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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오가 만난 세상/김형오의 문화 카페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8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8
-전쟁의 전초 기지 루멜리 히사르

  그 전쟁은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언어나 문자를 통한 공식 선언만 생략되었을 뿐 그 자체가 무시무시한 선전포고였는지도 모릅니다.

▲ 루멜리 히사르 입구에서. 증명사진처럼 돼 버렸지만 나로선 두 번째 방문이다. 이런 차림으로 다니니 참 편하고 좋다.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돌들이 ‘부조화 속의 조화’를 이루며 성벽을 구성하고 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문 양 옆에 매달린 갓등도 제법 운치가 있다. 옛날에는 여기에 수문장이 지켜 서 있었겠지?

  *1452년 4월 15일,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드디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음을 확인하고는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전해 겨울부터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가장 협소한 지역에서 크고 작은 돌들을 한 곳에 모으며 뭔가를 준비하던 오스만의 군사들이 술탄 메메드 2세의 지휘 아래 본격적으로 요새를 새로 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 ‘유럽의 성’이란 뜻)가 그 주인공입니다.

  *강성했던 비잔틴 제국은 점점 쇠락하여 15세기 무렵에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 일부에만 통치력이 미칠 정도로 왜소해져 있었다. 100만을 헤아리던 도성의 인구도 5만 명이 채 안 되게 줄어들어 있었다. 반면 오스만 투르크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장악하고 발칸 반도로 진출한 뒤 비잔틴의 남은 영토를 잠식해 나가 콘스탄티노플을 ‘육지 속의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 바다 위 유람선에서 바라본 루멜리 히사르의 전경. 장엄하고도 웅장하다. 성벽 길이는 250여 미터, 높이는 15~33미터, 두께는 3~6.5미터에 이른다. 3개의 큰 성탑과 9개의 작은 탑을 공격과 수비에 모두 유리한 구조로 연결해 놓았다. 술탄 메메드 2세가 직접 설계 및 감독을 맡아 5000명에 이르는 인부와 병사들을 독려해가며 지었다고 한다. 술탄은 하릴 파샤, 자가노스 파샤, 사루자 파샤 등 세 명의 중신이 분담해 책임지고 공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경쟁을 유발해 공사의 완성도와 진척 속도를 높였다. 성탑의 이름도 축성한 신하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콘스탄티노플은 그 당시 요즘으로 치면 자유무역지대 비슷한 기능을 하던 무역항으로서 제노아와 베니스 상인들을 비롯해 아라비아·아르메니아·유대인 등 오리엔트 지역의 여러 민족들이 해상 무역 경쟁을 벌이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은 날로 강성해지는 오스만 투르크의 눈치를 살펴가며 명맥을 겨우 잇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알라신도 부수지 못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던 난공불락의 성벽만을 수호신처럼 의지한 채 말입니다. 다행히 오스만의 전임 술탄 무라드 2세는 통치 기간 중 1422년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포위하려던 시도가 무위로 끝난 이후 경제적 이득만 취할 뿐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지는 않았습니다.

▲ 루멜리 히사르의 늠름한 위용. 건너편 아시아 쪽 연안에는 아나돌루 히사르가 자리해 있다. 왼쪽으로 해협을 길게 가로지른 다리는 보스포루스 제2대교인 *파티 대교. 정복자(파티) 술탄 메메드 2세를 기념해 이름을 붙였다. 옛날 같았으면 바다와 가까운 주탑 위에서 대포알이 저 흰 배를 겨누고 날아갔으리라.

  *원래 이름은 파티 술탄 메메드 대교로 1988년 여름에 개통되었으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긴 현수교이다. 아시아와 유럽 대륙 양단에 세워진 교각 거리는 1090미터, 중앙 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64미터, 대교의 폭은 39미터로 왕복 8차선 도로이다. 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갈 때는 차량 통행료가 무료이나 유럽에서 아시아 쪽으로 들어올 때는 통행료를 내야 한다.

  그러나 무라드 2세의 급사로 1451년, 그의 열아홉 살난 아들 메메드 2세가 *다시 술탄의 자리에 오르자  상황은 급격히 변했습니다. 이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시작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루멜리 히사르는 말하자면 그 정복을 위한 상징 탑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이 말했듯이 이 도시는 ‘모든 세계 정복의 열쇠이자 세계의 지정학적 심장부’인 보스포루스 연안에 위치해 있었으니까요.

   *메메드 2세는 이례적으로 두 차례의 술탄 재위 기간을 갖고 있다. 1444~1446년, 1451~1481년. 전임 술탄인 무라드 2세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1444년, 고작 열두 살인 아들 메메드 2세에게 정식으로 양위를 하고 은퇴했다. 하지만 내각과 군대가 거만하고 고집 센 소년 지도자에게 불만이 많은 데다가 유럽 국경 지대의 분란이 끊이지 않아 여론과 정치적 필요에 의해 다시 권좌에 복귀했다. 그리고는 5년 뒤 무라드 2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메메드 2세는 두 번째로 술탄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성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지어졌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완공일이 8월 31일이라니 겨우 넉 달 반 만에 그 거대하고 견고한 성을 구축한 셈입니다. 이로써 *보스포루스 해협은 루멜리 히사르와 **아나돌루 히사르, 두 개의 거센 손아귀에 의해 목을 움켜잡힌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술탄은 마주보고 있는 두 성에 군대와 대포를 배치함으로써 해협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거머쥐게 되었고 비잔틴 제국의 보급로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위한 강력한 교두보가 마련된 셈입니다.

  * 보스포루스는 터키어로 보그하즈. 동음이의어로서 ‘목구멍’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당시 투르크족들은 루멜리 히사르를 ‘보그하즈 케센’이란 별칭으로도 불렀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칼날’ 또는 ‘목구멍의 칼날’이란 살벌한 뜻이다.

  ** Anadolu Hisar, ‘아시아의 성’이란 뜻으로 메메드 2세의 조부인 술탄 바예지드가 1394년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 연안에 지은 요새. 바예지드는 당시만 해도 비잔틴 황제의 승인 아래 이 성을 지었다. 하지만 메메드 2세는 그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루멜리 히사르를 신축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항의의 뜻으로 도성 안에 있던 600명가량의 투르크 인들을 붙잡아 감금했지만 곧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는 모두 석방했다.

▲ 원근법과 건물 구도를 무시하고 그린 두 요새 그림. 위쪽 성채가 아나돌루 히사르, 아래쪽 성채는 루멜리 히사르이다. 각각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가장 폭이 좁은(650여 미터) 동쪽과 서쪽 연안에 마주보고 서 있다. 비슷한 크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루멜리 히사르의 규모가 훨씬 더 크고 높다.

▲ 루멜리 히사르에서 찍은 아나돌루 히사르의 원경(遠景). 아시아와 유럽이 이 좁은 해협(650미터~3.6킬로미터)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진다. 주탑 위로 빨간색 터키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두 성채의 크기가 그것을 지은 두 사람, 할아버지와 손자의 서로 다른 야망의 크기를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 앞 바닷가에 네모와 세모의 조합으로 건축된 집들이 마치 레고로 지은 듯 예쁘고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술탄은 포고령을 내려 보스포루스 해협을 오가는 모든 선박으로 하여금 요새 앞에 멈추어 검문을 받도록 했습니다. 명령을 어기는 배는 침몰시킨다면서 위협적인 대포 3문을 바다와 가장 가깝게 지은 탑에 배치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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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금 루멜리 히사르의 스케치풍 그림과 요새의 구조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본문과 캡션에 이미 설명해 놓은 내용이지만 영문 표지판 내용이 궁금하다면 비록 내 몸으로 조금 가려지긴 했지만 영어 공부 삼아 한번 읽어 보기 바란다.

  11월 초 흑해에서 출항한 두 척의 베니스 선박이 정지 명령을 거부했다가 대포의 공격을 받았으나 용케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2주 후 똑같은 시도를 하던 세 번째 선박은 포탄에 맞아 침몰하고 선장과 선원들은 포로로 잡혀 참수를 당해야 했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삽시간에 공포의 바닷길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술탄의 콘스탄티노플 공략 시점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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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탑의 내부. 나선형 회전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지하까지 합해 6층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엔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왼쪽엔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가 배치되어 있다. 비잔틴 시대의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탑 안으로 비쳐든 햇살이 훌륭한 조명기사 역할을 해주어 멋진 예술 사진이 만들어졌다.

  우리 일행은 그 살벌했던 보스포루스 해협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유람선을 타고 통과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와 주변 풍경, 그리고 요새는 난생 처음이라고 감탄을 거듭하면서…. 하지만 어느 순간 저 우뚝 솟은 루멜리 히사르 성 위에서 대포알이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다는 상상을 하자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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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안쪽에 1452년 당시와 그 이후 실전에 사용되었던 오스만의 대포들을 진열해 놓았다.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을 공격했던 큰 대포는 보이지 않았다. 거포는 성벽 위에 올려놓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발포하면 그 반동으로 성벽이 훼손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 섹시한 대포알?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영화 제목이 갑자기 떠오르게 하는 묘한 모양의 대포알이 돌기둥 위에 놓여 있다. 가운데에 홈을 파 놓은 까닭은 아마도 밧줄에 묶어 성벽 위로 끌어올리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바다를 향해 쏘던 대포 발사대 구멍. 지금은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나뭇잎 저편은 바다이다. 내부 벽이 화염의 흔적인 듯 그을음으로 까맣게 덮여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에서 흔히 보았던 것처럼 여기도 안쪽 구멍이 넓고 바깥쪽 구멍은 좁은 형태이다. 그러니까 방어와 공격 모두를 유리하게 만든 구조이다.

  실제로 우리는 루멜리 히사르의 가장 높은 성탑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 당시 병사들이 대포와 화살을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쏘았는지 실감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난간도 없는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모험한 보람이 있었지요. 전망이 탁 트인 보스포루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발 밑은 비록 아찔했지만 술탄이 왜 여기에 요새를 구축했는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은 그 무시무시했던 루멜리 히사르가 박물관 겸 야외 공연장으로 탈바꿈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이었습니다.

  그런 예는 많습니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5편에서 소개한 갈라타 타워도 오랜 기간 군사용 감시탑으로 쓰였지만 지금은 나이트클럽과 레스토랑으로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 보스포루스 해협은 물살이 빠르고 거세다. 바다 표면에 울퉁불퉁 주름이 잡혀 있다. 대포알이 배를 스치기만 해도 전복될 것 같은 느낌이다. 큰 대포알이라면 배 근처에만 떨어져도 선박이 요동을 쳤을 것 같다. 중견 작가 한승원씨의 「그 바다, 끓며 넘치며」라는 해양 소설 제목이 문득 생각난다. 저 멀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보인다.

  물론 그 반대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평화롭던 학교 교실은 포로수용소가 되고 운동장은 적들의 제식 훈련장이 되고 극장은 야전 병원이 되는 경우는 우리도 이미 60년 전에 겪지 않았습니까.

▲ 스탠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루멜리 히사르는 요즘 종종 야외 공연장 및 전시장으로 활용된다. 특히 한여름 밤에는 터키의 톱스타들이 연주하는 음악과 함께 축제의 불꽃들이 밤하늘을 수놓는다. 콘스탄티노플 전쟁의 전초 기지였으며 그 뒤 포로수용소 역할도 했던 이곳이 이제는 평화의 공원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역사는, 그리고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서고금의 전쟁에 관한 격언 중 음미할 만한 몇 개를 소개합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전쟁 이야기와도 맥락이 닿는 금언들입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라.”-로마 격언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침략에 있다.”-아돌프 히틀러
  “항상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맨토르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있을 것이다.”-알버트 아인슈타인
  “전쟁의 세계에는 두 마디 단어밖에 없다. 이기느냐, 지느냐.”-윈스턴 처칠
  “휴전은 다음 전쟁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이승만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연장이다.”-칼 폰 클라우제비츠


▲ 루멜리 히사르의 야경. 군사 요새라기보다는 동화의 나라 같은 느낌이다. 왠지 오늘 밤 저 성 안에서는 환상적인 공연과 함께 연인들의 로맨스가 무르익고 있을 것만 같다. 아래사진 왼쪽으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 주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가 시시각각으로 빛깔을 달리 하며 ‘이스탄티노플’의 밤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많은 격언들이 평화를 지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준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방위력, 자주국방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주변 국가, 이해 당사국들과의 신뢰 및 우호 협력 관계 역시 너무나 중요함을 이어지는 다음 편(9편)에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석양이 보스포루스를 곱게 물들였다. 이스탄티노플의 부유층이 자가용처럼 이용하는 요트로 보이는 이 배는 해 저무는 바다를 미끄러져 보금자리를 찾아 가고 있다.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이 바다, 1452년과 1453년, 그땐 결코 이렇게 평화롭지 않았다.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9편에서는 종군 기자가 된 심정으로 그 당시 격렬했던 해상 전투의 현장으로 배를 몰고 가 볼 생각이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이 지도는 15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플의 모습을 담고 있다. 현대 지도를 쓸까 하다가 비록 축적과 원근감은 애매하지만 바다 모양이 뚜렷하게 강조되어 있어 등장시켜 보았다. 왼쪽 육지 성벽 옆 해자 모양도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로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 아래는 마르마라 바다, 콘스탄티노플과 갈라타 사이를 흐르는 건 골든혼이다. 오른쪽 위의 해협이 바로 보스포루스이다. 보스포루스 왼쪽 연안은 유럽, 오른쪽 연안은 아시아다. 따라서 루멜리 히사르(왼쪽 동그라미)와 아나돌루 히사르(오른쪽 동그라미)는 대략 저 위치쯤에 있었을 것이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