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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5 아시아경제: 時代를 묻다]물과 불, 그리고 공기

김형오 2025. 10. 15. 17:41

전 정부 댐 건설 계획 절반 중단
'더 성급한' 후퇴, 정책 일관성 의문
AI산업 전력 확보도 기본자원 기반
세계 최고 원전기술·안전 갖췄지만
원전 회귀 글로벌 흐름 역행하는 韓
존재 위험성보다 안전 관리가 핵심
AI시대 에너지 경쟁력의 갈림길



지난 1년을 도쿄에서 생활하며 어쩌다 무료하고 적적할 때면 '서울보다 맑은 공기를 마신다'며 위안을 삼곤 했다. 실제로 맑은 날이면 도쿄 도청에서 90㎞ 떨어진 후지산 정상이 또렷이 보일 만큼 공기가 깨끗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서울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떠나기 전의 칙칙하고 매캐했던 매연과 황사는 사라지고 '살아 있는' 공기가 상큼하게 폐부로 스며들었다. 맑고 푸르던 어린 시절 고향 하늘을 서울에서 다시 보는 듯했다.

이유가 뭘까. 황사와 오염 물질의 상당 부분은 바람을 타고 중국에서 넘어온다. 급속한 산업화와 무분별한 화석 연료 사용 탓에 중국은 물론 우리까지 피해를 보았다. 그러던 중국이 다급해졌다. 강력한 배출 규제와 전기차 대량 보급 등으로 베이징 공기가 눈에 띄게 개선됐고 그 영향이 서울에도 미친 것이다. 물과 불, 그리고 공기가 미래에도 여전히 핵심 자원임을 새삼 깨닫는다.

얼마 전 환경부는 신규 댐 후보지 14곳 가운데 7곳의 추진을 중단하고, 나머지 7곳도 공론화를 거쳐 건설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사실상 백지화다. "극한 홍수나 가뭄 대비에 부족한 작은 댐이고, 정밀한 대안 검토도 없이 추진됐다"는 이유를 들었다. 불과 1년 전 윤석열 정부에서 "2년간 모든 대안을 검토한 결과"라며 내놓은 방침을 정권 교체 몇 달 만에 뒤집은 셈이다. 대규모 기반 시설은 수십 년을 내다보고 설계·건설·운영이 이어져야 한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새 정부에서 어떤 전문가들이 얼마나 심층적 정밀 검토했는지 의문이다. 지난 정부가 '성급했다'면서 새 정부는 왜 '더 성급하게' 거둬들이는가. 정책은 엄밀성, 일관성, 예측 가능성을 통해 신뢰를 쌓는다.

댐이 생긴다면 주민들은 여러 이유를 내세워 반대하고, 환경단체들도 가만있지 않는다. 지역 민원은 민원대로 해소하면서 국가적 과제를 추진하는 것이 정부의 일이다. 예부터 치산치수(治山治水)는 국정의 근본이었다. 그런데 정권만 바뀌면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게 우리 환경 정책이다. "강물은 흘러야 한다" "재(再)자연화를 추진하겠다"는 장관 발언은 문재인 정부의 4대강 보 해체 논리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이 19세기식 목가적 낭만에 머물러 있을 때인가. 우리는 극심한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 속에서 폭우와 가뭄, 맑은 물 확보에 비상이 걸린 21세기를 살고 있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진보' '보수'는 모두 가짜다.

이재명 정부는 인공지능(AI) 시대를 주도하겠다며 투자와 지원을 약속했다. 반가운 일이다. 앞으로 최소 10년은 AI가 주도하는 인류문명사가 될 것 같다. 그러나 AI도 결국 물과 불(전기)이 있어야 굴러간다. 챗GPT 시스템만 해도 질문 하나에 수천, 수만 대의 컴퓨터가 동시 작동해 전기 소모가 많다. 업그레이드와 학습, 데이터 축적을 위해 더 많은 전력이 든다. 많은 전기 소요로 엄청난 열을 내는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서버를 식히려면 또 대량의 냉각수가 필요하다. 반도체 공정에선 불순물 1ppm만 섞여도 회로가 불량이 돼 백만 분의 일 단위까지 정수·정화해야 한다. 깨끗한 공기, 충분한 물, 안정된 전기야말로 AI 산업의 토대다. 그렇다면 이 막대한 전력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태양광과 풍력은 계절 편차가 큰 데다 산과 계곡이 많고 평야는 좁은데 인구가 밀집한 한반도 지형에선 경쟁력이 떨어진다. 보조금 없이는 시장이 성립되기 어렵고, 원자재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며, 고장이나 사용 후 처리 단계에서 엄청난 산업 폐기물이 발생한다. 전량을 수입해야 하는 액화천연가스(LNG) 또한 가격 변동성과 공급 리스크를 안고 있다.

문득 문재인 정부 시절 '탈원전'의 망령이 되살아난다. 원전의 설계·건설·운영 수준은 우리가 세계 최고다. 값싸고 튼튼하며 단기간에 건설해 안전하게 운용할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이다. 수십 년의 연구와 현장 경험, 국민적 성원으로 일궈낸 성취건만 기술과 능력을 내던지다시피 하면서 세계 시장을 놓쳤고, 고급 인력이 눈물을 머금고 일터를 떠났다. 풍력, 태양광 같은 신재생 에너지가 토지 변경 허가 등 각종 특혜 속에 각광받는 사이 산지 훼손과 폐패널 발생 등 환경 부담도 커졌다.

이재명 대통령도 원전에 부정적이다. "건설에 장기간이 소요되며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임기 5년의 시간 제약에 쫓겨 '빨리빨리' 성과를 내려는 조급함이야말로 위험하다. 설령 원전 건설이 10년 이상 걸린다 해도, 그 성과는 시간과 세대를 초월한다. 사람은 가도 업적은 남는다.

'위험하다'는 인식 자체가 때론 위험하다. 위험하지 않은 인프라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예산을 핑계로 백업을 않고 안전관리를 소홀히 했다가 얼마 전 국가 자료를 통째로 소실하지 않았는가. 원전이 위험하다면 화력발전소, 변전소, 아파트, 자동차도 다 위험하다. 핵심은 안전 관리다. 그 점에서 우리 원전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안전 기준과 실적을 갖고 있다. 수십 년 동안 큰 사고 한 번 없었다. 원자력의 역할을 둘러싼 건전한 토론은 필요하지만 원전 억제로 간다면 역사에 오명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원전에 소극적이면 산업과 기술은 위축된다. 그런데 미국·중국·영국·프랑스 등은 다시 원전을 짓고 있다. 중국은 신규 원전까지 합치면 100여기에 이르며, 많은 설비가 서해에 면해 있다. 만약 그중 하나라도 사고가 나면 해류와 바람을 타고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온다. 그들에겐 한마디 말도 못 하면서 정작 우리 기술은 '위험'하다며 묶어둘 것인가. 나라마다 원전을 짓겠다고 나서는데, 우리는 세계 최고 기술과 안전성을 스스로 포기하려 한다. 가장 수출 유망주이며 장기적으로 국가 비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요인을 스스로 갉아먹으려 한다. 경쟁국이 전문가들을 유혹하는데 애국심에만 호소해 버티라 할 수는 없다. 이런 식의 중단과 심리적 압박이 계속된다면 인재는 떠나고, 그 빈자리에서 진짜 사고라도 난다면 어쩔 것인가.

물·불·공기, 이 세 가지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필수 불가결한 자원이자 소중한 요소다. 우리가 가진 세계적 경쟁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나라라면 어찌 희망이 있겠는가. AI 시대, 한국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김형오 전 국회의장


[2025-10-15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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