘종군 기자’란 표현을 썼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넘치는 의욕에서 나온 말입니다. 550여 년 전 해상 전투의 현장을 생중계하듯이 전달할 능력이 내겐 없습니다. 다만 나는 책에서 읽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되새기면서 해풍의 방향과 전투 지점, 물살의 흐름과 세기 등을 가늠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나머지 미진한 부분은 눈 밝은 독자들이 사진들을 보면서 헤아려 주리라고 믿습니다.
  (해상 전투 편에서 언급한 함대의 규모와 전쟁의 양상 및 결과 등은 영국 역사학자 스티븐 런치만과 작가 로저 크롤리, 터키 역사학 교수 페리둔 에메젠과 마흐뭇 바자르의 저서 및 견해를 종합한 다음 내 탐사 경험을 덧붙여 간략하게 정리했음을 밝혀 둡니다.)

▲ 돌마바흐체 황궁. 19세기 중엽 31대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연안을 따라 길게 지은 바닷가 궁전으로 건물 길이가 600미터에 달한다. 발토글루가 지휘하는 해군 본부가 바로 이 위치(당시 지명은 *디플로키온)에 있었다.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1938년 11월 10일, 이 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를 기리기 위해 이 궁전의 모든 시계들은 그가 서거한 시각인 오전 9시 5분에 바늘이 멈춰 서 있다. 요즘 내 시계도 돌마바흐체의 시계처럼 1453년,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에 바늘이 머물러 있다.

  *바다가 조용하고 배가 정박하기 좋은 곳이라 해서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그리스어로는 Diplokion, 터키어로는 Çifte Sütun, 영어로는 Double Columns이다. 이는 우리 말로 옮기면 모두 ‘이중 기둥’이란 뜻을 담고 있다. 1422년에 제작된 부온델몬테의 콘스탄티노플 설계도에는 지금의 탁심 광장과 마츠카 사이의 계곡을 흐르고 있던 하천 바로 건너편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바닷물을 정밀 분석해 본다면 혹시 아직도 미량이나마 전쟁의 잔해인 피의 성분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자 황혼 물든 저녁 바다가 갑자기 핏빛으로 보였습니다.


▲ 해안 성벽 바로 앞에 있는 마르마라 바다로 물놀이를 즐기러 나온 청소년들. 지금 이들은 방학 기간이다. 오스만과 비잔틴 전사의 후예들답게 늠름하고 골격이 튼튼해 보인다. 수심이 꽤 깊고 가까이로 선박들이 지나가는 바다에서 튜브나 구명 조끼도 없이 헤엄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또 어느 순간 나는 저 깊고 차가운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2만 마리 양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1991년 11월 15일에 일어났던 기막힌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날 루마니아에서 구입한 2만 마리가 넘는 양을 싣고 보스포루스를 지나던 레바논 선박이 러시아로 밀을 싣고 가던 필리핀 화물선과 충돌해 양들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몇 마리 빼고는 모두 파티 대교(보스포루스 제2대교) 밑 어두운 심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불쌍한 일입니까.
  한동안은 또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혹은 자동차들이 유행처럼 파티 다리 아래로 몸을 던졌다더군요.


▲ 유럽(왼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며 놓여 있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 터키 공화국 창건 50주년에 맞추어 1973년에 개통되었으며 왕복 6차선 도로가 나 있다. 총길이는 1560미터, 양 교각 사이 거리는 1074미터, 다리의 폭은 33.4미터, 중앙 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64미터이다. 교각 오른쪽으로 오르타쾨이 모스크(빨간 동그라미 안)가 보인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이다.

  이스탄티노플을 둘러싼 바다에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숱한 사건과 비극적인 사연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 밑바닥에는 온갖 것들이 해류에 휩쓸려 이리저리 낙엽처럼 굴러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뼈, 창검과 소총, 대포와 대포알, 녹슨 훈장과 계급장, 부서진 선박과 자동차의 쇳조각들 등등….

▲ 여기는 골든혼 입구. 갈라타타워가 랜드마크처럼 우뚝 서 있다. 나는 골든혼 저 끝까지 가 보고 싶었지만 선장은 항해 금지 구역이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전후좌우로 요동치는 배가 선장의 말을 뒷받침해 주었다. 놀이동산 바이킹과는 전혀 다른 아찔한 경험이었다. 하는 수 없이 뱃머리를 돌려 다시 보스포루스로 향해야 했다. 보스포루스에서는 배를 세워 놓으면 바닷물의 흐름에 따라 배가 남쪽으로 떠내려 가지만, 골든혼 일대는 다르다. 어떤 해역에서는 바람이 정지하면 배가 오도가도 못한 채 발이 묶인다고 한다. 런치만의 책에 나오는, 조류가 한데 얽혀 배들을 곤경에 빠지게 하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리라. 해상 전투 현장을 탐사하고 돌아와 관련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선명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진실은 역시 현장에 있다!
전쟁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제노아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오스만에 첩보를 제공하는 스파이도 적지 않았다. 물론 비잔틴을 위해 싸운 제노아인도 많았다. 700명의 용병을 거느리고 맹활약한 제노아의 명문가 출신 주스티니아니, 골든혼 봉쇄 사슬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제노아인 공병 솔리고 등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었다.


  나는 아직도 영혼의 거처를 찾지 못한 채 바닷속을 하염없이 떠돌고 있을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시 묵념을 올렸습니다. 저녁 노을이 바다로 스며들어 번지고 있었습니다. 붉게 물든 바다가 내 눈에는 위령제를 위해 불을 밝힌 수많은 촛불들이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때마침 바람도 강하게 불면서 바다 표면과 맞부딪치며 장송곡 같은 마찰음을 연주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이 바다위로 안개가 마치 향연(香煙)처럼 피어오를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종군 기자들의 수첩 맨 마지막 줄에는 아마도 애도사 혹은 추도사가 적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이 지도에 표시돼 있는 파란 색깔 바다 부분은 거의 다 크루즈 선을 타고 탐사했다고 보면 된다. 단 지금은 흙이나 시멘트로 메워진 해자 부분은 빼고 말이다.

P.S.
  요즘 국회는 연중 가장 바쁘게 돌아갑니다. 국정감사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간은 상임위가 없는 국회의장으로서 이 기간을 이용해 ‘희망 탐방’을 떠났던 나도 올해는 외통위 소속 의원으로서 국감을 치르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10월 8일부터 19일까지는 해외 공관들을 감사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있게 됩니다. 그래서 9편은 주말과 휴일을 반납하고 미리 써 둔 다음 남미 국감 도중에 이메일을 통해 마지막 교정을 보고, 10월 13일, 블로그에 올리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육지 성벽과 해안 성벽, 루멜리 히사르와 해상 전투 등 직접적으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매듭짓게 됩니다.

  10편부터는 약 7회 분량으로 아야 소피아를 비롯해 몇몇 모스크와 박물관, 우르반의 대포, 술탄과 황제의 약전(略傳) 및 리더십 비교 등을 다루어 볼 생각입니다.

  그 동안 내 이스탄티노플 이야기에 관심을 보여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아래 한 장의 사진으로 잠깐의 작별 인사를 대신합니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 마르마라 바다 위에서 바라본 아야소피아(빨간 동그라미 안)와 그 일대. 10편과 11편, 12편에서는 교회에서 모스크로, 다시 박물관으로 탈바꿈한 아야 소피아를 집중 탐사할 계획이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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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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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펄프픽션 2010/10/13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장편 대서사시를 읽고 난 느낌입니다.
    블로그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길면서도 알찬 포스팅인 것 같습니다. 강추!!

  2. 쏘시오 2010/10/13 14: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대 100의 전투에서 4는 한 줌 밖에 안 되는 숫자지만 100을 너끈히 이겨습니다. 전투력은 숫자에 비례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골든 혼 해전을 읽으며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에서 13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왜선을 물리친 광경이 떠오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승리를 결정하는 요인은 단순한 양이 아닌가 봅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 군도 현대화, 정예화에 박차를 가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북의 100만 대군에 대칭돼 60만 대군이라는 허울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군이 존재하는 이유는 군부 엘리트, 즉 직업군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군, 이제 정말 다이어트를 해야 할 때입니다. 값싼 인력(징병제)에 취해 인적자원을 낭비하지 말고 언젠가 모병제가 될 때를 대비해 하나씩 하나씩 정예화를 해야 되지 않을까요????

  3. 엠파이어 2010/10/14 1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신을 읽고 나서 무릎을 쳤습니다.
    역시 이런 열정과 집착이 있어야
    완성도 높은 결과물이 나오는구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 아름답습니다.

  4. 보헤미안 2010/10/14 16: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로이보다 더 멋진 역사적 대 서사시!! 이스탄티노플
    러브라인 살짝 깔면 불멸의 영화 한편 탄생하겠군요.
    공격하는자와 방어하는자의 입장이라 그런지 어쩌면 술탄과 콘스탄티누스의 성향또한 이렇게 반대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영웅은 어떤 배우자를 두고 있었을지도 궁금하구요.
    건장한 짐승남들로 예니체리 부대원들을 캐스팅하고, (음 근데4편의 예니체리 자료를 보면 긴팔에 긴바지라 근육구경은 못할듯 하네요. 아쉽~~)
    발토글루와 함자베이, 자가노스 파샤 모두 걸출한 인물들이라 박진감 넘치는 영상들이 머릿속에 자동상영됩니다.

  5. 배가본드 2010/10/15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드라마틱한 소재가 아직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할리우드 감독들도 편협된 서양 사학자들의 시각을 못 벗어난 걸까요?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굴욕과 패배의 역사라서?

  6. 오노 야스마로 2010/10/15 17: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서기>를 쓸 때가 생각나는군요...나는 백제의 후손이지만, 일본 땅에 터를 잡은 사람. 이왕지사, 일본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일본에 정착한 백제인들의 주체성을 위해, 난 <일본서기>를 써야했지요...한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터키의 역사는 흥미진진 그 자체로군요. 이번 연재물로 한국과 터키의 역사가 오작교 위로 오가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사요나라 아나따~~

  7. 레퀴엠 2010/10/16 1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만 마리 양들이 빠져 죽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그 전에 죽은 영혼들까지 호명하며 위령제를 지내 주듯
    글을 마무리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고 인간적입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한 자리에 앉아 읽어내기에도 만만찮은 글을
    멋진 사진과 함께 탄탄하게 써 올린 분의 열정이 놀랍고 감탄스럽습니다.

  8. 마린보이 2010/10/22 1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줬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나의 도시가 되었다.
    누가 그 향기와 빛깔에 걸맞은 이름을 불러주랴.
    글 쓰기란 역시 의미 찾기이다.

  9. 롱롱타임 2010/10/24 0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기도 수월치 않은 긴 글이지만 쓴 사람 성의를 헤아려 끝까지 읽다.
    결론은 시간이 아껍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의 노력과 마음씀이 여러 사람을 즐겁게, 이롭게 한다.

  10. 거석이 2010/10/26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따 뭘 이러코롬 길게 쓴다요
    좀 짤뚱짤뚱 단편으로 해주셔도 괜찮을터인디
    지처럼 가방끈 짧은넘은 끝꺼정 읽다가 앞에 내용 다까묵습니더
    ㅎㅎㅎ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8
-전쟁의 전초 기지 루멜리 히사르

  그 전쟁은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언어나 문자를 통한 공식 선언만 생략되었을 뿐 그 자체가 무시무시한 선전포고였는지도 모릅니다.

▲ 루멜리 히사르 입구에서. 증명사진처럼 돼 버렸지만 나로선 두 번째 방문이다. 이런 차림으로 다니니 참 편하고 좋다.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돌들이 ‘부조화 속의 조화’를 이루며 성벽을 구성하고 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문 양 옆에 매달린 갓등도 제법 운치가 있다. 옛날에는 여기에 수문장이 지켜 서 있었겠지?

  *1452년 4월 15일,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드디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음을 확인하고는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전해 겨울부터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가장 협소한 지역에서 크고 작은 돌들을 한 곳에 모으며 뭔가를 준비하던 오스만의 군사들이 술탄 메메드 2세의 지휘 아래 본격적으로 요새를 새로 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 ‘유럽의 성’이란 뜻)가 그 주인공입니다.

  *강성했던 비잔틴 제국은 점점 쇠락하여 15세기 무렵에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 일부에만 통치력이 미칠 정도로 왜소해져 있었다. 100만을 헤아리던 도성의 인구도 5만 명이 채 안 되게 줄어들어 있었다. 반면 오스만 투르크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장악하고 발칸 반도로 진출한 뒤 비잔틴의 남은 영토를 잠식해 나가 콘스탄티노플을 ‘육지 속의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 바다 위 유람선에서 바라본 루멜리 히사르의 전경. 장엄하고도 웅장하다. 성벽 길이는 250여 미터, 높이는 15~33미터, 두께는 3~6.5미터에 이른다. 3개의 큰 성탑과 9개의 작은 탑을 공격과 수비에 모두 유리한 구조로 연결해 놓았다. 술탄 메메드 2세가 직접 설계 및 감독을 맡아 5000명에 이르는 인부와 병사들을 독려해가며 지었다고 한다. 술탄은 하릴 파샤, 자가노스 파샤, 사루자 파샤 등 세 명의 중신이 분담해 책임지고 공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경쟁을 유발해 공사의 완성도와 진척 속도를 높였다. 성탑의 이름도 축성한 신하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콘스탄티노플은 그 당시 요즘으로 치면 자유무역지대 비슷한 기능을 하던 무역항으로서 제노아와 베니스 상인들을 비롯해 아라비아·아르메니아·유대인 등 오리엔트 지역의 여러 민족들이 해상 무역 경쟁을 벌이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은 날로 강성해지는 오스만 투르크의 눈치를 살펴가며 명맥을 겨우 잇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알라신도 부수지 못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던 난공불락의 성벽만을 수호신처럼 의지한 채 말입니다. 다행히 오스만의 전임 술탄 무라드 2세는 통치 기간 중 1422년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포위하려던 시도가 무위로 끝난 이후 경제적 이득만 취할 뿐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지는 않았습니다.

▲ 루멜리 히사르의 늠름한 위용. 건너편 아시아 쪽 연안에는 아나돌루 히사르가 자리해 있다. 왼쪽으로 해협을 길게 가로지른 다리는 보스포루스 제2대교인 *파티 대교. 정복자(파티) 술탄 메메드 2세를 기념해 이름을 붙였다. 옛날 같았으면 바다와 가까운 주탑 위에서 대포알이 저 흰 배를 겨누고 날아갔으리라.

  *원래 이름은 파티 술탄 메메드 대교로 1988년 여름에 개통되었으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긴 현수교이다. 아시아와 유럽 대륙 양단에 세워진 교각 거리는 1090미터, 중앙 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64미터, 대교의 폭은 39미터로 왕복 8차선 도로이다. 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갈 때는 차량 통행료가 무료이나 유럽에서 아시아 쪽으로 들어올 때는 통행료를 내야 한다.

  그러나 무라드 2세의 급사로 1451년, 그의 열아홉 살난 아들 메메드 2세가 *다시 술탄의 자리에 오르자  상황은 급격히 변했습니다. 이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시작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루멜리 히사르는 말하자면 그 정복을 위한 상징 탑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이 말했듯이 이 도시는 ‘모든 세계 정복의 열쇠이자 세계의 지정학적 심장부’인 보스포루스 연안에 위치해 있었으니까요.

   *메메드 2세는 이례적으로 두 차례의 술탄 재위 기간을 갖고 있다. 1444~1446년, 1451~1481년. 전임 술탄인 무라드 2세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1444년, 고작 열두 살인 아들 메메드 2세에게 정식으로 양위를 하고 은퇴했다. 하지만 내각과 군대가 거만하고 고집 센 소년 지도자에게 불만이 많은 데다가 유럽 국경 지대의 분란이 끊이지 않아 여론과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다시 권좌에 복귀했다. 그리고는 5년 뒤 무라드 2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메메드 2세는 두 번째로 술탄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성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지어졌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완공일이 8월 31일이라니 겨우 넉 달 반 만에 그 거대하고 견고한 성을 구축한 셈입니다. 이로써 *보스포루스 해협은 루멜리 히사르와 **아나돌루 히사르, 두 개의 거센 손아귀에 의해 목을 움켜잡힌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술탄은 마주보고 있는 두 성에 군대와 대포를 배치함으로써 해협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거머쥐게 되었고 비잔틴 제국의 보급로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한 강력한 교두보가 마련된 셈입니다.

  * 보스포루스는 터키어로 보그하즈. 동음이의어로서 ‘목구멍’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당시 투르크족들은 루멜리 히사르를 ‘보그하즈 케센’이란 별칭으로도 불렀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칼날’ 또는 ‘목구멍의 칼날’이란 살벌한 뜻이다.

  ** Anadolu Hisar, ‘아시아의 성’이란 뜻으로 메메드 2세의 조부인 술탄 바예지드가 1394년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 연안에 지은 요새. 바예지드는 당시만 해도 비잔틴 황제의 승인 아래 이 성을 지었다. 하지만 메메드 2세는 그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루멜리 히사르를 신축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항의의 뜻으로 도성 안에 있던 600명가량의 투르크 인들을 붙잡아 감금했지만 곧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는 모두 석방했다.

▲ 원근법과 건물 구도를 무시하고 그린 두 요새 그림. 위쪽 성채가 아나돌루 히사르, 아래쪽 성채는 루멜리 히사르이다. 각각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가장 폭이 좁은(650여 미터) 동쪽과 서쪽 연안에 마주보고 서 있다. 비슷한 크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루멜리 히사르의 규모가 훨씬 더 크고 높다.

▲ 루멜리 히사르에서 찍은 아나돌루 히사르의 원경(遠景). 아시아와 유럽이 이 좁은 해협(650미터~3.6킬로미터)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진다. 주탑 위로 빨간색 터키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두 성채의 크기가 그것을 지은 두 사람, 할아버지와 손자의 서로 다른 야망의 크기를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 앞 바닷가에 네모와 세모의 조합으로 건축된 집들이 마치 레고로 지은 듯 예쁘고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술탄은 포고령을 내려 보스포루스 해협을 오가는 모든 선박으로 하여금 요새 앞에 멈추어 검문을 받도록 했습니다. 명령을 어기는 배는 침몰시킨다면서 위협적인 대포 3문을 바다와 가장 가깝게 지은 탑에 배치시켰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나는 지금 루멜리 히사르의 스케치풍 그림과 요새의 구조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본문과 캡션에 이미 설명해 놓은 내용이지만 영문 표지판 내용이 궁금하다면 비록 내 몸으로 조금 가려지긴 했지만 영어 공부 삼아 한번 읽어 보기 바란다.

  11월 초 흑해에서 출항한 두 척의 베니스 선박이 정지 명령을 거부했다가 대포의 공격을 받았으나 용케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2주 후 똑같은 시도를 하던 세 번째 선박은 포탄에 맞아 침몰하고 선장과 선원들은 포로로 잡혀 참수를 당해야 했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삽시간에 공포의 바닷길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술탄의 콘스탄티노플 공략 시점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주탑의 내부. 나선형 회전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지하까지 합해 6층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엔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왼쪽엔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가 배치되어 있다. 비잔틴 시대의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탑 안으로 비쳐든 햇살이 훌륭한 조명기사 역할을 해주어 멋진 예술 사진이 만들어졌다.

  우리 일행은 그 살벌했던 보스포루스 해협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유람선을 타고 통과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와 주변 풍경, 그리고 요새는 난생 처음이라고 감탄을 거듭하면서…. 하지만 어느 순간 저 우뚝 솟은 루멜리 히사르 성 위에서 대포알이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다는 상상을 하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성 안쪽에 1452년 당시와 그 이후 실전에 사용되었던 오스만의 대포들을 진열해 놓았다.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을 공격했던 큰 대포는 보이지 않았다. 거포는 성벽 위에 올려놓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발포하면 그 반동으로 성벽이 훼손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 섹시한 대포알?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영화 제목이 갑자기 떠오르게 하는 묘한 모양의 대포알이 돌기둥 위에 놓여 있다. 가운데에 홈을 파 놓은 까닭은 아마도 밧줄에 묶어 성벽 위로 끌어올리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바다를 향해 쏘던 대포 발사대 구멍. 지금은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나뭇잎 저편은 바다이다. 내부 벽이 화염의 흔적인 듯 그을음으로 까맣게 덮여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에서 흔히 보았던 것처럼 여기도 안쪽 구멍이 넓고 바깥쪽 구멍은 좁은 형태이다. 그러니까 방어와 공격 모두를 유리하게 만든 구조이다.

  실제로 우리는 루멜리 히사르의 가장 높은 성탑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 당시 병사들이 대포와 화살을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쏘았는지 실감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난간도 없는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모험한 보람이 있었지요. 전망이 탁 트인 보스포루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발 밑은 비록 아찔했지만 술탄이 왜 여기에 요새를 구축했는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은 그 무시무시했던 루멜리 히사르가 박물관 겸 야외 공연장으로 탈바꿈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이었습니다.

  그런 예는 많습니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5편에서 소개한 갈라타 타워도 오랜 기간 군사용 감시탑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나이트클럽과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 보스포루스 해협은 물살이 빠르고 거세다. 바다 표면에 울퉁불퉁 주름이 잡혀 있다. 대포알이 배를 스치기만 해도 전복될 것 같은 느낌이다. 큰 대포알이라면 배 근처에만 떨어져도 선박이 요동을 쳤을 것 같다. 중견 작가 한승원씨의 「그 바다, 끓며 넘치며」라는 해양 소설 제목이 문득 생각난다. 저 멀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인다.

  물론 그 반대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평화롭던 학교 교실은 포로수용소가 되고 운동장은 적들의 제식 훈련장이 되고 극장은 야전 병원이 되는 경우는 우리도 이미 60년 전에 겪지 않았습니까.

▲ 스탠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루멜리 히사르는 요즘 종종 야외 공연장 및 전시장으로 활용된다. 특히 한여름 밤에는 터키의 톱스타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함께 축제의 불꽃들이 밤하늘을 수놓는다. 콘스탄티노플 전쟁의 전초 기지였으며 그 뒤 포로수용소 역할도 했던 이곳이 이제는 평화의 공원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역사는, 그리고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고금의 전쟁에 관한 격언 중 음미할 만한 몇 개를 소개합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전쟁 이야기와도 맥락이 닿는 금언들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라.”-로마 격언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침략에 있다.”-아돌프 히틀러
  “항상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맨토르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있을 것이다.”-알버트 아인슈타인
  “전쟁의 세계에는 두 마디 단어밖에 없다. 이기느냐, 지느냐.”-윈스턴 처칠
  “휴전은 다음 전쟁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이승만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연장이다.”-칼 폰 클라우제비츠


▲ 루멜리 히사르의 야경. 군사 요새라기보다는 동화의 나라 같은 느낌이다. 왠지 오늘 밤 저 성 안에서는 환상적인 공연과 함께 연인들의 로맨스가 무르익고 있을 것만 같다. 아래사진 왼쪽으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 주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시시각각으로 빛깔을 달리 하며 ‘이스탄티노플’의 밤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많은 격언들이 평화를 지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준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방위력, 자주국방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주변 국가, 이해 당사국들과의 신뢰 및 우호 협력 관계 역시 너무나 중요함을 이어지는 다음 편(9편)에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석양이 보스포루스를 곱게 물들였다. 이스탄티노플의 부유층이 자가용처럼 이용하는 요트로 보이는 이 배는 해 저무는 바다를 미끄러져 보금자리를 찾아 가고 있다.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이 바다, 1452년과 1453년, 그땐 결코 이렇게 평화롭지 않았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9편에서는 종군 기자가 된 심정으로 그 당시 격렬했던 해상 전투의 현장으로 배를 몰고 가 볼 생각이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이 지도는 15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플의 모습을 담고 있다. 현대 지도를 쓸까 하다가 비록 축적과 원근감은 애매하지만 바다 모양이 뚜렷하게 강조되어 있어 등장시켜 보았다. 왼쪽 육지 성벽 옆 해자 모양도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아래는 마르마라 바다, 콘스탄티노플과 갈라타 사이를 흐르는 건 골든혼이다. 오른쪽 위의 해협이 바로 보스포루스이다. 보스포루스 왼쪽 연안은 유럽, 오른쪽 연안은 아시아다. 따라서 루멜리 히사르(왼쪽 동그라미)와 아나돌루 히사르(오른쪽 동그라미)는 대략 저 위치쯤에 있었을 것이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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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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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와바다 2010/10/06 08: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뷰티풀!
    이스탄티노플,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반할 수밖에 없는 도시입니다.

  2. 조나단 2010/10/06 09: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그 망명하고픈 도시!

  3. 술취한 술탄 2010/10/06 1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봉박두 기다리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로 이야기가 흘러가는군요.
    본문에서 말했듯이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동전의 양면처럼 승리에 취한 오스만군의 모습 불안과 공포에 떨었을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네요.
    다음편 부터는 본격적인 해상전투가 그려질 예정이라니 더욱더 이스탄티노플에 빠져들것만 같습니다.

  4. BlogIcon 너서미 2010/10/06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길고 잘 기획된 시리즈물을 블로그로 볼 수 있다는 건
    독자들에겐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것들은 책 외에는 볼 수 없는데 말이죠.
    더구나 블로그에서 깊은 조사에 의한 컨텐츠가 드문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5. BlogIcon 술에물탄 2010/10/06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벌써 8편이 올라왔군요.
    야경도 참 아름답고, 아시아와 유럽을 구분짓는 장소라는 점이 신비(?)스럽네요.
    그리고 그곳의 역사를 품고 있는 오래된 성벽들..
    참 매력적이네요.

    잘보고 갑니다~

  6. 쏘시오 2010/10/06 15: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탄에게 목젖같은 저 콘스탄티노플성은 '목엣 가시'나 다름없을 것이다. 반드시 빼놓아야 음식을 마음껏 삼킬 수 있는...
    한 때 오리엔트를 지배하던 비잔틴의 말년이 너무나 초라하다. 천년제국이 저렇게
    옹색하게 줄어들 때가지 역대 황제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나...
    비잔틴 최후의 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7. 히데요시 2010/10/06 16: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순신은 적장이나,존경할만 하오. 후세 누군가는 <칼의 노래>라는 소설로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켰지만, 뭐니뭐니해도 이순신의 뛰어남은 그의 지혜(기획력)와 추진력일 것이오. 8편으로 이어지는 이스탄불 시리즈에서 상세한 정보를 얻어갈 수 있어서 좋소이다. but, 비유 또는 알레고리, 즉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과의 연결 또는 21세기 현재와의 구체적 연관성 등이 나타나있다면 가독성이 엄청 높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오. <당시의 터키-임진왜란 당시 조선- 21세기 한국>의 멋들어진 연결고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외다. 잘 읽고가오."

  8. 두륜 2010/10/06 16: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52년 술탄 메머드2세가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해 단 4개월만에 지었다는 "루멜리 히사르 요새" 그 웅장함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네요...
    치열했던 전쟁의 전초기지로써 아픈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동화같은 "이스탄티노플"의 아름다운 야경으로 자리잡아 우리에게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게 해 주니 참 아이러니 하네요...
    "치열한 전쟁속의 종군기자"라....^^
    9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9. 코렐리 엄 2010/10/06 1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장님 단 두차례의 방문에 이런 작품이 나오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또 주말에 즉시 현장사진 장소대로 방문해 의장님 체취를 느껴 볼까 합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끊임없이 열정을 다해 생생한 역사재현 및 어디에도 없었던 지식전수해 주심에 감동입니다.
    참, 지적해 달라 하신부분,보스포로스 제2교는 왕복 8차선입니다. 제1교는 6차선이고요,또 석양의 보스포로스 사진에 등장한 어선은 세일용 34피트 요트로 보입니다.
    엄청난 감동으로 연일 펼쳐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지식과 경륜과 부드럽고 날카롭고 부담없는 필체에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터키에서 인사올립니다. 꾸벅.

    • 호야 2010/10/07 17:21  댓글주소  수정/삭제

      현지 사정에 밝은 엄 전무가 아니라면 발견하기 힘든 두 가지 오류, 곧바로 수정해 놓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멀리서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성원에 힘이 불끈 솟는군요.
      새치를 뽑듯이, 앞으로도 팩트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 지적해 주기 바랍니다.

  10. 대물 2010/10/07 0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섹시한 대포알? 그 사진과 캡션 읽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의장님은 역시 유머를 아시는 분입니다.

  11. 전자돌이 2010/10/07 1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균 일주일에 한번꼴로 올라오는 이스탄티노플 시리즈를 접하면서
    대학생때 교양 수업 듣던 기분이 나더라구요.
    한 열대여섯편 정도 쓰시면 정말 한학기 강의분량이네요 ㅋㅋ
    호야교수님 시험문제는 어떻게 내실 계획이신가요? ^^

    • 팽돌이 2010/10/09 1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국감으로 외통위 소속인 호야 교수님이 해외 공관 국정감사를 나가신 걸로 압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휴강?
      중간고사 대비해 열심히 복습이나 해야겠습니다.

    • 아나돌이 2010/10/09 1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긴급 입수! 이스탄티노플 중간고사 주관식 예상 문제!!!
      "콘스탄티노플 정복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루멜리 히사르 맞은편
      아시아 쪽 보스포루스 연안에 있던 요새 이름은?"
      제 아이디(아나돌이)에 힌트가 있습니다.

    • 사과나무 2010/10/14 16: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먼저 답해도 되나요?ㅋㅋ
      정답은 '아나돌루 히사르'입니다!

  12. 거석이 2010/10/26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미 거시기 민망한 사진이 있구먼유
    워째 의장님 이미지랑 영..

    • 거시기 2010/10/27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거시기란 무엇이냐.
      크게(巨) 보이는(示) 그릇(器)이란 뜻입니다.
      대물(大物)로 해석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런 점잖은 유머는 오히려
      블로그의 품격을 높인다고 생각합니다.

-바다 위를 걷다 ;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



  <구름 위의 산책>이란 영화가 있습니다만, 그대 혹시 바다 위를 걸어 본 적이 있나요?

  나는 걸어 보았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 말입니다. 물론 특수 신발을 신었다거나, 갑자기 내 눈 앞에서 ‘모세의 기적’이 펼쳐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수로 바다 위를 활보했던 걸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바다 위의 산책’은 아니었습니다. ‘1453년 당시에는 바다였던 곳’을 답사했던 거지요. 부연하자면, 나는 지금은 대부분 매립돼 육지로 변해 버린 마르마라 해안 성벽 주변을 탐사했습니다. 몇 장의 지도를 손에 들고서 말입니다.


  총 길이 약 9킬로미터. 마르마라 연안을 끼고 완만한 오목렌즈 형으로 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해안 성벽은 한 겹이었으며, 그 성벽을 관통하는 11개의 문이 바다 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또한 두 개의 요새화된 항구를 비롯해 작은 선착장들이 있어 물자도 실어 나르고 세찬 북풍 때문에 골든혼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소형 선박들의 피난처가 돼 주었습니다.

  성벽 둘레로는 급류가 흘러 상륙용 주정(소형 배)을 성벽 끝까지 갖다 대기가 어려웠으며, 암초와 모래톱 또한 마르마라 성벽의 든든한 방어물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1453년 전까지만 해도 1000년 이상 외세의 침략에 의해 허물어지거나 성문이 열린 적이 없는 천혜의 철옹성이었습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15세기 콘스탄티노플 도성 모습. 오른쪽으로 방어용 쇠사슬을 쳐 놓은 골든혼(금각만)이 흐르고, 그 옆에 제노바 사람들의 거주지였던 갈라타 지역 일부가 보인다. 그림이 증명해 주듯이 당시에는 아래쪽 마르마라 바다가 성벽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파도가 성벽으로 밀려와 부딪치는가 하면, 성문을 통해 식량과 물자를 실은 배들이 드나들기도 했다. 지금은 복개되어 사라졌지만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이 예니카프를 통해 마르마라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1453년 당시에는 도성의 상류 지역인 메소테이키온에서 격전이 치열했던 만큼 리쿠스 강물에도 핏물이 진하게 섞여 바다로 흘러 내렸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라 어순을 바꾸어 벽해상전(碧海桑田)이라 해야 할까요? 저 그림 속에서 꿈틀대던 마르마라 바다의 일부분은 흙으로 메워져 지금은 공원과 해안 도로로 변해 있습니다. 옛 성곽들도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많이 허물어지고, 도로와 철길이 놓이면서 상당 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설픈 복원 공사로 미관을 해친 부분도 더러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 보십시오. 아래에 소개하는 사진들만으로도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프로추어(프로+아마추어) 작가 두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찍은 사진들이지만 이번에도 올리지 못한 사진이 수백 컷입니다.
  한
컷의 사진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나와 함께 마르마라 해안 성벽 주변, 바다 위를 걸어 볼까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누구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라면….



▲ 골든혼 입구에서 마르마라 해 쪽으로 배나 자동차를 우회전하면 해안 성벽이 나타난다. 오른쪽 언덕 위로 톱카프 궁전의 둥근 지붕이 보인다. 만만치 않은 수심인데도 더위를 피해 나온 시민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안전 요원이나 ‘수영 금지’ 팻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 해안 성벽으로 접어들면 맨 먼저 눈에 띄는 *투르굿 레이스(Turgut Reis, 1485~1565)의 동상. 마르마라 해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며 왼손을 지구의에 얹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상 오른쪽 건너편 페라 신도시 앞바다에는 하얀색 크루즈선이 떠 있다.  

*16세기 오스만의 유명한 해군 제독.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군인이 되었다. 지중해 말타 섬 원정을 총지휘했으며, 그리스도교 선박들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로 유럽에서는 악명이 높았다. 1551년에는 말타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고조 섬의 주민 6000여 명을 모두 리비아에 노예로 팔아 버린 일도 있었다. 코르시카 섬과 마요르카 섬을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투르굿 레이스에서 레이스(Reis)는 성이 아니라 ‘제독’이란 뜻을 지닌 옛 터키어이다. 아시아계 유목 민족이 그러하듯이 터키도 예전에는 성(姓)이 없었다. 특정 인물 이름에 직함을 붙여 부르는 건 터키인들의 오랜 전통. 걸출한 제독들에게는 ‘레이스’란 칭호가 붙었다. 같은 이유로 장군이나 사령관에게는 파샤(Pasha), 중견급 군인이나 지방 장관에게는 베이(Bey)란 호칭이 따라 붙는다.


 

▲ 투르굿 레이스의 동상 옆 망루 성벽에 새겨진 고대 그리스 문자들. 테오필로스 황제(829~842년)가 이 성벽을 새로 지었다는 말과 함께 황제를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테오필로스는 9세기 무렵 아랍 함대들의 침공에 대비해 성벽을 보강했다. 이 망루 성벽 복원을 위해 역사학도(해안 성벽 전공) 니사가 관여하는 협회에서 유네스코에 연구 논문을 제출했다고 한다.


▲ 출입문인가, 경비용 혹은 감시용 문인가. 비잔틴 양식의 아치형 문이 아랫부분은 지하로 절반 이상 매몰된 채 시커먼 속을 내보이고 있다. 지표면의 융기로 땅이 솟아오른 데다가 매립까지 더해진 걸 감안하면 실제 높이는 만만치 않았으리라.


*부콜레온 황궁(Boukoleon Palace)으로 통하는 바다 쪽 수문의 원형 복원도.
   우리가 찍은 아래 관련 사진들과 비교해가며 보기 바란다.

*네아 바실리카 교회 옆, 히포드롬(원형 이륜마차 경기장) 바로 뒤에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궁전. 아야 소피아와 매우 가까워 콘스탄틴 대제를 비롯한 비잔틴 황제들이 이곳에 머문 적이 많았다. 부콜레온(Boukoleon)이란 이름은 이 궁전을 지키고 있는 황소(Bull)와 사자(Lion)를 닮은 동물 조각상(붉은 사각형)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터키 정부가 그리스와의 우호 관계를 고려해 최근 일부 건물을 보수하고 있다고 한다. 표지판에 고고학 박물관의 감독 아래 이 궁전과 그 주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 부콜레온 황궁으로 연결되는 해안 쪽 문. 궁전을 수호하던 동물 조각상은 사라지고 물결이 넘실대던 바다는 매립으로 메워져 해안도로(케네디 대로)가 나고 해안선은 그만큼 멀어졌다. 배들이 다니던 바다를 지금은 자동차들이 달린다. 매끈했던 대리석 벽면에서는 거미줄처럼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 부콜레온 황궁으로 이어지는 해안 쪽 문 내부. 카메라로 얼굴이 가려진 저 사나이는 누구인가. 내 오랜 벗 우헌기 兄이다. 이번 어드벤처에 기꺼이 동행해 프로 수준의 사진으로 맹활약했지만 “촬영 감독은 원래 스크린에 안 비치는 법”이라며 한사코 블로그에 등장하길 사양했다. 그런 그의 사진 찍는 모습을 내 디카에 담았다.


▲ 비잔틴 양식의 전형을 보여 주는 부콜레온 황궁 성벽의 맨 윗부분. 저 꼭대기에서도 무화과나무는 뿌리를 하늘에 두고 가지를 땅으로 향한 채 물구나무서서 자란다. 터키는 기후와 토양 모두 무화과나무가 자라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무화과나무(Fig-tree)를 인지르(Incir)라고 부른다. 하도 이 나무를 많이 보아서 나는 이 도시를   ‘인지르 시티(Incir City)’라고 부르기로 했다. 로마에서는 주신() 바쿠스가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해서 다산()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이스탄티노플은 문명과 문화 모두 다산성(多産性)인 도시이다.


◀ 아흐르카프(외양간 문) 주변. 오랜 옛날부터 등대는 늘 그 자리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 등대는 비잔틴 시대의 등대도, 오스만 시대의 등대도 아니다. 공화국 이후에 다시 지어진 현대식 등대이다. 달그림자마저 얼어붙었을 1453년 5월의 어느 날 밤을 등대는 기억하고 있을까. 여기서 마르마라 해 건너편 아시아 쪽 연안으로  *1군 사령부가 바라다 보인다.





*위스크다르 남쪽 마르마라 해 연안에 세워진 오스만 시대의 건물로 독일의 건축 양식을 따랐다. 크림전쟁 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로 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군 시설이라서 민간인 출입은 금하고 있으며 북동쪽에 나이팅게일 기념관이 있다.


 

▲ 해안 성벽 안쪽. 성벽의 윗부분은 복원한 흔적이 뚜렷하다. 활을 쏘기 위해 만든 네모난 구멍은 안쪽이 넓은 반면 바깥쪽은 좁다. 공격과 수비를 모두 유리하게 하기 위한 지혜의 산물이다. 아치(Arch) 모양이지만 보다 전문적인 건축 용어로는 *니치(Niche)라고 일컫는다.

*장식을 목적으로 두꺼운 벽면을 파서 만든 움푹한 대(臺)로 보통 그 윗부분이 반(半)돔형이다. ‘벽감(壁龕)’이라고도 한다. 서양에서는 이곳에 꽃병 등을 놓거나 아예 이 부분을 장식용 분수(噴水)로 만들기도 했다. 아치와 니치를 쉽게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벽이 없이 움푹 뚫려 있으면 아치, 움푹 들어가 있지만 벽으로 막혀 있으면 니치이다.



▲ 성벽의 높이를 짐작해 보자. 단 옛날에 비해 대지가 융기하고 해안이 매립됐음을 감안해야 한다. 지하에 숨어 있는 깊이까지 헤아린다면 결코 만만하게 볼 높이가 아니다. 여기에 바닷물이 들이차고 남풍이 거세게 불고 암초까지 많았으니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려는 세력들도 마르마라 해안 성벽은 감히 공격할 엄두를 못 내었다고 한다. 다만 강한 바닷바람(海風)에 실려온 염분으로 인해 육지 성벽이나 골든혼 쪽 성벽보다 보수 및 보강 공사를 더 자주 해야 했다.



▲ 어느 것이 먼저 무너질까? 1500년을 버텨온 성벽 틈새에 판잣집이 위태위태하게 이웃해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즉석에서 그런 사진 캡션이 떠올랐다. 차틀라드카프 인근에는 이런 식의 건축물들과 성벽들이 흔했다. 그래서 일행 중 사진 애호가인 두 사람은 갈 길이 멀다고 재촉해도 못 들은 척 경쟁하다시피 셔터를 눌러댔다.


▲ 인간이 살고 있다! 허물어진 성벽 사이로 허름하게 지어진 목조 가옥의 2층 처마 밑에서 빨래가 마르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온기가 넘쳐흐르는 느낌이었다. 문득 멀리 두고 온 그리운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 이 그림을 바로 위 사진과 비교해 보라. 앞 성벽은 모양이며 구조가 위 사진 속의 성벽과 똑같다. 동일한 성벽이다. 그래픽으로 표현한 대리석 건물은 부콜레온 황궁 벽의 운형 복원도. 높이만 놓고 보더라도 그 위용을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다.




▲ 이스탄티노플에선 피사체 모두가 예술 작품, 아니 그 이상이다. 어떤 조각가, 어떤 화가가 이토록 아름답고 운치 있는 풍경을 빚어낼 수 있으랴. 오랜 세월, 비와 눈과 바람과 햇살이 합작해 빚은 천혜의 예술 작품 앞에선 오른쪽 인공으로 지은 건축물마저 불협화음이 아니라 차라리 조화롭게 느껴진다. 역설의 미학이랄까.


▲ 누가 저 고색창연한 성벽 위에 액자를 걸고 두 장의 현대식 건물 사진을 끼워 넣었을까?
눈이 잠시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저 사진틀 모양 성벽들은 원래는 왼쪽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재질은 물론 대리석이다.(아래 그림 붉은 표시 부분 참고)






부콜레온 황궁 복원도


▲ 성곽 끝자락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자세로 마치 1500년 전부터 거기 존재해온 것처럼 대리석 기둥을 받치고 집 한 채가 있다. 부콜레온 황궁 복원도와 이 사진을 아치 기둥에 초점을 맞추어 비교해 보기 바란다.



▲ 황궁 터 앞은 옛 자취를 찾을 수 없게끔 매립이 되고 그 자리에 도로와 공원이 들어섰다. 주말이면 공원은 행락객들로 붐빈다. 폐선은 놀이터로 둔갑했다. 블루 모스크의 상징인 여섯 개의 첨탑(미너렛)이 마치 뾰족하게 깎은 연필처럼 구름 낀 하늘에 시를 적고 있다.



▲ 주말이나 휴일은 새(까마귀?)들의 잔칫날이다. 마르마라 해변 공원에서 새들이 행락객들이 남기고 간 음식물을 뒷설거지하고 있다. 비둘기도 아닌데 사람을 별로 겁내지 않았다.


▲ 터키 판 서낭당? 우리나라나 몽골․위구르 등에서 볼 수 있는 나무 위에 매달린 실을 마르마라 해안 성벽 옆에서 보았다. 이 도시에서 23년째 살고 있는 통역사 이경숙씨에 따르면, 터키 시골에 가면 이따금 볼 수 있지만 이스탄불에서는 처음 본단다.
이경숙씨의 말, “의장님 따라 다니면서 모르던 것 새로 알고, 잘못 알고 있던 것 바로 알게 된 것들이 참 많아요.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 도시가 생긴 이래 남들이 안 다닌 곳들만 골라 다닌 유일무이하고 전무후무한 여행자일 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여태껏 쌓인 피로가 씻은 듯이 풀리면서 내딛는 발걸음에 다시 새 힘이 솟았다.


▲ 지도에게 길을 묻다. 거리에서 발길을 멈추고 니사가 준비해 온 1930년대 지도를 펼친 채 들여다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해안 성벽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두 미녀의 눈길이 열심히 쫓고 있다. 나중에는 지도가 나달나달해졌다. 여백과 귀퉁이도 내가 써 놓은 메모로 가득 찼다.


▲ 옛 항구 자리를 찾아가던 길에 들른 카드르가 마을에서. 이 동네엔 오스만 시대의 전통 가옥들이 많았다. 기독교 문화권인 그리스 건축 양식이 창문이 굉장히 크고 돌출된 스타일인 반면, 이슬람 국가인 터키는 집안에 있는 여자들이 밖에서 잘 안 보이도록 작은 창문에 창살을 달고 담을 높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 주차장으로 변한 항구. 혹시 흔적이 남아 있을는지도 모를 카드르가 앞 항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지도를 들고 이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항구는 온데 간데 없고 항구 끝자락 성벽만이 쓸쓸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옛날에 배들이 정박해 있었을 법한 곳이 지금은 매립돼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들여보내 주세요~

▲ 역시 이 나라 사람들은 ‘꼬레리’(한국인)에게 친절하고 관대하다. 우리는 비잔틴 시대 해안 성벽 최대의 항구(?)를 찾아서 또 육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니카프 근처, 해저 터널과 연결되는 지하철 터미널 작업을 하고 있는 공사 현장은 일반인들 출입이 금지돼 있지만 우리에겐 특별히 문이 개방되었다. 여기가 바로 엘레우테리오스 항구가 있던 자리. 리쿠스 강물이 마르마라 바닷물과 몸을 섞던 최하류이기도 하다. 토목 공사 과정에서 비잔틴 시대의 유물들이 대거 발굴되어 고고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발굴된 유물들을 모아 국립 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회도 가졌다.


특종 사진!?

▲ 출입은 특별히 허용됐지만 아직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고 공식 발표 전이라서 사진 촬영은 절대 금지라고 했다. 하지만 프로 의식으로 무장한 우리의 기사(騎士? 技士?)는 ‘기사 정신’을 발휘해 눈치껏 셔터를 눌렀다. 특종 사진!? 흰 천막을 씌운 부분은 비잔틴 시대의 상선 22척이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됐던 자리들. 파헤쳐진 발굴 현장에 군데군데 솟아 있는 나무토막들이 여기가 바로 옛 항구 터였음을 말해 준다. 이 엘레우테리오스 항구 오른쪽 옆은 *오르한 왕자와 그가 이끄는 투르크 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한 오스만의 왕자. 술탄 쉴레이만의 손자이자 무라드 2세의 먼 사촌이다. 1453년 당시 마르마라 해에서 상륙한 극소수의 오스만 병사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술탄에게 잡히면 목이 달아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아는 오르한과 그의 부하들은 투르크 군과 대항해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로는 비참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오르한은 정교회 수도복을 빌려 입고 변장한 채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붙잡혀 동료 죄수의 밀고로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 바다 성벽 안쪽. 망루로 올라가는 계단이 놓여 있고 아치형 비잔틴 양식이 뚜렷하다. 여기저기에 동네 개들이 실례를 해놓아 조심조심 발밑을 살피면서 걸음을 옮겨야 했다. 1453년 당시 프사마티아와 스투디온 등 엘레우테리오스 항구 오른쪽에 있던 지역은 그곳 방위군들이 육지 성벽이 뚫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오스만의 함자 베이 함대에게 항복해 교회를 비롯한 주민들이 온전히 살아남았다. 이 지역 주민들은 돈을 걷어 포로로 잡힌 다른 지역 주민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들을 구해 주는 의리를 발휘했다.


▲ 바다 성벽 바깥쪽. 해안 성벽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성벽 바로 앞이 바다다. 1453년 당시에는 해안 성벽 모두가 이런 모습이었을 테니 적들이 감히 상륙할 엄두를 냈겠는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성벽 안팎 모두 야외 공연장으로 쓰면 좋을 것 같은 공간이 있었다. 주변 정리만 잘하면 관광 명소가 되는 건 금방일 것 같았다.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그 옛날 영도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내 모습이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지금은 진흙과 모래 그리고 자갈이 뒤섞여 퇴적된 모습이지만 550여 년 전에는 온통 바다였던 곳이다. 위치는 제라파샤 병원 건너편. 택시 기사에게 그렇게 말하면 데려다 준다.


▲ 바다 성벽 끝자락에 있는 주탑. 성벽 꼭대기는 복원된 모습이 역력하다. 바로 앞은 마르마라 해와 육지 성벽이 만나는 지점이다. 니치 양식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 드디어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가 끝났다. 여기서 모퉁이를 돌아 왼쪽으로 꺾어지면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이 시작된다. 해안 성벽 탐사는 무엇보다도 길 건너는 것이 가장 위험했다. 자동차들이 야생마처럼 내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급한 마음에 때론 교통 법규 위반까지 저질렀음을 고백한다.


▲ 오, 아름다운 정원! 육지 성벽은 이렇게 운치 있는 공원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이 멋진 곳을 찾은 사람은 우리뿐이다. 이미 해안 성벽 이전에 오랜 시간에 걸쳐 탐사도 하고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1․2․3․4편에도 소개한 지역이지만 이 날도 우리는 점심을 먹고 나서 또 해질녘까지 대포알을 찾아 3중 성벽 구석구석을 헤매고 또 헤매었다.


▲ 황금문 앞 풀밭 위에서.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를 마치고 점심 식사 뒤 오후 ‘작전 계획’을 짜고 있다. 통역을 해준 이경숙씨, 열과 성을 바쳐 성벽 탐사에 동행하며 내 물음표를 지워 준 니사 양에게 내 등 뒤에 피어 있는 모든 꽃들을 모아 만든 꽃다발을 바치고 싶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7편은 마르마라 해안 성벽(세라글리오 곶부터 비상문까지/붉은 사각형 표시)을 탐사한 내용이다. 거리는 약 9킬로미터. 매립된 지역이 너무 많고 넓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바다 위를 걷는 기분으로 답사를 했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S.

  이스탄티노플 여섯 번째 이야기를 읽고 나서 아이디 ‘중독’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그 중 한 구절입니다.


  “술탄이 왜 백마를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힌트를 봐도 유추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편을 기대하며…”


  다음 편(7편)을 지금 올리지만 중독님을 비롯한 6편 독자들은 술탄이 왜 백마를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9편으로 미루고, 7편에는 다른 이야기를 썼기 때문입니다. 구성을 약간 달리 하면서 이야기 순서가 바뀌게 된 것을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그 대신 8편에 올릴 내용을 한 컷의 사진과 함께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 마르마라 해안 성벽 탐사를 시작하며 보스포루스 해협 쪽으로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찍은 바다 사진. 저 해협 양쪽에는 1453년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요새가 두 곳 있었다. 아나돌리 히사르와 루멜리 히사르. 각각 아시아 쪽과 유럽 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들의 통행을 제한하고 위협하며 콘스탄티노플 정복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던 두 요새 이야기가 8편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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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존과 발전 2010/10/01 1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풍스럽다'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먼 옛날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너무 티나게 복원된 흔적들이 아쉽기도 하네요.
    하지만 유지/보수를 하지 않을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간의 흐름만이 복원된 성곽의 흔적을 덮어줄 수 있을것 같네요

  2. 오스만 2010/10/01 1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원더풀, 뷰티풀!
    스릴과 서스펜스 넘치는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만국기처럼 다채로운 내용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3. 두륜 2010/10/01 15: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열정과 노력에 매번 놀랍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고...
    대단 하시네요...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꿈이 현실이 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
    멋진 말이 아닐수 없네요...
    다음에 시간이 흐른뒤 외국의 명사가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지금 의장님처럼 꿈이 현실이 되는 나라 "대한민국"이라고
    소개한다면 더욱 멋지지 않을까요?

  4. 술취한술탄 2010/10/01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번도 가본적없는 이스탄티노플
    의장님덕에 3박4일정도 이스탄티노플 여행을 다녀온듯합니다.
    해박한지식과 격조높은 안목 다음편 기대할께요.
    더불어 말씀드리면 여행중 즐겼던 음식이나 에피소드도 올려주셨음 좋겠는데

  5. 박찬용 2010/10/01 16: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치 제가 마르마라 해안을 다니는듯이 느껴집니다
    너무도 생생한 현장감으로 제가 곳곳을 돌아 다닌듯
    감동과 여행후의 피곤함이 몰려옵니다
    한편한편의 글들을 읽으며 너무도 재미있는 산교육을 받는 느낌...

    늘 불타는 열정으로 한국의 산하와 역사를 쓰다듬어 주셨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힘드시겠지만 책으로도 만들어 주신다면 더많은 사람들이 더멋진 경험을 할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을 감히 해보게 됩니다
    8편이 너무도 기다려집니다

    아름다운 글들 너무도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 하십시요

  6. 가을바람 2010/10/01 1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과 사진을 보면서 내내 제가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좋은 글과 사진 너무 감사합니다^^

  7. 술에술탄 2010/10/03 1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스탄티노플,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군요.
    터키 정부에서 훈장이라도 수여해야 할 듯.

  8. 중독 2010/10/03 19: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다에 나와 바닷바람 맞으며 성벽을 따라 걷고, 성안으로 들어와 건축문화관람도 하고 좋은 사람들과 정원에 앉아 도시락 먹고... 주말 나들이 하고 가는 기분입니다. 나들이하러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9. 수몰 주민 2010/10/10 2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다 위를 걷다, 참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예전 어느 시인의 '물 밑을 걷기'란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수몰된 어느 마을에 얽힌 첫사랑과의 추억 이야기로 기억됩니다.
    바다 위를 걷든 물 밑을 걷든 옛 기억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든, 개인이나 국가의 역사든 말입니다.

오늘은 '공정사회'의 한 가닥인 '고시제도'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하고자 합니다.
과연 지금의 고시제도로 무한경쟁 시대의 급변하는 환경을 선도할 인재를 선발하고 그들을 통해 전문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져봅니다.

그동안 고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환경의 차이, 출발점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역할을 해왔습니다. 돈 없고 빽 없어도 열심히만 하면 주류가 될 수 있다는 한줄기 희망이었습니다. 시험 하나에만 의존하긴 했지만 엄격하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선발했기 때문에 공직사회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기반이 되어왔습니다. 이 나라 산업화를 선도한 세력도 국가・사회적 혼란기에도 굳건히 기틀을 지켜온 세력도 이들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좋은 머리와 능력, 주말도 없는 열성적 근무 자세로 혹여 다른 일을 했더라면 훨씬 잘 먹고 잘 살았을 거라는 가족과 친척의 안쓰러운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은 묵묵히 공직을 수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한번 따져봅시다. 이 나라 최고의 벼슬자리에 앉으려면 적어도 고려시대,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시나 문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에 대한 바른 시각, 사회를 바라보는 도덕성 정도는 가려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지식 덩어리의 크기가 합격의 기준이 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요? 물론 임용 전에 각종 적성검사, 면접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해 옥석을 가린다지만 근본적인 개선방안은 아닙니다. 또 그것을 믿을 사람 많지 않을 겁니다. 복잡다기(複雜多岐)한 현실과 다양한 국민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현재의 고시제도가 한계가 있다는 당연한 지적을 한 것입니다. 머리 좋고 게다가 품성까지 갖춘 사람이 뽑히기를 운(?)에만 맡겨서야 되겠습니까?

고시는 한 번 합격하면 평생을 보장받는 수단으로 고착되었습니다. 신분보장뿐만 아니라 외부와 경쟁도 필요 없으니 한방으로 인생역전이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공직에서 가장 기본이 돼야할 대민봉사정신, 공동체의식, 국가관 등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현할  여러 가치는 뒷전이 돼버렸습니다. 출세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성교육(?)은 대학이든 중·고교든 어디에서도 별 볼일 없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고시 합격하면 몇 개의 열쇠와 사랑하는 애인마저 바꾸는 세상이라는 말도 있지 않았습니까?

고시는 공무원 사회를 밖으론 닫혀 있고 제 식구끼리만 감싸주는 배타적 문화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고시귀족’들이 기득권 세력화하면서 나타난 ‘순혈주의’ 는 점차 도를 넘어섰고, 때문에 고시개편 논의는 비단 지금뿐 아니라 이전 정부 때부터 줄곧 제기돼 왔었습니다. 그때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만 깨달았을 뿐, 뒷걸음질만 쳤습니다.  

지금의 고시 제도가 그나마 가장 평등하고 공정한 경쟁제도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해는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지금의 제도 속에서 고시생들은 3~10년을 아무런 생계수단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게다가 일부는 가정생활까지 꾸려야 합니다. 합쳐 몇 백씩 하는 수험서, 고시촌 월세, 학원비까지... 여건이 갖춰진 사람들에겐 아무런 문제가 안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이것이 과연 ‘공정한 룰’인지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유전(有錢)합격, 무전(無錢)불합격’이란 말이 고시생 입에서 나오는 형편이니 평등이나 공정과는 더 거리가 멀어져 갑니다.

고시촌의 풍경

지금의 고시는 더 이상 '기회의 평등'을 보전해주는 도구도 되지 못합니다. 사법고시, 입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등에 도전하는 수험생을 연간 13만 여 명으로 추산합니다. 하지만 한 해 합격자는 모두 합쳐 1500명이 되지 않습니다. 1.2%도 안 되는 가능성을 보며 오늘도 이 제도만이 유일한 신분상승의 요술 상자로 믿고 불철주야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3년간 행시 합격자 중 이른바 'SKY대'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70%
  최근 3년간 한 번이라도 10명 이상 행시 합격자를 낸 대학은 'SKY' 포함 7개

13만의 고시낭인들이 1.2%에 속하기 위한 확률, 1.2% 안에서도 소위 SKY대를 제외하면 극소수에 불과한 이들의 신분 상승이 과연 '기회의 평등'을 보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극소수에 불과한 이들에게 고시제도가 아직도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일까요? 1.2% 안에서는 그나마 공정할지 몰라도 98.8%의 나머지에겐 그저 ‘쇼윈도의 평등’일 뿐입니다. 가진 것은 사람밖에 없는 이 나라 인적자원의 왜곡이자 낭비입니다.

지금과 같은 암기력, 집중력 중심의 고시제도가 있는 한 대학을 비롯한 공교육은 허물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서 열심히 외우고 쓰는 게 낫지 학교교육, 인성・교양교육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공교육이 무너지면 인격도 품성도 황폐해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고시촌 골방이 아닌 밝은 대학캠퍼스에서 젊음과 정직, 봉사와 탐구로 보낸 이들에게 공직을 맡게 할 방법은 없을까요? 그렇다고 당장 고시제도를 없앨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언제까지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각 분야 인재들이 골고루 등용되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야 합니다.

부산 팬싸인회에서 만난 대학생들과 함께


그중 하나가 기존 고시제도를 축소하고 특별채용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특채가 고시제도를 대체해서도 안 되고 대체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의 특채제도는 더욱더 엄격하고 공정하도록 전면 개편수준의 바람직한 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특채’라는 위화감을 주는 용어도 이 참에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최근 유 전 장관 문제로 특채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은 더 커져 버렸습니다. 오히려 유장관 문제로 특채는 ‘개천에서 용날 기회’를 박탈할 가능성이 크다고 믿게 됐습니다. 특채는 곧 특혜라 믿기까지 합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을 만든 것은 도덕적 개념을 상실한 주류의 책임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주류를 가장 많이 만들어 낸 고시제도의 골 깊은 그늘이기도 합니다.

또 일부에서는 특별채용제도가 ‘현대판 음서제도의 부활’이라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당장 유 장관 파문으로 ‘음서제 부활’이라는 자극적 주장에 힘이 실리듯 보일지 몰라도 고시제도 개선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공정사회라는 구호를 기득권을 옹호하는 데나 사회발전을 가로막는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공정사회는 출발부터 과정, 결과까지 모두 정당하고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정부도 본질과 다른 주장에 밀려 꼬리를 자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논의를 더욱 확대해야 합니다. 개방화·다양화·전문화라는 시대정신과 흐름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새로운 공직 임용제도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이를 투명하게 운용할 방법에 대해 논의해야 합니다. 인격과 교양, 전문성, 올바른 국가관 등이 제대로 반영되어 올바른 공직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시스템으로 바꿔야 합니다.

정상적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친 사람이 공직사회에도 정상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경제적 약자, 다문화가정 등에 대한 배려를 확대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공직사회의 담을 허물고 공직사회가 바로설 수 있습니다.

오늘밤도 불을 밝히는 신림동, 노량진 고시생들이 한 방 인생역전을 위해 머리를 싸매는 대신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름다운 토론이 꽃피는 마을로 변해야 합니다. 당장 바뀌는 것도 문제겠지만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더 큰 문제입니다.

※지난번 ‘주류, 위선적 주류’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일부 신주류의 이중적 행태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를 두고 글에서 주장했던 본질과 달리 여권내부의 싸움으로, 내각 개편관련 세대간 갈등으로 잘못 해석 ·보도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전체내용을 파악하지 않은 채 일부 행간의 자극적 내용만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글의 의도 역시 고시제도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을 극복하고 국가 미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인재가 공교육의 틀 안에서 배출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결코 고시관련 개인의 인격을 폄훼하기 위한 의도가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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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민호 2010/10/01 11: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니까...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겁니다.
    힘없고 백없는 사람들은 고시폐지에 대해서 반대를 합니다.
    왜 그럴까요 ? 힘있는 사람들은 자기 힘을 이용하여 자식들까지 권력을 마음대로
    줄 수가 있으니까...고시폐지를 주장하는 것이지요 !
    정치하는 사람중에 정말로 깨끗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노무현 대통령도 깨끗하지 않았었는데...누가 깨끗하겠습니까 ?

    • 콩콩이 2010/10/01 1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글에 본질을 잘못 이해 하신것 같군요. 님에 의견을 폄훼할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김의장께서도 님이 생각하는 문제점은 글에서 충분히 지적했고 다만 좀더 나은 방식에 대해 좀더 고민하자는 얘기아닐까요.

    • 과거제 2010/10/01 1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시제 폐지는 절대 안됩니다. 특채제도는 미국처럼 선거에서 이긴 쪽이 정책방향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위직을 선발하는 것이지 한국처럼 5급공무원까지 특채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시제 대신에 특채를 해야 한다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두가지입니다. 고시출신들이 철밥통을 끌어않고 끼리끼리 다 해먹는다는 것과 전문성을 갖춘 인력을 특채해야 한다는 것인데,
      모든 고시출신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또 이 문제는 공무원 사회의 문화, 즉 공무원 관리상의 문제이고,
      전문성있는 인재는 고시출신 공무원을 현실에 맞게 양성하여도 되는 문제입니다. 오히려 전문성을 빌미로 고위층의 자녀들을 위시하여 정권주변의 학자 등 ㅇ파리 비슷한 그룹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나라는 특채하면 100% 정실로 흐르기 때문에 안됩니다. 외국에는 입양아를 잘도 키우는데 한국사람들은 자기 자식 아니면 제대로 못키우는 거 보세요.
      특채가 안되는 이유중 또 하나는 특채 출신들은 성골일 것이고 고시출신은 잡종이 더 많을 것인데, 위기상황에서 곱게 자란 특채는 무기력할 것인 반면 잡종들은 위기를 이겨낼 것입니다. 우리가 급속한 경제개발을 하고 여러 위기를 극복한 것도 분명 똑똑한 공무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학에 맞는 학생을 선발한다는 미명하에 돈과 여유가 있어야 되는 입학사정관제를 비롯한 복잡한 대학입시제도, 법학과, 사법고시 폐지하고 돈 없으면 안되는 로스쿨제 하고 있고, 또 돈과 배경 없으면 근처에도 못가는 무슨 외교아카데미에다 행정고시도 특채로 한다니 이게 무슨 특권층의 쓰나미를 보는 것 같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지금 37%라는 특채 비율도 10%이하로 해야 합니다.

    • 과거제 2010/10/01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SKY 출신이 고시를 70% 이상 독점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시는데 공부잘하고 똑똑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고시제 아니던가요. 로스쿨 출신이나 추진할려고 했던 외교아카데미 출신이 독점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요? 고시는 누구나 다 할 수가 있지만 로스쿨, 외교아카데미는 상위계층만 들어갈 수가 있으니 독점문제는 휠씬 더 커지네요.

    • 과거제 2010/10/03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시출신이 전문성이 없다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 그들이 일껏 전문가 양성교육을 받아서 전문분야로 진출하더라도 그 때뿐, 계속적인 지원과 장려가 없기 때문에 다시 제너럴리스트로 되돌아 갑니다. 희망과 비젼이 없는 것입니다. 특채 논리대로 전문가를 특채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수분야 전문가로 채용되었어도 나중에 보면 일반직에 가서 앉아 있습니다. 결국 100이면 100 전문가 채용이 아니라 특정인사를 취직시켜 주는것이 주목적인 것입니다.

  2. 도시사람 2010/10/01 1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적으로 동감 합니다. 공부만 잘한다고해서 성공하는 사회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줄 아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공직에 진출해야 하지 않을까요?

    • 과거제 2010/10/03 0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더불어 살아갈 중 아는 지혜를 가진 사람을 채용하는 것과 공채/특채 문제는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같은 값이면 휴머니즘을 갖춘 사람을 공무원으로 뽑는게 좋겠지만 특채한다고 해서 휴머니스트를 선발할 수 있나요?

  3. 박재철 2010/10/01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위터로 올려습니다.
    권력은 권력을 낮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추진은 권력이 없는 사람은 사전면접도 보지 못합니다.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것이 공직사회입니다.
    만약 특채를 추진하려면 관계부처에서 심사를 하면은 절대 안되겠지요? 아니 정부관료뿐 아니라 정치자 또한 참여하면 안되겠죠?
    전문가이면서 민간인이 평가를 하고 심사를 해야 공정하지 않을까요?
    또한 특채에 있어 모든 구비서류 국민에게 공개를 하고 평가내용또한 공개를 할 수 있다면 가능 합니다.
    이것이 공정사회가 아닐까요?
    모든것을 숨기려고 하는것이 모든 국민이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중 하나입니다.

    • 맞다 2010/10/01 1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투명한 평가라면 환영!!!

    • 과거제 2010/10/03 0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특채를 공정하게 하기위해 무슨 인사위원회를 만들면 사회적 비용이 더 많이 듭니다. 후보자들이 모든 위원들에게 운동하러 다닙니다. 결국 돈이나 정실이 가능한 사람들에게 더유리한 조건을 제공합니다. 공채로 똑똑한 사람 선발하여 전문가로 제대로 양성하고 전문분야에 대한 모티베이션을 적절하게 제공하는 것만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며,
      특채에 따른 또 다른 문제를 피하는 길입니다.

  4. 선샤인 2010/10/01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이 사람을 평가 하는 것이 쉬운일이겠습니까? 어찌 됐던 지금에 고시제도에 문제점은 상당기간 논란이 되어왔던게 사실입니다. 다만 누구도 어떠한 방식이 참인지 속단하기 어렵다는 것이겠죠 김의장님께서 지적하셨듯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고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고시제도에 보완은 반듯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장임기 끝나신지도 얼마 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의장님 같은 지각 있는 지도자들이 사회전반으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논의 꺼리을 만들어 주시는게 진정 살아있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박재철 2010/10/01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문제점은 어느 누구나 문제점을 지적을 합니다.
      다만 그 해결 방법이 없기에 누구나 지적을 하지 않는것입니다.

      이런 제안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제안을 할때에는 문제점과 현행법 그리고 개선해야 할 내용을 보여줘야 이글을 보고 동의를 하는것이고 아니면 동의하지 않는것 아닐까요?
      아무런 대책도 방식도 의구심을 가지게 하는것이 제안은 아니지요.
      더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5. 양촌 2010/10/01 14: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문가를 외부에서 모시기 보다는 국가에서 전문가를 육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공직자의 외부파견, 재교육을 국가에서 준비해야 합니다.
    국가에서도 인재에 대한 투자없이 교육된 인재에 특별채용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외부전문가가 되는 것, 스펙을 쌓아가는 것, 그것은 가진 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할 우려가 있습니다.
    없는 사람들에게 스펙을 쌓는 일은 고시를 준비하는 것보다 더 가혹한 일입니다.
    외교부의 문제에서 보듯 없는 자들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외교부는 우려를 현실로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봐야 합니다.

    SKY에 집중된 고시합격 집중현상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갔고, 또 열심히해서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다.
    공평한 경쟁을 통해 노력하는 자가 승리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런 현상이다.

    고시낭인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개인의 가치관과 선택에 의한 결과를 국가에서 관리한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6. 종호 2010/10/01 16: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특채와 특혜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는건

    지적하신바 공정성입니다.

    고시의 평등함 조차 의혹을 가질수 밖에 없는 사회에서

    특채의 공정성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권력자들의 특혜로 무너진 신뢰를 다시 찾기 위해선

    반드시 리더들의 희생이 필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시의 문제점과 특채의 보강부분을 분명히 지적하신만큼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심에 응원합니다.

  7. 까치 2010/10/01 17: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부가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고 하는데, 과연 고시제도가 공정성을 갖고 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고시합격자의 70%가 SKY대 출신이라니 암기력하나로 교육의 흐름을 바꾸는 고시제도 저 또한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가 좋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엄청난 노력을 솟아 부어서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면 학교보다는 고시 출신이 더 인정받는게 현실입니다. 암기력 하나로 평가받는 현실이 과연 젊은이들의 미래를 보장 할 수 있을까요.

    이번 고시제도의 문제점 김의장님께서 정말 좋은 지적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루빨리 고시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해서 우리나라가 공정한 사회로 더불어 갈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8. BlogIcon jungup 2010/10/01 1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고시제도의 폐해로 인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제도라는 데 찬성합니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봉사"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시험보고) 공무원이 된 사람에게 국민에게 봉사를 요구하기는 어렵습니다.
    제도개선의 방향성은 "국민에게 봉사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공무잘하고 암기잘하고 좋은 대학 나온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에게 안정적 서비스와 장기적 측면을 고려하여 공무원은 정치적 중립과 신분보장을 해주는 것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금번 외교부 사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개혁과 발전의 틈새를 파고 뜨는 쓰레기 같은 고위층이 많다는 것이 국민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암세포 같은 존재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엄벌과 처단과 시스템적 예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9. 김삿갓 2010/10/01 1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시제도>와 <특채>를 효율적으로 현명하게 운용하자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정확한 지적을 해주셨다고 봅니다. <고시>라는 후진적인 제도가 신분상승의 사다리로 여겨지는 그런 분위기를 수정해야함과 더불어, 직업이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는 천박한 분위기도 고쳐나가야할 듯 합니다. 판검사가 우월하고, 국회의원이 뛰어나고,재벌이 훌륭하다는 그런 <계급의식>을 차차 해소해나가는게 바로 김형오 전 의장께서 강조하신 넓은 의미의 <열린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좋은 문제제기를 해주셨습니다.감사~~

  10. 생각 2010/10/02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특채제도 확대되면 결국 국회의원들이 자기 보좌관들 보내는 자리로 쓸 가능성도 너무 높아 보입니다.

    그런 제도는 문제가 매우 크죠.
    특채가 되던 뭐가 되던 객관적으로 보편타당한 테스트와 기준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걍 ~ 뛰어나니까 정도의 불명확함으로는 곤란합니다.

    더 강하게 주장해보세요...
    표가 우수수 떨어질 것입니다.

  11. 유희 2010/10/03 0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특채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고시제도만을 고집하여서는 안됩니다. 물론 암기 위주의 필기시험을 통하여 지원자의 ‘자질’을 판단하는 현재의 고시제도로는 지원자의 지적 능력이나 인성을 가려내기에 역부족입니다. 이를 위해 대학에서 운영되고있는 소위 ‘고시반’역시 대학교육의 참뜻과 능력있는 인재를 가려내기 위한 고시제도 모두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고시에 있어서는 필기시험만이 공정한 선발 방식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다양한 재능과 면접 등 보다 종합적인 기준을 도입하는 동시에, 특채의 운영과정에 있어서는 공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과거제 2010/10/03 0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원자의 지적능력이나 인성, 다양한 재능과 종합적인 기준, 좋은 말이지만 현실에 적용하는 순간 특정인을 채용하기 위한 논리가 되어 버립니다.
      고시출신중에서 이런 것이 부족한 사람은 극소수이고, 특채로 뽑으면 오히려 귀족이지만 현실감없는 이상한 아이들이나 이기적인 교수들만 득시글거리게 됩니다.

  12. 유희 2010/10/04 0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답글 감사합니다^^ 물론 특채가 현실적으로운용되면서 잡음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고시출신자가 종합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극소수라는 의견에는 쉽게 긍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네요^^ 특채의 심사기준을 명확히하고 채용과정에 투명성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고시제는 고시제 대로 개혁해서 운용해야 하겠지요. 프랑스의 ENA나 일본의 커리어도 모두 각각의 개혁점을 찾고있지 않습니까? 어느 제도라도 각각의 한계는 보이게 마련이고, 이를 유연하고 공정하게 개혁할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13. 정희영 2010/10/04 0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질과 인품을 지닌 인재를 선발하고 이들을 공직에 맞는 재목으로 키워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과정에 있어서 혈연, 지연, 학연이 하나의 자질이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물이 고이면 썩듯 무엇이든 변화는 필요합니다. 현 고시제도에 있어서도 개선이 필요하지만 청춘을 고시촌에서 오롯이 바치고있는 이들을 배제한 제도가 되어서는 안될것입니다.

  14. 경쟁? 2010/10/04 0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시제도를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고시제도의 문제점은 공감하고 있는바입니다.
    제도, 그리고 누가 뽑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한국 사회에서 상징적인 '개천에서 용난다'는 관념-출신을 뛰어넘는 평등의 개념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일겁니다.
    ============================
    항상 고시제도를 둘러싸고 나오는 이야기 중에 좀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왜 경쟁시대에 공직사회의 경직성을 개선하고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논리를 새로 공직사회에 들어가고자 하는 인재들에게만 들이미는 것입니까? 같은 제도라 하여도 엄연히 세대가 다릅니다. 얼마전 떠들썩했던 G세대들마저 들어가서 동형화되는 것은 오히려 공직사회의 진입이후 내부적 환경이 더 그렇게 만드는게 아닌지요.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야 고시제도 정도 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 해도 기득권층이 경쟁과 발전을 내세우면서 내부의 시스템이 아닌 선발방식에 대한 논의만 내세우는 것은 결국 반쪽짜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네요.

  15. 딜레마 2010/10/04 1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형오 의장님의 트위터 내용도 살펴보았는데요 공교육의 범위 안에서 그 내용을 착실히 학습한 이들에게 많은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요지인것 같습니다만
    언제가 이런 문제가 터지긴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우리 사회는 무언가에 특화된 학원이 유독 많거든요
    어떤 평가제도가 생기면 그것에 특화된 - 그 제도의 통과(합격)만을 목표로 하는 학원들 말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외국의 입시제도나 평가제도까지도 그 출제성향을 분석/파악하여 '이번 시험에는 이 문제가 출제될 순서니까 이것만 달달 외워라!'라고 가르칠 정도입니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게 맞아 떨어지구요
    스포츠 종목에서 데이타 분석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고시도 다를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학원들이 성과를 올리면 올릴수록 공교육도 그것을 따라가게 됩니다
    사실 공교육에서 다뤄야 할 것은 시험이나 평가의 통과만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인성을 갖춘 인재를 키워내야 하는 것인데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서 (심층적으로 하나의 시험만을 분석하고 준비해온 사람들에 비해서) '무능력한' 것이 되고 마는게 아닐까요

    아~ 답답하네요

  16. 쏘시오 2010/10/06 16: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시제도 문제가 많고 이른바 특채도 문제가 많지요. 물론 그 반대로 고시제도 좋은 점이 많고 특채도 장점이 많지요.
    문제는 고시제가 더 좋으냐 '특채'(유 장관 딸 일로 어감이 무척 나빠졌습니다)가 더 좋으냐는 건데요.
    논쟁의 핵심은 누구한테 좋으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시를 준비하는 분들, 이미 고시에 패스한 고급 관료들은 고시제 존속을 바랍니다. 왜냐면 고시제 존속이 자신들에게 좋으니까요. 이 과정에서 그들이 봉사해야 할 대상인 국민은 빠져있습니다. 저는 특채를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현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먼저 지적하고 있습니다. 공무원, 특히 고급공무원일수록 국민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권력을 국민의 이익, 국민을 위해 쓴다고 생각하시나요? 미안하지만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시제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공무원 제도 채용 전반에 대해 보다 진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공무원 합격자들의 '보상심리'는 이제 고시 패스자를 넘어 7급. 9급 공무원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합격햇으니 누가 나를 자르냐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게 소신이라는 긍정적 작용으로 나타낼 때도 있지만 선민의식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공무원 지금처럼 공부만으로 뽑아서는 안됩니다.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필기시험(면접이 잇다지만 글쎄요..)성적순으로 합격자를 가리는 방식은 지양해야 합니다. 이런 채용제도는 초등학생도 주관할 수 있습니다. 대신 얼마나 공직친화적인가, 다시 말해 국민에게 봉사하려는 서비스가 되어있냐를 가리는 채용으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행안부는 그런 채용에 자신없으면 인사 채용분야를 과감히 민간에 이양해야합니다. 삼성,LG의 인사파트나 외국계 회사의 인사파트 전문가를 채용해 공무원 선발제도에 대해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김형오 의원님이 이런 작업을 주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정부를 국민에게 돌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