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로그 | 미디어로그 | 방명록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10
- 아야 소피아, 그 파란만장한 역사와 사건들


  수수께끼 하나. 16세기 초반까지 10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컸던 단일 건축물은?
  수수께끼 둘. 그리스 신전이었던 터에 3차례 기독교 성당을 짓고 그것을 그대로 이슬람 사원으로 쓰다가 박물관으로 바꾼 건물은?
  수수께끼 셋. 건축 이후 1500년 동안 1000번 이상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위용을 자랑하며 현대의 건축가들에게까지 불가사의로 남은 건물은?
  수수께끼 넷. 세계 각지에서 해마다 20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 건물을 보려고 찾아오는 곳은?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수수께끼들의 정답은 모두 하나, 그렇습니다, 바로 ‘아야 소피아’입니다. 그 이름만 언급했는데도 이내 그 웅장한 모습이 떠오르면서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스탕달이 만약 아야 소피아를 보았더라면 또 다시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만큼 아야 소피아는 ‘스탕달 신드롬’, 그 이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제격인 경이로운 ‘작품’입니다. 건물 자체는 물론 내부 구석구석, 장식품 하나하나가 모두 심금을 두드리는 걸작입니다. 게다가 거기에 깃든 역사적 숨결과 체온을 대하고 나면 감동은 증폭됩니다.

*『적과 흑』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그림을 보다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황홀경을 경험한 데서 비롯된 용어. 뛰어난 예술 작품 앞에서 압도당하고 마는 현상을 일컫는다.


▲ 아야 소피아 박물관 부관장인 할릴 아르차 씨(왼쪽), 그리고 고고학자인 데피네 씨와 함께. 아야 소피아에 대한 정보가 담긴 신간 영문 책자를 선물한 아르차 씨와 친절한 안내를 해준 데피네 씨에게 감사드린다.

  ‘이스탄티노플’에서 첫 눈에 나를 사로잡은 것도 바로 이 아야 소피아였습니다. 2009년 1월과 2010년 1월, 국회의장 신분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해 이미 두 차례 아야 소피아를 다녀간 내가 지난 8월, 의장직을 마치자마자 다시 그 도시로 날아가 아야 소피아를 연 사흘 집중 탐사한 것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나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깊이 있는 설명을 듣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나눈 시간은 매우 유익했습니다. 서울에서 어렵게 입수해 번역한 책(『Hagia Sophia』,H Kἄhler, NewYork, 1967)과 현지에서 구입한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은 훌륭한 개인교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도시를 떠나던 날 받은 진귀한 책을 한국에 처음 소개할 수 있는 행운도 누렸습니다.(후술)

  그렇습니다, 아야 소피아야말로 내가 명명한 도시, 긴 세월 동안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과 그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사연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얼굴을 지닌 ‘이스탄티노플’의 의미를 대변할 만한 상징적 존재입니다. 거기에는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서양과 동양,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 과거와 현재가 별다른 충돌 없이 한 건물 안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습니다.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서쪽 상층부를 재건축한 모습을 담은 옛 그림.(위 왼쪽) 돔 위에 세워진 비잔틴 시대의 십자가가 뚜렷하다. 물론 미너렛(첨탑)은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이슬람 사원이 된 이후로는 돔 위에 십자가가 없다.(위 오른쪽) 그러나 이 건물 내부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모자이크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하기아 소피아에는 위 왼쪽 그림에서처럼 십자가 모양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아래 그림)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 이전에 그리스 신전이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미 BC 7세기부터 그리스 식민지였고,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의 높은 곳에 신전을 세우는 전통이 있었는데, 아야 소피아는 도성에서 가장 높은 ‘신성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현재의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으로 세 번째 (콘스탄티누스→테오도시우스→유스티니아누스) 새로 세워졌습니다. 물론 우리가 보고 온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 건물은 세 개의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변신을 거듭해 왔습니다. 물론 용도도 바뀌었습니다. 성당(Hagia Sophia)에서 모스크(Aya Sofya)로, 다시 박물관(Ayasofya Mϋzesi)으로 탈바꿈을 했습니다. 이런 예는 세계사를 통틀어 아마 유일할 것입니다. 스페인 코르도바에 있는 *메스키타도 견줄 만한 대상이 못 됩니다.

*Mezquita. 스페인 우마이야 왕조의 창시자인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창건한 사원. 후대의 통치자들이 확장을 거듭해 이슬람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모스크가 되었지만 기독교 세력에 재정복 당한 뒤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5세 황제에 의해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완공된 성당을 보고는 “어디에나 있는 건물을 짓자고 여기 아니면 볼 수 없는 건물을 부수고 말았구나.”라고 후회를 했다고 한다. 다행히 사원의 중심부만 개조해 가톨릭 성당과 이슬람 모스크가 공존하고 있다. 천장의 정교한 모자이크는 비잔틴 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종교와 피부 색깔, 국적이 다채로운 지구촌 여러 나라에서 온 관람객들로 개장 시간 내내 북적인다.(아래 사진) 모자이크 건축물에 어울리는 ‘모자이크 문화 현상’이랄까. 문을 열기 전부터 몰려든 인파로 장사진을 이룬다.(위 사진)


  비잔틴 제국에서 기독교의 본산 역할을 한 하기아 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 성당으로 건립되었지만, 그 이듬해 지진 피해를 입고 404년 종교 문제로 촉발된 반란이 일어나 소실됩니다. 그러고는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재건축되었지만 532년 1월, *니카의 반란에 의한 화재로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맙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당시, 비잔틴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8일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뜨렸던 쿠데타. 532년 1월 10일 정치적·종교적으로 대립하던 청색파(Factio Veneta)와 녹색파(Factio Prasina)간에 히포드롬에서 전차 경주 응원 도중 싸움이 벌어져 주동자들이 사형을 언도받자 이들은 황제에게 감형을 요구했다. 하지만 탄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양파가 연합해 ‘니카(승리)’를 외치면서 거리로 몰려나왔다. 여기에 편승해 황제의 반대파였던 원로원 의원들은 이전 황제의 조카인 히파티우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왕비 테오도라의 간언(諫言)으로 피난 가려던 생각을 바꾸고 반란군을 급습해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성당은 소실되고 말았다.


▲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415년에 재건축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서쪽 측면 모습.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인 532년, 니카의 반란으로 인해 또 다시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자 반란을 진압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곧바로 불탄 자리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합니다. 목재가 아닌 석재를 쓰고 그전보다 훨씬 더 장대하게 규모를 키운 이 건물은 5년여(532년 2월~537년 12월) 만에 초스피드로 완공되었습니다. 황제는 거의 매일 공사 현장에 나타나 인부들을 독려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뛰어난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고, 황금 90톤의 비용을 투입하는 등 건축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1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군대 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일을 했습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동원된 연인원만도 무려 2000만 명을 헤아립니다. 마침내 대역사를 마무리 짓고 성당이 봉헌되던 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감격에 겨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솔로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
  (아마 이 순간 황제도 ‘스탕달 신드롬’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프로코피우스 또한 다음과 같은 묘사로 중축된 하기아 소피아의 위용을 찬미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정도로, 돛을 올린 배처럼, 다른 건물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솟아올라 도시의 나머지 부분을 굽어보도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 저서로는 『전사(戰史)』『비사(祕史)』『건축기(建築記)』 등이 있다. 그는 『건축기』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또 이렇게 칭송했다. “이 대성당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원주 위로 치솟아오른 거대한 돔으로부터 나온다. 그 모습은 견고한 석조 건물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사슬에 매달려 우주를 덮고 있는 것 같다.”



▲ 정면에서 찍은 아야 소피아 박물관. 대칭과 비대칭 사이를 넘나들며 오묘한 건축미학적 매력을 자아낸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명 간의 화해 및 공존을 상징하듯이….



  *세계 건축사상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야 소피아는 1520년 세빌리야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1000년 세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지금도 성 베드로 성당, 성 밀라노 성당, 성 바울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를 자랑합니다. 물론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성당입니다.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아야 소피아는 BC 8세기부터 1300년간 지어진 모든 예술적 조형물의 집합체로서 건립(537년) 이후 줄곧 사원 건축 양식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축기술의 발달이 무색하게 그 뒤로도 오랫동안 아야 소피아를 뛰어넘을 만한 건축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6개 건축물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콜로세움(원형 극장), 영국의 스톤헨지(거석 기념물), 이탈리아의 피사 사탑,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중국의 만리장성이다.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터키 유수의 건축가이자 유력 언론의 칼럼니스트인 알리 에사드와 이스탄불에서 처음 만나 친교를 맺었다. 알리는 내가 떠나던 날 자신이 갖고 있던 희귀본 서적에 사인을 해서 내게 선물했다. 제목이『콘스탄티노플의 기념물』인 이 책은 독일 베를린에서 1855년에 간행된 서적을 100권 한정판으로 찍어낸  영인본이다. 일련 번호는 021/100. 세상에서 100권밖에 없는 책의 21번째 주인 자리를 내게 양도해 준 알리에게 다시금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이 책은 특히 아야 소피아의 건축공학적 특징을 수준 높은 그림과 함께 mm 단위로 정교하게 그려 놓았다. 지금은 사라진 유물 조형까지 상세히 설명되어 역사적 가치 또한 높다. 판형이 신문(대판)보다도 커서 원형을 실감할 수 있다. 여기 실린 그림들은 2,3편에서 좀더 상세하게 소개할 생각이다.


  이 대성당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영욕이 엇갈려 교차합니다. 8세기와 9세기에는 아이코노클래즘(Iconoclasm, 성상 파괴 운동)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영예로운 일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큰 행사나 축제들은 관례처럼 하기아 소피아에서 치러졌습니다. 성대하고 호화로운 황제의 대관식도 여기서 열렸습니다.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축하 의식을 행하던 곳도 이 성당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박해받는 사람들의 망명처였고, 동서 교회가 분리되면서 레오 6세의 대사들이 1054년 7월 16일 제단에 교황의 교서를 올려 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비잔틴 시민들이 소란과 폭동을 일으켜 문이 부서졌지만 니카의 반란 때처럼 건물이 파괴되는 불상사는 겪지 않았습니다.

▲ 532년 1월 니카의 반란 당시 화재로 소실된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가 세워져 있던 부지에서 발굴 작업 도중에 나온 비잔틴 유물들. 당시 건물은 구덩이에서 보듯이 지금보다 훨씬 지표면이 낮았다. 이 도시는 매장량이 풍부한 광산과도 같다. 땅을 파면 고고학적 가치가 빛나는 유물들이 나온다.


  1204년 성지를 회복하겠다며 떠난 제4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발길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어 도성을 점령했을 때 하기아 소피아는 다시금 위기에 놓였습니다. 십자군들은 성당의 황금 모자이크 등 값진 성상과 성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베니스로 가져갔습니다. 보물을 수레에 쓸어 담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제단마저도 금으로 된 것으로 생각해 뜯어내어 베니스로 싣고 가다가 대리석 장식이 너무 무거워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261년 8월 15일 동로마 황제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재입성해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함으로써 옛 명성과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 건물 외벽에는 벽돌들이 거칠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래는 대리석으로 바깥을 마감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래도 대리석으로 마감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외벽에 대리석을 고정시켰던 못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452년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황제와 조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피렌체 공의회에서 채택된 동서 교회 통합 율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외세(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구하려면 서방의 지원이 필요해 정치적으로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비잔틴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면서 신앙의 상징이었던 이 대성당에서 율령이 공표되면 아마도 통합에 동조할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부감은 컸습니다. 교회 통합이 공표되자 더 이상 공개적인 반발은 안 일어났지만, 반대파인 대다수 시민들은 통합을 지지하지 않은 사제가 집전하는 성당에서만 미사를 보았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졌습니다.

  1453년 5월 26일,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으로 두려움에 떨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밤안개가 걷힌 뒤 이상한 빛 한 줄기가 하기아 소피아 돔 언저리를 어른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술탄 메메드 2세에게도 그 빛은 눈에 띄었습니다. 술탄은 “이런 현상은 진정한 신앙의 빛이 곧 그 성스런 건물을 비추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라는 현인들의 해석을 듣고 흡족해 했습니다. 반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도성 시민들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 빛을 바라보았습니다.

▲ 오스만 제국의 유명한 건축가 시난에 의해 첨탑들이 새로 세워지면서 성당에서 모스크로 용도를 바꾼 아야 소피아의 16세기 모습. 그 앞으로 예니체리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탄 술탄이 지나가고 있다.


  1453년 5월 28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비잔틴 사람들은 간절하게 울려대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황금 모자이크가 수많은 등불과 촛불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하기아 소피아로 모여 들었습니다. 지난 5개월 여간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반대해온 도성 시민들이 애써 외면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던지 그날만큼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갈망했습니다. 수많은 지진을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대성당이 전쟁으로부터도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절박한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장엄하고도 비장한 분위기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도 저녁 늦게 아라비아 말을 타고 대성당에 와서는 시민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평화를 간구하는 마지막 미사를 올렸습니다.

*황제는 대성당에 가기 전 신하들을 향해 말했다.  “남자는 모름지기 다음 네 가지를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신앙과 조국, 가족과 군주다.” 참석한 모든 이들이 일어나 황제를 위해 목숨과 가정을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천명했다. 그러자 황제는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지난날 나의 허물을 사과하노라. 나로 인하여 마음의 고통을 받았다면 용서하기를.”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의 마지막 고백성사와도 같은 황제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장내는 온통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대성당을 나온 황제는 황궁으로 가 거기에서도 앞에서와 똑같은 작별 의식을 치렀다. 그러고는 말에 올라타 전장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도성 시민들이 본 황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황제와 술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쓸 생각이다.)


  오스만 군의 함성과 귀청을 찢을 듯한 군악대 소리, 지축을 뒤흔드는 대포 소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신자들로 가득 찼고 간절한 기도 소리도 높아져만 갔습니다. 도성 시민들은 선지자의 옛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이교도들이 성벽을 뚫고 이 거룩한 성당 안까지 쳐들어온다 해도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들을 지옥에 처넣을 것”이라는…. 시민들은 천사를 기다리며 철야 기도를 드렸습니다.

▲ 백마를 탄 술탄이 성벽이 허물어진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운명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름은 아야 소피아가 되었고, 지붕 위의 십자가가 내려진 대신 이슬람 사원을 상징하는 미너렛이 세워졌다.


  그러나…,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천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투르크 군은 날이 채 밝기도 전 아야 소피아의 굳게 닫힌 청동 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따라 허락된 **‘사흘간의 약탈’ 기간을 의식한 듯 전리품을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반반하게 생긴 처녀와 건장한 젊은이들이 일차 표적이 되었습니다. 몇몇 젊은 수녀들은 유린을 당하느니 차라리 순교를 택하겠다며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투르크 군은 성당 안의 값진 물건들도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았습니다. 250년 전 이미 제4차 십자군들이 모자이크와 대리석 등을 약탈해 가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던 대성당은 머지않아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존재한다. 예컨대 오스만의 역사가들은 “이슬람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면서 이미 노후화된 건물이었기에 쉽게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을 뿐 굳이 폭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고 부인한다.

**오스만 군대의 전통. 항복하지 않는 도시에 한해서는 정복 이후 3일 동안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는 권한을 장병들에게 부여했다. 1453년 전쟁에서도 술탄의 최후 공언으로 오스만 군은 사기가 충천해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원동력이 되었다.



▲ 박물관 남쪽 출입구 근처에 있는 술탄 마무드 1세가 1740년에 지은 샤드르반. 모스크에 예배 보러 들어가기 전에 심신을 정결히 하기 위해 손발을 씻던 곳이다. 가운데에 분수대가 있지만 철망으로 가려놓아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앞에서 청춘 남녀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그 상황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은 술탄 메메드 2세였습니다. 도성 정복 이후 하기아 소피아에 다다른 그는 말에서 내려 바닥의 흙을 한 줌 집어 터번 위로 흩뿌린 다음 대성당에 들어가 제단 앞으로 걸어가다가 대리석 조각을 떼어내고 있는 투르크 병사를 발견하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왜 대리석을 파괴하는 것이냐?”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포로와 돈이 될 만한 물건이면 충분하다. 이 도시의 모든 건축물은 나의 것이다. 너 따위가 감히 이런 훌륭한 건물을 지을 수나 있겠느냐? 내 허락 없이는 문고리 하나 손대지 못한다.”
  술탄은 병사를 향해 칼을 겨누었고, 그 병사는 질질 끌려 나가 성당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 양 옆으로 돌출된 벽 위의 동그란 테두리 안에는 얼핏 꽃무늬처럼 보이는 색다른 문양이 조각돼 있다. 하산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스위스의 건축가 포사티 형제가 새겨 넣은 변형된 십자가 문양이라고 한다.


  술탄은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비잔틴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고는 벽면을 가득 채운 모자이크가 내뿜는 장엄한 색채의 향연에 잠시 찬탄의 눈길을 보내다가 이 대성당을 즉시 모스크로 개조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설교단 위로 올라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점령 3일 후인 1453년 6월 1일, 모스크로 바뀐 아야 소피아에서는 최초로 메카 쪽을 바라보며 이슬람식 성(聖) 금요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우르자미(대사원)로 재탄생했습니다.

▲ 건립 연대와 건립 주체가 서로 달라 모양이 제각각인 아야 소피아의 미너렛들. 첫 번째 첨탑은 메메드 2세가 1453년 남동쪽에, 두 번째 첨탑은 그로부터 100년 뒤 셀림 1세가 북동쪽에 세웠다. 그 뒤 무라드 3세가 서쪽에 두 개의 첨탑을 세움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모스크의 미너렛은 보통 짝수로 만들어지며 2개 혹은 4개가 보편적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기에 첨탑이 세워진 예는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정교회 신도들과 교회들은 그 후로도 존속했습니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이란 속설은 적어도 술탄 메메드 2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술탄은 정복한 땅의 이교도 백성들에게 통치 기간 내내 종교적 관용을 보였습니다. 정해진 세금만 바치면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교회 통합 반대론자인 학자풍의 그리스 수도사 겐나디오스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한 술탄은 그리스 정교회의 존속을 허용했습니다. **성사도 대성당이 모스크로 바뀐 하기아 소피아를 대신해 총대주교 성당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술탄은 그리스도 교인들도 자신들처럼 구약성서의 유산을 공유하는 ‘경전의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성당을 사원으로 바꾼 뒤에도 술탄은 기독교 성화를 훼손하지 않고 얼굴이 그려진 모자이크는 천으로 가리듯이 얇은 나무판자로 가린 채 의례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지만, 사실은 이슬람에 대한 대표적인 왜곡된 표현이다. 이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마지막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슬람의 호전성과 무력을 이용한 강압적인 종교 전파를 강조하고 적개심을 높이기 위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곧 피정복자인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교도에 대한 위기감이 빚어낸 왜곡되고 과장된 말로써 보편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슬람은 피정복민들에게 무슬림보다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는 대신 신앙의 자유, 남녀 평등, 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해 주었다. 코란(2:256)에도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 속에서부터 구별되느니라.”라는 구절이 있듯이, 이슬람의 빠른 전파는 무력이나 강제적 개종보다는 오히려 관대와 포용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더 많았다.

**콘스탄티노플 주도로인 카리시오스 문(현 아드리아노플 문)에서 아야 소피아와 옛 황궁으로 가는 대로변에 있는 3중벽의 교회.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도 다른 성당과 달리 거의 파괴되지 않았다. 총대주교 겐나디오스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워 곧 거처를 규모가 작은 파마카리스토스 수도원 교회로 옮겨 이곳이 그리스 대주교 본산이 된다. 성사도 대성당은 그후 파티 자미(정복자 메메드 2세 수도원)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수도원 안에는 메메드 2세와 그 부인의 묘소가 있다.



사진출처: http://flic.kr/p/6kjr3t

▲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 고색창연하게 우뚝 솟아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1573년에 착공해 240년 만에 완공되었다. 바로크, 도리아, 이오니아, 고딕, 르네상스 등이 하모니를 이룬 고전 건축 양식의 집합체이다.


  나는 멕시코시티 중앙광장에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을 보고 온 뒤로 이슬람 정복자들의 관대한 종교적 포용성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지진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대성당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한 이후 아즈텍 문명기의 대신전을 흔적도 없이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입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졸지에 종교와 언어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도 멕시코의 국교는 가톨릭이며, 모국어 역시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이슬람 정복자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각설하고, 그렇게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갑니다.(이 시기에 일어났던 아야 소피아의 변화는 2편과 3편에서 얘기할 생각입니다.)

▲ 보수 및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 이스탄불이 2010년 EU(유럽연합)가 지정한 유럽의 문화 수도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다. 반바지 차림의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이 여기가 이슬람 국가란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아름다운 원형, 반원형 돔들을 사진 찍으려던 우리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수리 중이라서 위험하다며 부관장이 말렸기 때문이다.


  1923년 10월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유럽 각국의 외교적 압력에 맞부딪쳤습니다. 그는 그 절충안으로 1935년 2월 이 유서 깊은 건물을 국립박물관으로 바꾸어 개장했습니다. 아울러 일체의 종교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대통령 자신도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첫 방문했을 때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원에 들어갈 때는 누구나 신발을 벗어야 하는 관례를 무시함으로써 이제 그곳이 더 이상 이슬람 모스크가 아님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무례(?)를 보면서 터키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아야 소피아는 916년간은 비잔틴 교회로, 481년간은 오스만 사원으로 사용되어온 곡절 많은 역사를 접고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공존하는 인류의 공동 유산, 세계인들의 자부심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 아야 소피아 박물관 쪽에서 바라본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자미) 전경. 6개의 첨탑 가운데서 2개는 카메라 렌즈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0년대 초에 아야 소피아를 모델 삼아 지은 이슬람 사원으로서 파란색과 녹색 타일로 장식돼 있는 내부가 트레이드마크이다.


  나는 1500년 동안 영광과 오욕을 한 몸으로 겪으면서 비잔틴과 오스만, 두 제국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아야 소피아에서 쉽게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내 머리 위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날갯짓도 가볍게 날아올랐습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오늘도 눈부신 자태를 자랑하며 공존과 화해의 표상으로서 그곳을 찾는 불특정 다수의 지구촌 시민들에게 감동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스탕달 신드롬’도 경험하겠지요?

▲ 하산 박사(왼쪽)와 내 오랜 벗 우헌기 兄. 아야 소피아 탐사기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후속편에 쓰게 될 아야 소피아의 건축미학적 특징과 지금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하산 박사를 못 만났더라면 얻기 힘들었을 정보였다. 헌기 兄의 영문 원서 번역과 사진 취재 역시 큰 보탬이 돼 주었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호메로스 2010.11.19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말로 블로그판 <일리아드 오디세이>입니다.
    그러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읽은 독자가 드물듯이
    과연 이 작업도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을는지...
    그러나 아무튼 참 대단하십니다.

  2. 레드블랙 2010.11.20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가슴 안에서 거문고와 비파가 현을 강렬하게 긁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도 <스탕달 신드롬>에 빠지는가 봅니다.

  3. 앙코르 2010.11.21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주마간산, 하지만 다음에 다시 탑승해 이스탄티노플 구석구석을 샅샅이 탐사해야지.

  4. 프로페셔널 2010.11.22 04: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문가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깊이는 깊게, 넓이는 넓게...그러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
    읽는 맛이 납니다.
    사진의 적절한 배치도 베리 굿!

  5. 동네주민 2010.11.22 1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곳에 사는 사람들은...저 웅장한 건축물을 매일 볼텐데...
    우리가 사진으로 보면서 느끼는 이런..벅찬 감동을 매일 느낄까요??

    매일 매일 느끼는 벅찬 감동이라면...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것 같네요...

    우리 동네에는....??

  6. 포에버 2010.11.25 0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야, 아야, 아야! 그 수많은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화해와 공존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는
    이스탄티노플의 아야 소피아, 정말 숙연해집니다.

  7. Halil Arça 2010.12.08 1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ello,

    This is Mr. Arça, I received your post.
    Can you please send me your e-mail adress.
    halilarca@yahoo.com
    Thank you

  8. 2010.12.09 1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dddd 2011.02.28 0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성사도 성당이 무었때문에 부숴졌고
    그리스 본토인들은 얼마나 차별받았는데.....

  10. BlogIcon eatwithmeist 2012.12.18 04: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많은 연구와 정성을 다해 작성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정보얻고 갑니다. 현재 이스탄불에 살고, 터키의 알려지지 않은 일상생활을 알리고자 블로그를 열었는데..제 술탄아흐멧 관련 포스팅에 님 블로그 링크했습니다. 괜찮으시죠? 감사합니다.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5
                              - 모던과 클래식, 골든혼 성곽 탐사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사진 고르느라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찍은 사진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보여드리고 싶은 장면들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이스탄티노플’은 그만큼 매력이 넘쳐나는 도시입니다.

  이번 편은 갈라타 타워로부터 시작됩니다. 탐사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 도시의 전경을 높은 곳에 올라 사방팔방으로 관찰하기 위해 맨 먼저 찾아갔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라타 탑을 내려와서는 골든혼을 옆에 끼고 승합차로 천천히 달렸습니다. 골든혼(할리치)은 영문(Golden Horn) 의미 그대로 한자로 쓰면 ‘금각만(金角灣)’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은 걸까요?
  이곳 사람들은 두 가지 설을 들더군요. 첫째, 골든혼에서 침몰한 배들과 함께 가라앉은 금은보화가 많기 때문이라는 설. 둘째, 석양 무렵이면 짐승 뿔 모양을 한 골든혼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때문이라는 설. 둘 다 일리 있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설을 떠나 골든혼은 그 자체가 ‘금싸라기 바다’입니다. 그만큼 지정학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니까요.

▶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세운 *갈라타 타워 안내 표지판. 화재와 지진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재건축과 보수 공사를 거듭하며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의 역사를 갈라타 지역 가장 높은 곳에서 묵묵히 지켜본 이 도시의 산증인이다.



*갈라타 타워 : 528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맨 처음 건립했으나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으며 1348년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크리스티 투리스’(그리스도의 탑)란 이름으로 재건축되었다. 오스만 시대에도 여러 차례 재건축을 하며 화재 및 기상 관측, 적의 침입 감시, 포로수용소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에는 목재였던 내부를 콘크리트로 바꾸고 일반인들에게도 관람을 허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올라가면 터키 민속춤과 밸리댄스를 감상할 수 있는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이 있다. 타워의 높이는 62.59미터, 꼭대기 장식물까지 포함하면 66.90미터이다. 벽두께는 3.75미터, 안쪽 지름은 8.95미터. 탑을 둘러싸고 외벽에 14개의 창문이 나 있다.

  골든혼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를 승합차로 둘러본 우리는 차에서 내려 해안 쪽 성곽을 탐사했습니다. 육지 성곽(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과는 달리 이곳은 외(Single)성벽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골든혼 자체가 든든한 방어선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매립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1453년 당시에는 개펄과 바위가 많아 해안 성벽으로의 접근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보여 드릴 사진에서와 같이 두께와 높이, 그리고 강도(强度) 면에서도 만만치 않은 성벽이어서 오스만군도 이곳은 주요 공략 지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세월이 흘러 개펄 해안이 점점 굳어 육지화되면 비잔틴은 그 지점까지 또 성을 쌓았습니다. 어떤 성벽은 다른 성벽보다 유난히 더 앞으로 튀어 나왔거나 2중 혹은 3중 성벽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외부 세력이 감히 쳐들어올 엄두를 못 내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증축이 돼간 겁니다. 다만 성이 축조된 이래 꼭 한 번 4차 십자군 전쟁 때 골든혼 쪽 방어선이 뚫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당시에도 온전했던 골든혼 쪽 성벽들은 육지 성곽과는 달리 지금은 옛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도로 개설 및 도시 개발 과정에서 인위적인 훼손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열 마디 말보다 한 컷의 사진이 더 생생하게 증언해 줍니다.
  자, 그럼 이쯤에서 사진과 함께 하는 오늘의 탐사를 시작해 볼까요.

 

▲ 갈라타 타워를 등지고 이경숙씨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설명에 열중하고 있다. “의장님,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헤자르펜 아흐멧 찰레비’란 사람이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이 탑 꼭대기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아시아 지역인 위스크다르 언덕까지 날아가는 신기록을 세웠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 ‘헤자르펜 타워’로도 불리지요.”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전망대에서 종이비행기나 몇 개 접어 바다 쪽으로 날리고 올 걸 그랬다.

▲ 갈라타 타워 전망대에서 카메라에 잡은 아야 소피아(사진① 왼쪽),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사진 ① 오른쪽), 이스탄불대학교 중앙 탑(사진 ②), 쉴레마니예 모스크(사진 ③).
전망대는 360도 조망이 가능한 구조여서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비롯해 마르마라 해와 골든혼(금각만, 하리치)은 물론 이스탄불 구시가지 및 신시가지 전체를 빙 둘러가며 볼 수 있다. 1453년 전쟁 당시 만약 비잔틴군이 이 전망대를 이용할 수 있었더라면 전황도 좀 더 달라졌으리라.

▲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골든혼 쪽 성벽들. 벽돌과 돌·흙 등을 이용해 기하학적이면서도 자연스런 미감을 뽐내고 있다. 돌과 돌, 벽돌과 벽돌, 돌과 벽돌 사이에는 강력한 식물성 접착제를 발라 놓았다. 오른쪽 성벽은 2중 성벽 모습을 하고 있다.

▲ 유네스코의 예산 지원을 받아 복원한 성벽 모습. 일률적이고 인위적이어서 예스런 멋이 사라졌다. 화장과 성형 수술로 치장하고 멋을 낸 미인을 보는 듯하다. 수비군이 창검이나 활로 맞서 싸우기 유리하도록 네모난 구멍 뒤는 넓고 앞은 좁은 형태이다. 일정 부분 방패 역할을 해낸 것. 부챗살 모양을 하고 있는 구멍 위의 아치는 비잔틴 양식의 성벽임을 말해 준다. 이스탄불은 1985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복원 공사가 최근에 이루어졌더라면 이보다는 나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시대의 비잔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복원된 성곽 모습을 본다면 현대 문명의 수준을 얕잡아 보지는 않을는지….

▲지각 변동으로 땅이 솟아올라 문과 자동차의 왼쪽 벽 부분이 반 지하 상태로 변했다. 1층 표시와 3층 표시 부분은 대칭을 이룬다. 1층도 지표면의 융기로 인해 거의 지하층이 된 상태. 창문들이 비잔틴 양식이다. 지붕 위를 보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란 가운데 잎이 무성한 나무가 앞머리를 건물 이마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 1500여년 된 성벽 위로 화살처럼 쏟아지는 여름 햇살 아래 각양각색 빨래들이 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마르고 있다. 중세와 현대의 기가 막힌 앙상블! 마치 퓨전 설치미술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 1898년에 완공된 불가리아 교회. 불가리아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보던 이곳의 원래 이름은 ‘성 스테판 교회’이다. 외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고딕 양식과 신바로크 양식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사전 제작한 주철 구조물을 다뉴브 강과 흑해를 거쳐 배에 싣고 와 조립은 이스탄불에서 하는 독특한 건축 방식을 사용했다. 이 교회는 정면이 골든혼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지만 터키가 비교적 타 종교에 관대한 나라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해마다 6월이면 이 교회에서 인터내셔널 이스탄불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 성벽 문을 뚫고 차도를 만들었는데 인도가 없다. 문화재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런 걸까. 성문을 통과하면 왼쪽 옆으로 작은 보행자 도로가 나 있다. 가슴과 등을 밀착시킨 청춘 남녀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성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 부분도 3중 성벽 못지않은 두께를 갖고 있다.

▲ 성벽 위에 연립 주택을 짓고 사는가 하면 성벽 사이에도 집이 있다. 빨래가 널려 있는 연립 주택 맨 꼭대기 층의 창문으로 어느 예쁜 소녀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가는 우리가 쳐다보자 부끄러운 듯 이내 안으로 숨어 버렸다. 창문 밑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면 다시 나타날까나.

▲ 1500년 된 성벽 위에 지어 올린 시멘트 건물 옆으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모던한 느낌의 화이트 하우스와 금방이라도 나무 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낡은 판잣집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성벽 틈에는 풀이 돋아나 있고, 그 밑으로는 폐건축 자재 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다. 무성하게 자란 무화과나무가 쓰러질 것 같은 집을 떠받쳐 주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 성벽 위로 연립한 현대식 주택들. 우리나라도 왕년에는 이런 적이 있었던가.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이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는 ‘이스탄티노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짧은 기간에 급팽창해 1000만을 훌쩍 넘는 인구를 갖게 된 세계적인 거대 도시가 갖는 한계일까. 유럽 쪽이 아시아 쪽보다 땅값이 비싸다 보니 특히 골든혼 성곽 지역이 더 크게 훼손된 측면도 없지 않으리라.

▲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문양 같은데 훼손도가 심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단순한 장식일까, 다른 용도가 있는 걸까. 이 도시에는 이런 애매한 문화유산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 골든혼 쪽 성곽을 누비고 있는 4인조 탐사대. 맨 앞의 모자 쓴 사람이 나, 김형오이다. 성곽 위의 아파트나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는 하도 많이 보아서 무덤덤해졌다. 왼쪽 차도 건너로 골든혼을 끼고 흘러가는 바닷물이 웅덩이처럼 보인다.

▲ 골든혼 성곽 안쪽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본부(페네르 그리스 관구)를 향해 가고 있다. 기독교의 성물과 성녀들의 묘지, 주교가 앉는 의자, 귀중한 성상 등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다.

▲ 그리스 정교회 벽면에 새겨져 있는 비잔틴의 상징 쌍두 독수리. 두 개의 머리는 왕국의 주권과 동서양을 초월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상징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은 지금도 국가의 상징으로 문장(紋章) 등에 이 쌍두 독수리 문양을 쓰고 있다.

▲ 그리스 정교회에서 만난 벽화. 정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성 조지)의 용감한 모습이다.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자 14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게오르기우스는 회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칼이나 창을 들고 용(드래곤)을 무찌르는 백마 탄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성벽과 가로등 사이를 통과해 좁은 길로 가다가 문득 그런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 좁은 길이 생명 길이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길임을 강조한 말씀이다. 물론 ‘구원’을 얻기 위해 나선 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도시에서 ‘영원’한 제국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 뒤로는 13절과 14절에 걸쳐 이런 말씀이 이어진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그리스풍으로 지어진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그리스 요리를 점심으로 먹었다. 우리가 타고 다닌 승합차와 운전기사 에르한의 모습이 보인다.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와 우리말 실력이 보통이 아닌 친구였다. 내 카메라폰에 담은 이 식당의 내부도 한 쪽 벽면은 성벽을 그대로 활용한 모습이었다.

▲ 그야말로 부서진 성벽이다. 잔해만 남았다. 그래도 그 부서진 면면을 보면 이 성벽이 얼마나 단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실감이 난다.

▲ 골든혼 성벽 바로 뒤 안쪽에 있는 오스만 시대의 수도.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난 뒤에 대대적으로 수도 시설을 확충 보급했다. 치수(治水)야말로 정치(政治)의 기본임을 알았던 까닭이리라.

▲ 성벽의 높이와 두께를 실감해 보자. 거구의 사나이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진 위로도, 그리고 왼쪽 옆으로도 성벽은 더 높고 길게 이어져 있다.

▲ 아타튀르크 다리 부근에 있는 지발리 성문 앞. 성문 위로 모스크가 보이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져 있다. 골든혼 연안 성벽에 있던 도시로 들어가는 몇 개의 성문 중 현재는 아야 성문과 함께 유이(唯二)하게(?)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성문이다. 그러나 1453년 전쟁 당시에는 골든혼이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주어 이쪽 지역의 성곽들은 온전한 모습이었다. 지발리 성문 오른쪽 벽에는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만든 현판▶이 붙어 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오스만 사령관 ‘제베 알리 베이’가 무혈입성한 문이라고 한다. 그 뒤 세월이 흐르면서 사령관 이름(제베 알리)을 따 마을 이름이 ‘지발리’로 바뀌었다. 왼쪽 벽에는 흰색 표지판이 걸려 있다. 내용은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 웬 깃발들이 이렇게 줄지어 세워져 있나. 알고 보니 대학교 깃발들이었다. 위 사진 성벽에 ‘쓰레기 투기 금지’ 팻말을 걸어놓은 바로 그 대학이다. 민가뿐만 아니라 이런 공공건물도 성벽을 담벼락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학 간판도 성벽을 이용해 붙여 놓았다.

▲ 골든혼 건너편 카슴파샤 지역. 선박과 조선소·크레인 등이 보인다. 1453년 여기에서 무슨 일이?

▲ 원근감을 무시하고 그린 골든혼의 옛 모습. 입구에 굵은 방어 철책을 설치해 놓았다. 보기에도 견고한 이 쇠사슬 때문에 술탄의 배들은 골든혼으로 진입을 하지 못한다.

 

  맨 밑에 실어놓은 두 컷의 사진은 ‘이스탄티노플 여섯 번째 이야기’의 예고편 격입니다. 다음(6편)은 ‘배가 산으로 가다’ 편이 이어집니다.

 

*P.S. 이스탄티노플 4번째 이야기에도 많은 분들이 격려의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몇 분의 글을 발췌해 옮겨보면….

  “불타는 탐구욕과 활활 끓고 있는 그 열정에 심심한 존경을 보냅니다. 건강도 살펴가며 하시기 바랍니다.”(이우종님)
  “옛 우물에서의 은어 낚시! 이스탄불이라는 우물에서 등비늘 반짝이는 은어들을 많이 낚으신 것 같군요.”(피플님)
  “다음에 꼭 그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네요. ‘이스탄티노플’ 명예시민으로서….”(두륜님)
  “그림을 보고 있으니 그 정밀한 묘사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 그림 읽어 주는 남자?”(산리마을님)
  “역사는 투쟁 속에 진보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황제와 술탄의 대결, 흥미진진합니다.”(Socio89님)
  “글맛과 묘사의 역동성과 생생함의 차원이 다르다. 진정성을 갖고 역사의 진실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며 다가갈 때 그만큼 살아 있는 글이 된다는 것도 잘 보여준다. 함락의 막바지에 운명처럼 다가오는 오스만 군대의 대포 소리와 군악대의 우렁찬 소리 사이로 들리는 비감한 교회 종소리를 회상하는 필자의 묘사는 너무나 압권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못지않은 김형오 의장의 ‘이스탄티노플 이야기’를 이제는 지인들과 나눠야 할 것 같다.”(술탄님)

  그밖에도 여러 분들이 덧글로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힘으로 이 벅찬 작업을 감당해 나갑니다. 앞으로도 의정 활동 틈틈이 시간을 내어 전심전력하겠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5편갈라타 타워(지도 윗부분, 빨간색 사각형 글씨)골든혼 성곽 일대(지도 윗부분, 빨간색 표시부분)를 탐사한 내용이다. 육지 성벽에 비해 훨씬 훼손 정도가 심한 지역이다. 성벽을 건물의 한 부분으로 삼아 이렇게 많은 집을 지은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 갈색 사각형 부분 3편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피플 2010.09.15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더풀!!

  2. 한가위 2010.09.16 0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름달처럼 풍성한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한가위 이후에도 기대할게요
    명절 잘 보내세요

  3. BlogIcon 김화자 2010.09.18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름달 처럼 넉넉하시고 풍요로 우신 추석 명절 되십시요.
    행복 하시고 따듯하신 한가위 되시길 기원 합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4. 세레나데 김 2010.09.26 1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전 연립 주택 창문 너머로 아름다운 소녀가
    얼굴을 내밀고 방긋 웃었습니다.
    어라, 다시 들어가 보니 그새 사라졌네요.
    신비스런 그녀를
    <이스탄티 걸>이란 이름으로 불러 봅니다.

  5. 소나티네 2010.09.27 08: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전 이스탄티걸이 또 고개를 쏘옥~~
    이스탄티노플 이야기는 그만큼 잔상을 많이 남깁니다

  6. BlogIcon 스압 2010.09.30 1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벽에 지은 집에 사는 이들은 기분이 어떨까 궁금합니다.
    '우리집 벽이 수백년전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라니!!'
    집에 값비싼 골동품 하나씩은 기본이겠네요. 부럽다. 돈 떨어지면 조금씩 팔아도...ㅋㅋㅋ

  7. 유한새 2010.09.30 2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기의 철옹성에 무혈입성이라...!!

  8. 만국기 2010.10.12 0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리하면서도 부드럽고, 냉철하면서도 따뜻하고, 깊이 있으면서도 쉽게 읽히는 탁월한 역사 기행문입니다.

  9. 형오투어 2010.10.12 2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컴퓨터가 바로 타임머신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이스탄티노플,
    그 가상의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 정말 끝내 줍니다.
    착륙하고 싶지 않네요.

  10. BlogIcon silk flowers 2010.10.18 0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멋진 역사의 도시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