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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마리의 황소가 끄는 수레에 초대형 대포를 싣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오스만 군사들. 백마를 탄 술탄의 양 옆에서 장총을 든 예니체리가 호위를 하고 있다.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는 들꽃들이 곧 닥쳐올 비잔틴 시민들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2009년 1월 이스탄불 군사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오스만 투르크 군이 배를 끌고 산(언덕)을 넘어갔다는 생뚱맞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통역 실수려니 생각했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만, 그거야 뭔가 어수선하고 중구난방인 상황에선 엉뚱한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또 그로 인해 세계 전쟁사를 바꾼 일대 전기를 만들었다니, 경이롭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서 1453년에  엄연히 있었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술탄 메메드 2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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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양군의 배치도. 흰 두건을 쓰고 백마를 탄 술탄(왼쪽 위)은 우르반의 대포를 앞세우고 메소테이키온 성벽 맞은편 400미터 지점인 리쿠스 계곡에 황금빛 막사를 설치했으며, 황제는 그에 정면으로 맞서 성벽 바로 안쪽에 비잔틴 정규군과 함께 포진했다. 육지와 바다 모두 술탄의 병사들이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다. 이 그림에서 잘려나간 지역까지 감안하면 오스만 군은 우선 수적(數的)으로 비잔틴 군을 압도했음을 알 수 있다.


  골든혼을 가로질러 선박의 침입을 봉쇄했던 방어 철책(위 그림 오른쪽 상단 및 아래 사진 참고)을 직접 보고 난 뒤로는 술탄이 배를 끌고 언덕을 넘어갔다는 역사적 사실이 감동을 넘어 전율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엄청난 굵기의 쇠사슬을 보자 비로소 1453년 전쟁 당시의 분위기가 눈에 잡힐 듯 실감이 났습니다. 그때부터입니다. 나는 21세의 청년 술탄(메메드 2세)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알면 알수록 매료되었습니다. 나중엔 술탄과 그가 점령한 콘스탄티노플이란 도시에 매몰되다시피 해서 틈만 나면 관련 서적을 읽고 자료를 뒤적였습니다. (국회의장 시절 여야 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청년 술탄과 그의 야심찬 정복 전쟁, 콘스탄티노플의 결사항전을 떠올리면서 오히려 마음을 차분히 달랠 수 있었습니다. 처절했던 당시 상황에 지금 국회를 비교할 순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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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1453년 당시 골든혼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방어용 쇠사슬(컬러 사진).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400년이 지난 19세기까지도 연결 고리 간격이 18인치에 이르는 이 거대한 쇠사슬이 도시 주변에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당시에 찍은 이 한 장의 흑백 사진이 증명해 준다.


▲ 마르마라 해안 성벽의 동쪽 끝 지점. 왼쪽 끝에 톱카프 궁전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신시가지(페라 지역)가 펼쳐져 있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면 골든혼으로 접어든다. 골든혼 입구 성채 아래 에우게니오스 성 탑과 페라 방파제 위의 탑 사이에 연결돼 있던 쇠사슬은 거기 어디쯤 위치해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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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전과 성벽 너머로 펼쳐진 바다를 놓아두고 이 대형 선박들은 왜 산(언덕)을 넘어가고 있는 걸까. 이 그림을 보다가 나는 문득 내 책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아름다운 나라』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알카에다 지도자인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의 아버지 모하메드는 혹시 술탄의 이 기발한 역발상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이 맞닥뜨렸던 난관을 돌파했던 건 아니었을까. “어리석은 사람은 체험을 통해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를 통해 배운다.”란 말도 있듯이….

*“사우디의 숙원 사업이었던 메카에서 타이프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 현장. 하지만 험준한 바위산 위로 무거운 건설 장비를 옮길 도리가 없어 모두가 손을 놓고 있을 때 모하메드 빈 라덴은 불도저·포크레인 등의 중장비를 분해해 낙타 등에 싣고 현장까지 옮긴 뒤 재조립하는 기발한 방법으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사우디의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 또한 발상의 전환이 낳은 창조적 아이디어지요.”(『이 아름다운 나라』 162쪽)


  일부 문헌에는 메메드 2세의 참모로 일한 이탈리아 사람(성명 미상)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 자체가 애매하고 불분명한데다가 만약 그랬다 해도 그것은 *평지 이동이었습니다. 술탄의 사례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지요. 술탄은 최소한 해발 60미터에 이르는 산등성이와 언덕을 수많은 배를 끌고 넘어갔습니다. 20층 빌딩 높이와 맞먹는 험한 비탈길을 바다(0미터)에서부터 끌고 간다니, 감히 상상인들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21세의 청년 술탄은 해냈습니다. 비상한 두뇌와 강력한 리더십이 없다면 꿈도 못 꿀 일이지요. 4월 22일 동틀 무렵부터 정오까지가 배를 끌고 간 본격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그 대대적인 거사를 위해 술탄은 **4월 21일부터 보스포루스 해변 쪽과 골든혼 안에 있는 카슴파샤 지역에 걸쳐 대규모 인력과 장비를 동원한 육로 뱃길 공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포병 부대에게 간간이 페라 지역을 향해 대포를 쏘라고 지시합니다. 주의를 분산시키고 눈길과 관심을 딴 데로 돌리면서 상상력을 차단시키기 위한 일종의 교란 작전이자 위장 전술입니다.

 

*베니스 인들이 롬바르디아 전투에서 소함대 전체를 바퀴 달린 받침대에 싣고 포 강(아디제 강)에서 가르다 호수까지 이동한 일.
**4월 21일은 육지 성벽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콘스탄티노플 성 안에 있는 병사와 시민들이 이 계획 자체를 생각지도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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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상천외하고 전무후무한 작전! 백마를 탄 술탄의 독려를 받으며 드디어 배를 산으로 끌고 가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바다에서 해안가로 끌어올려진 배들은 그 순간부터 마치 거대한 수레로 변신한 듯 힘센 황소들에 의해 경사진 언덕을 끌려 올라갔다. 가파르고 험한 길에선 도열해 있던 수많은 병사들이 황소들을 도왔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배가 산으로 가는 건지, 산이 바다로 변한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장관(壯觀)’이란 말로는 표현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술탄은 출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언덕을 오르는 배들에게 돛을 드높이 올리고 노잡이들을 승선시켜 노를 앞뒤로 움직이게 했습니다. 뱃머리에서는 악사들이 북을 치고 트럼펫을 연주했습니다. 놀이동산 바이킹도 그 광경을 보았더라면 순간 무색해졌을 것입니다. 독심술이 뛰어났던 걸까요. 술탄은 그렇게 병사들로 하여금 전쟁을 카니발처럼 치르게 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배들이 골든혼을 향해 언덕을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더 세차고 무서운 기세로 배들을 바다에 밀어 넣었습니다. 무려 70척이나 되는 크고 작은 배들이 깃발을 펄럭이며 요란한 군악대 소리에 맞추어 골든혼으로 철석철석 내려왔습니다. 그걸 본 비잔틴 인들은 아연실색하면서 공포와 전율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심리전 효과까지 노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군의 사기는 하늘로 솟구친 반면 비잔틴 진영의 분위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크고 수많은 배들을 술탄은 *무슨 재주로 이동시켰을까요.

*오스만군은 먼저 페라 지역 뒤 야산의 가시덤불과 야생 포도밭을 갈아엎고 길을 내었다. 그 다음 길 위에 목재를 깔고 마찰을 줄이기 위해 표면에 돼지기름을 발랐다. 바퀴 달린 받침대가 바다 위의 배를 동여매면 도르래가 배를 해안가로 끌어 올렸다. 이 배들은 한 척 한 척씩 끌고 갈 황소들과 연결시켰다. 황소 옆에선 수십 명의 병사들이 보조 역할을 했다. (런치만은 ‘바퀴 달린 받침대’란 표현을 썼지만 다른 책들엔 그냥 ‘받침대’로 나와 있다. 앞 그림은 바퀴가 없는 반면 아래 그림은 바퀴를 단 채 배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이 불과 이틀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 베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의 『해외 여행』에 수록된 1455년 작품. 한 폭의 그림 안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전쟁 당시의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들을 복합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담고 있다. ‘1페이지짜리 그림책’이라고나 할까.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표지도 이 그림 일부로 장식되어 있다.


  내가 읽은 책에는 배를 이동시킨 육로가 애매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이스탄불 현지에서 만난 학자와 전문가들조차 배의 정확한 이동 경로를 자세히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인 나는 그러나 그 경로를 내 나름대로 유추 혹은 규명해 보려고 단지 지도 몇 장만 들고서 며칠 동안 이 궁리 저 궁리하며 자동차와 도보로 4~5차례나 그 주변을 탐색했습니다. 메메드 2세('파티'; 정복자)와 텔레파시라도 통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 페라팰리스 호텔 앞에서 마치 특파원이라도 된 듯 내 녹음기 안에 탐사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런치만의 책(168쪽)에는 술탄이 여기서 200미터 위쪽인 영국 영사관 앞에서 왼쪽으로 꺾인 경로를 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술탄이 이 페라 호텔 옆길로 배를 끌고 왔을 것 같았다. (상세한 설명은 다음 페이지에서)
여기서 잠깐, 택시(Taxi)는 터키에서도 탁시(Taksi)로 표기한다. 탁시 뒤에 m자 하나를 붙이면 탁심(Taksim), 내가 서 있는 데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이스탄불의 명동’ 격인 번화가 이름이 된다. “탁심에 가려고 탁시를 잡았다.”, 이런 표현이 가능해진다.


▲ 혹시 남아 있을는지도 모를 황소 발자국이나 수레바퀴 자국을 찾는 심정으로 나는 며칠을 두고 몇 번이나 이 거리 저 거리,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3층 건물을 가로질러 쳐놓은 빨랫줄 위에서 옷가지들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빨래를 널고 걷는 일에도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 이 도시에서는 축구장이 유난히도 많이 눈에 띄었다. 문득 2002년 월드컵, 대한민국과 터키의 3·4위전이 떠올랐다. 터키 사람들은 굉장히 축구를 좋아한다. 혹시 이 축구장을 닦고 스탠드를 올리는 과정에서 땅 속 깊숙이 묻혀 있던 그 옛날의 돼지기름 먹인 통나무가 나온 것은 아닐는지…. 나는 바로 이 옆길(테페바쉬)로 배가 지나갔다고 믿는다.


  ‘바로 이 길이다!’ 싶은 곳에서 ‘혹시나’ 하고 물어 봤지만 답은 매번 ‘역시나’였습니다. 그러던 중 술탄과 텔레파시가 통한 걸까요. 내가 애초 생각했던 이 길(테페바쉬)로 ‘배가 내려갔다’는 말을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노라고 몇몇 사람들이 증언해 주었습니다. 뛸 듯이 기쁘더군요. 더위와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사학자(런치만), 작가(나나미), 현지 교수(페리둔) 모두 주장이 다른데 나도 내 견해를 주장해 보자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4의 길’로 갔습니다. 현지인들이 믿고 있는 그 길로! (약도 별첨)

▲ 지도를 파는 가게에도 몇 군데 들렀다. 페라 지역 일대가 상세하게 담긴 축척이 큰 지도를 몇 장 샀지만 그것도 선박의 이동 경로 탐사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한 것 같은 이런 걸출한 인물의 기념비적인 행적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 선박의 이동 경로를 찾아 헤매는 길에 만난 이정표들. 저 화살표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역사적 사실과 마주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조금은 허황된 생각마저도 드는 거였다. 내가 집착이 깊었나 보다.


  이스탄불대학교 역사학과장인 페리둔(Feridun M Emecen) 교수는 3가지 경로를 그 가능성으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런치만의 경로(톱하네→카슴파샤 설), 두 번째(돌마바흐체→카슴파샤 설)와 세 번째는 그보다 이동 반경을 조금씩 더 넓혀 놓은 경로입니다. 페리둔 교수는 그 중 3안이 자기 의견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사가 급한 언덕보다는 그보다 멀더라도 완만한 평지를 택했을 것이란 견해입니다.


▲ 이스탄불대학교 페리둔 교수는 1453년 전쟁을 전공하고 책도 낸 이 분야의 중견 학자. 연구실로 찾아간 나에게 자신의 지식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지만 그래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없지 않았다. 배의 이동 경로도 그 중 하나. 페리둔 교수는 스티븐 런치만의 추정(1안)보다 선박의 이동 거리를 확대한 2안과 3안을 제시했다. 1안<2안<3안 중 그의 견해는 3안이었다. 경사가 급한 언덕보다는 그보다 멀더라도 이동이 쉽고 사전에 적에게 노출도 덜 되는 완만한 평지를 택했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내 의견은 런치만 쪽에 더 가깝다. 거침없는 술탄의 성격과 이런저런 기록, 그리고 내가 직접 탐사해 본 결과를 종합해 내린 입장이다. 페리둔 교수와는 이메일을 통해 아직도 문답을 주고받고 있다.


  답답함을 풀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그 주변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지만 그 사이에 이미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도시 계획으로 길들도 변경된 그 지역에서 550여 년 전의 흔적을 찾기란 실로 난망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사막에 떨어진 동전 하나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축구장을 건설중인 테페바쉬란 마을과 *페라팰리스 호텔 주변 등을 샅샅이 훑고 다녔습니다. (이동 경로는 맨 끝에 부록으로 처리했습니다.)

  *세계적인 추리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이 호텔 411호실에 묵으며 명작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을 구상하고 집필했다.

 

  배를 골든혼 바다에 성공적으로 진입시킨 술탄은 다음 작전으로 *부교(浮橋)를 설치합니다. 부교 옆에는 튼튼하고 널찍한 받침대를 두어 거기서 블라케르나에 성벽을 향해 대포를 쏘았습니다. 식량과 무기 등의 물자와 병력도 부교를 통해 이동시켰습니다. 기동력이 훨씬 빨라졌습니다. 

  *술탄은 골든혼에 있는 배들의 엄호 아래 도시 성벽 바로 위쪽으로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았다. 적국인 그리스 인들이 쓰던 1000여 개의 와인통을 세로로 나란히 쌍으로 묶은 다음 그 위에 두꺼운 널빤지를 고정시켜 사람과 물자 그리고 수레가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다섯 사람 정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다닐 만한 넉넉한 너비였다. (로저 크롤리,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대공격』 166쪽 참고) 일부 주장에 따르면 부교 위에 단단한 받침대를 만들어 그곳에서 성을 향해 대포를 쏘았다고 한다.


 

◀ 육지 성벽 조금 못 미친 지점, 골든혼 연안 성벽에 걸려 있는 이스탄불정복자협회의 현판. 술탄 메메드 2세가 1453년 4월 23일 월요일, 카슴파샤 지역에서 이 부근까지 골든혼을 가로지르는 부교를 놓아 성을 공격한 사실을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과 기록으로 미루어 실제로는 부교가 여기보다 육지 성벽 쪽으로 좀 더 올라간 지점에 가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5편 지도의 부교 위치 참고)




  부교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씩 엇갈립니다.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선 육지 성벽이 끝나고 골든혼 쪽 성벽이 시작되는 곳에서 조금 아래 지점에 현판을 세워 두었지만 그건 술탄의 치적을 알리기 위한 것일 뿐, 부교의 위치가 있던 자리는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 이스탄불정복자협회 사무실에서 회장단과 함께. 이 단체는 말하자면 ‘정복자 술탄의 팬클럽’이다. 전쟁과 관련해 성벽을 비롯한 기념될 만한 곳에 10여 개의 현판과 원기둥을 설치해 놓은 것도 바로 이들이다. 하지만 학술적으로는 이들도 나의 물음표를 속 시원히 지워주지 못했다. 헤어질 때 나는 메메드 2세의 초상이 새겨진 금빛 배지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나는 마치 정복자협회의 홍보대사라도 된 듯이 이스탄티노플에서 귀국하는 날까지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


  아무튼 배가 언덕을 넘고 골든혼을 가로질러 다리가 놓이면서 다이내믹한 육상 전투와 스릴 넘치는 해상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 갈라타 타워에서 바라본 골든혼과 이스탄불 구시가지 전경. 두 개의 터키 국기가 나부끼고 있는 숲 사이로 우뚝 솟은 이스탄불대학교 중앙 탑이 보인다. 그 너머로는 마르마라 해가 마치 하늘인 양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중앙 탑 오른쪽 사원은 쉴레마니예 모스크. 지금은 평화롭게 유람선이 떠다니지만 1453년엔 이 좁은 만(灣)에서 격렬한 해상 전투가 벌어졌었다.


▲ 베니스의 조선소와 건조 중인 선박 그림. 당시 제노바와 쌍벽을 이루며 콘스탄티노플을 동방 무역의 주요 기지로 삼고 있던 베니스는 상선을 비롯한 호위 함대를 만드느라 조선 산업이 굉장히 발달해 있었다. 그에 못지않게 항해술과 해상 전투 경험 역시 풍부했지만, 비좁은 골든혼 안에서 치른 *오스만 군과의 해전은 사전에 기밀이 새어나감으로써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그 동안 해상전에서만큼은 우위를 점했던 황제 군은 이 뼈아픈 패배로 골든혼에서의 해상 주도권마저 상실하고 만다.

*술탄의 배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해 옴으로써 골든혼 봉쇄 사슬이 무용지물이 되자 황제는 즉각 대책 회의를 열어 밤에 몰래 오스만 함대에 접근해 배들을 불태워 버릴 작전을 짠다. 하지만 이 계획은 동참키로 한 제노아 인들의 선박이 준비되지 않아 거사가 미루어지는 바람에 기밀이 새어나가 오히려 오스만 군의 역공을 당하고 만다. 결과는 참패.


  「꿈을 찍는 사진관」(강소천 지음)이란 동화처럼 과거를, 역사를 사진 찍어 주는 카메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골든혼 주변과 페라 지역을 탐사하면서 그런 상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불분명한 것들이 많고 책마다, 또 학자마다 견해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문학의 힘은 상상력에 있는 것. 내가 수집한 팩트와 정보에 상상력을 가미해 내 나름대로 역사를 재구성해 보는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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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콘스탄티노플 지도. 술탄 메메드 2세에 의한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서 급속히 번성해진 모습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지도 맨 아래쪽에 오스만 가지부터 무라트 3세에 이르기까지 오스만 왕조 12대 술탄의 얼굴을 동그라미 안에 차례로 그려 넣은 것. 오른쪽 첫 번째가 정복자 메메드 2세의 초상이다.(파란색 사각형)


  한가위 전에 한 편을 더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6편을 힘겹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7편은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까요. 아래 그림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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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탄은 왜 격전이 치러지고 있는 바다로 뛰어들었을까? 그것도 배가 아닌 백마를 타고…. 다음에 이어지는 ‘이스탄티노플’ 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 TIP=더 깊이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한 탐구 학습 코너 ##

  국내에서 그 동안 배의 육지 이동 경로를 파악할 수 있는 기존 자료는 런치만과 나나미의 책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나나미는 아예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고 런치만의 설명 역시 애매했습니다.

  현지에서 이스탄불대학교 페리둔 교수를 만나 이 부분만 놓고 30여 분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웬걸요, 혼란만 보탰을 뿐입니다. 교수는 이때껏 통설처럼 여겨져 온 톱하네 설(1)을 부정하고 돌마바흐체 설(2)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훨씬 더 먼 길로 돌아가는 제3 가설까지 거론했습니다.(페리둔 교수는 톱하네가 언덕이 너무 가팔라 현실적으로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제3설의 구체적 내용은 지면 관계상 생략합니다.)

  나는 ‘이스탄티노플’을 떠나던 날도 풀리지 않는 화두를 짊어진 수도승처럼 다시 시간을 짜내어 이 지역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골목길, 좁은 길, 일방통행 길. 참 복잡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쳤습니다. 시간마저 내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도 답답해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정복자 메메드가 배를 끌고 간 길이 이곳인가요?”

  드디어 한 동네(테페바쉬)에서 가뭄에 단비 같은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우리 할아버지한테서 그렇게 들었어요.”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그 길을 다시 갔습니다. 런치만의 영국 대사관 설을 뒤집고 페라 관광호텔 설을 새로 제기하기도 하면서 그 거리를 헤맸습니다. 결국은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귀국 비행기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서울에서도 이스탄불과 계속 연락을 취해가며 뭔가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직전 또 하나의 번역본이 입수되었습니다. 바로 페리둔 교수의 제자인 바자르(Mahmut Ak-Fahameddin Baʂar) 교수가 근간한 터키어 원본(『Istanbul’un Fetih Gnlĝ』-이스탄불 함락 일지)을 우리말로 옮긴 자료입니다.

  야호!(호야?) 바로 내가 주장하였던 배들의 이동 경로가 그 책에 그대로 제시돼 있었습니다. 특종(?)을 놓친 아쉬움과 내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 진작 손에 넣었더라면 그런 생고생은 하지 않았으련만….

  이왕 수고한 것. 그 책은 지도 없이 큰 방향만 나와 있으므로 나는 좀 더 친절하게 내가 생각하는 배의 이동 경로를 자세하게 지도로 표시해 서비스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톱하네(대포알 공장)부터 쿰바라치 언덕길, 아스말르 메스지드, 테페바쉬, 카슴파샤 등과 골든혼 연안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골든혼 봉쇄 사슬이라는 방어벽을 만난 술탄이 함대를 이끌고 언덕을 넘어 바다로 간 경로이다. 톱하네에서 카슴파샤로 이어지는 빨간색 화살표 부분은 내가 독창적(?)으로 제기하고 바자르 교수가 뒷받침한 노선이다.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길인데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시켰다. 2설(초록색)과 3설은 그보다 좀 더 위쪽(3설은 지도 밖)으로 선이 그어진다.

P.S.
  6편을 올리고 나서 아이디 ‘술탄’님(한양대 이희수 교수)이 네이버 블로그에 덧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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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마다 이어지는 술탄님의 뜨거운 관심과 날카로운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메일로 보내주신 제3안 스캔 사진도 잘 받았습니다. 터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린 자료라면 사학계의 주류 의견이겠군요. 페리둔 교수의 3안은 베식타쉬(돌마바흐체보다 더 위쪽, 초기 해군 집결지)→옥메이다니(에윱 모스크 맞은편 지역, 골든혼 거의 끝 쪽)였습니다. 하지만 술탄님 말씀대로 ‘역사적 사실이란 정확한 진실이 확인될 때까지만 유효’하다는 측면에서 내 견해를 포함한 이 모든 주장에 의미두고 싶습니다.
  이스탄불대학 페리둔 교수와 동문수학한 사이라니 더욱 반갑습니다. 페리둔 교수에게도 술탄님 안부를 전하겠습니다.

  지적해 주신 ‘골든혼 내해에 배를 내린 시점’은 내가 잠깐 착오한 것 같습니다. 런치만 책(169쪽)에 ‘4월 23일 일요일’로 되어 있지만 요일 계산을 해보니 ‘4월 22일 일요일’이라야 맞습니다. 다른 문헌을 보아도 4월 22일이 정설인 것 같아 내 블로그 내용을 수정했습니다. 이동 함선의 수는 40척부터 80척까지 견해가 다양해 그 중 런치만의 추정(70척 가량)을 따랐음을 밝혀 드립니다. ‘동틀 무렵부터 정오까지’는 내가 읽어 본 책들이 대부분 이 설에 입각해 서술돼 있었습니다. 술탄님 지적대로 ‘밤을 이용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지만, 그보다는 술탄(메메드 2세)의 성격상 ‘적들에게 시각적인 공포와 전율을 주는 효과’를 노렸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특히 내리막길에서는 말입니다.

  아래 지도는 술탄님이 보내 준 터키 역사 교과서에 실린 자료입니다. 교과서에 표시된 경로(분홍 선) 외에 내 블로그에 서술된 1안(빨간 선)·2안(초록 선)·3안(파란 선)도 참고삼아 표시해 놓았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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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전자돌이 2010.09.21 0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술탄의 상상력과 추진력, 무엇보다 자신이 반드시 해낼 것이라는 '근거있는' 자신감이 정말 부럽습니다. 그 근거는 어디에서 나오는걸까요? 술탄 위인전이 있다면 구해서 읽어보고 싶네요. 21살이라.. 요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이 되어 줄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계속 관심갖고 지켜보겠습니다!!

    • 호야 2010.09.28 09:39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그렇습니다 술탄은 상상력 추진력 게다가 '근거있는 자신감'(이말 참 마음에 듭니다)의 사나이지요. 사실 이스탄불 떠나기 전엔 21세 청년 술탄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주로 서방쪽 견해에 접하고 갔는데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더군요 현지에도 자료 귀한건 마찬가지지만 현장에 서면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더군요.
      여러분들이 댓글 달아주시니 이 작업이 힘들어도 계속할 용기가 납니다 계속 관심 바랍니다 김형오

  2. 헛제삿밥 2010.09.21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중에 이 포스팅 모아서 터키 여행가면 든든할 것 같네요...문화유산답사기+ 지도 가 한 방에 해결될 듯...잘 봤습니다. 감사~~

  3. 트라이앵글 문 2010.09.21 16: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왠지 이번 한가위에는 삼각형 달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트라이앵글 문.
    이스탄티노플을 닮은 그런 달 말입니다.

  4. 우주아이 2010.09.24 0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추석 전에 또 한 편 올렸을 줄이야
    이스란티노플엔 명적도 없나요
    잘 보고 갑니다

  5. 중독 2010.09.27 05: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능력자 술탄이 너무 멋있어서 술탄의 팬클럽에 가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술탄이 왜 백마를 타고 바다에 뛰어들었는지 힌트를 봐도 유추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편을 기대하며...
    그리고 이렇게 빨리 이스탄티노플의 기행문이 올려질 수 있다니...
    의장님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가진 분이신 것 같습니다.
    (*제일 많이 바쁜 사람이 제일 많은 시간을 가진다. -비네-)

  6. BlogIcon 술에물탄 2010.09.30 18: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봉쇄사슬에 막혀 배를 육지로 끌다니...
    배를 끌던 소와 인부(?)들이 불쌍하네요..
    현대의 공중전을 봤다면 엄청 부러워했겠네요.ㅋㅋ

    • 꽃거지 2010.09.30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술에물탄님 센스가 넘쳐나시네요.
      기대안한곳에서 빵 터지고 갑니다.

  7. 두륜 2010.09.30 1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를 산으로 끌고 올라가 전쟁의 결정적인 향방을 가른 술탄처럼...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2차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만든 것처럼...
    모든 일에는 어떻게 진행 될것인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고비(분수령)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의장님께서 "이스탄티노플"을 연재하시고 난 다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글도 재미 있지만 글 쓴이에 대한 관심 또한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장님께서도 이 글의 연재를 분수령으로 삼아 지금의 관심과 사랑을
    더욱 승화시켜 보다 멋진 정치 지도자가 되길 기원 합니다...
    앞으로 큰 정치인의 행보를 "이스탄티노플"의 이야기와 함께 기대하겠습니다...

  8. 온새미로 2010.09.30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자께서 하신 말씀으로 논어(옹야편)에 나옵니다.
    아는 노릇은 좋아하는 노릇만 못하고, 좋아하는 노릇은 즐기는 노릇만 못하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공자의 예술론은 '시경(詩經) 삼백 편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에 간사한 생각이 없다(思無邪)는 구절 그것이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곧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스스로 드러나야 참된 예술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자는 지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학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는 노릇을 좋아하는 노릇만 못하고, 좋아하는 노릇은 즐기는 노릇만 못하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시리즈들을 읽으며 공자님 말씀이 떠오른것은,
    형오님도 단순히 콘스탄티노플 전쟁에 대한 사료만 챙기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서일까요.

  9. 고슴도치 2010.09.30 2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럽사람들은 예술과 문화재를 생명만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전통보존 의식이 투철해서 이 전쟁에 대한 역사적 사료들이 정확하고 풍부할 것 같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가봅니다.

  10. 兼太(けんた) 2010.10.01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투에 관한 자료를 찾는중이었다.
    여기는 구글에서 검색하다 오게 되었다.
    우선 사진과 그림 설명만 보며 해석하다 천천히 다시 한번 읽어보니
    운이 좋게도 내가 공부했던 부분이라 읽을 수 있었다.
    韓国語を日本語 に訳すのはとても難しい..
    何よりも前々から学びたかったから.
    一生懸命勉強して後で 형오と話をもっと上手にできたら嬉しいな.
    おめにかかって嬉しいです.

    • 호야 2010.10.04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日本人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그러나 저는 貴下의 韓國語만큼 日本語 實力이 不足해 不得已 한글로 답글을 남깁니다. "韓國語 熱心히 배워 나와 對話하겠다"는 말씀에 깊은 感銘을 받았습니다. 1453年 Constantinople 戰爭에 대해 意見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내 Homepage에 글 남겨 주셔셔 感謝드립니다. 金炯旿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5
                              - 모던과 클래식, 골든혼 성곽 탐사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사진 고르느라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찍은 사진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보여드리고 싶은 장면들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이스탄티노플’은 그만큼 매력이 넘쳐나는 도시입니다.

  이번 편은 갈라타 타워로부터 시작됩니다. 탐사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 도시의 전경을 높은 곳에 올라 사방팔방으로 관찰하기 위해 맨 먼저 찾아갔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갈라타 탑을 내려와서는 골든혼을 옆에 끼고 승합차로 천천히 달렸습니다. 골든혼(할리치)은 영문(Golden Horn) 의미 그대로 한자로 쓰면 ‘금각만(金角灣)’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은 걸까요?
  이곳 사람들은 두 가지 설을 들더군요. 첫째, 골든혼에서 침몰한 배들과 함께 가라앉은 금은보화가 많기 때문이라는 설. 둘째, 석양 무렵이면 짐승 뿔 모양을 한 골든혼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때문이라는 설. 둘 다 일리 있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설을 떠나 골든혼은 그 자체가 ‘금싸라기 바다’입니다. 그만큼 지정학적·경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니까요.

▶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세운 *갈라타 타워 안내 표지판. 화재와 지진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재건축과 보수 공사를 거듭하며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의 역사를 갈라타 지역 가장 높은 곳에서 묵묵히 지켜본 이 도시의 산증인이다.



*갈라타 타워 : 528년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맨 처음 건립했으나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으며 1348년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크리스티 투리스’(그리스도의 탑)란 이름으로 재건축되었다. 오스만 시대에도 여러 차례 재건축을 하며 화재 및 기상 관측, 적의 침입 감시, 포로수용소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에는 목재였던 내부를 콘크리트로 바꾸고 일반인들에게도 관람을 허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올라가면 터키 민속춤과 밸리댄스를 감상할 수 있는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이 있다. 타워의 높이는 62.59미터, 꼭대기 장식물까지 포함하면 66.90미터이다. 벽두께는 3.75미터, 안쪽 지름은 8.95미터. 탑을 둘러싸고 외벽에 14개의 창문이 나 있다.

  골든혼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를 승합차로 둘러본 우리는 차에서 내려 해안 쪽 성곽을 탐사했습니다. 육지 성곽(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과는 달리 이곳은 외(Single)성벽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골든혼 자체가 든든한 방어선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매립으로 인해 사라졌지만 1453년 당시에는 개펄과 바위가 많아 해안 성벽으로의 접근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보여 드릴 사진에서와 같이 두께와 높이, 그리고 강도(强度) 면에서도 만만치 않은 성벽이어서 오스만군도 이곳은 주요 공략 지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세월이 흘러 개펄 해안이 점점 굳어 육지화되면 비잔틴은 그 지점까지 또 성을 쌓았습니다. 어떤 성벽은 다른 성벽보다 유난히 더 앞으로 튀어 나왔거나 2중 혹은 3중 성벽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외부 세력이 감히 쳐들어올 엄두를 못 내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증축이 돼간 겁니다. 다만 성이 축조된 이래 꼭 한 번 4차 십자군 전쟁 때 골든혼 쪽 방어선이 뚫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됐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당시에도 온전했던 골든혼 쪽 성벽들은 육지 성곽과는 달리 지금은 옛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도로 개설 및 도시 개발 과정에서 인위적인 훼손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열 마디 말보다 한 컷의 사진이 더 생생하게 증언해 줍니다.
  자, 그럼 이쯤에서 사진과 함께 하는 오늘의 탐사를 시작해 볼까요.

 

▲ 갈라타 타워를 등지고 이경숙씨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설명에 열중하고 있다. “의장님,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헤자르펜 아흐멧 찰레비’란 사람이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이 탑 꼭대기에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아시아 지역인 위스크다르 언덕까지 날아가는 신기록을 세웠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 ‘헤자르펜 타워’로도 불리지요.”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전망대에서 종이비행기나 몇 개 접어 바다 쪽으로 날리고 올 걸 그랬다.

▲ 갈라타 타워 전망대에서 카메라에 잡은 아야 소피아(사진① 왼쪽),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사진 ① 오른쪽), 이스탄불대학교 중앙 탑(사진 ②), 쉴레마니예 모스크(사진 ③).
전망대는 360도 조망이 가능한 구조여서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비롯해 마르마라 해와 골든혼(금각만, 하리치)은 물론 이스탄불 구시가지 및 신시가지 전체를 빙 둘러가며 볼 수 있다. 1453년 전쟁 당시 만약 비잔틴군이 이 전망대를 이용할 수 있었더라면 전황도 좀 더 달라졌으리라.

▲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골든혼 쪽 성벽들. 벽돌과 돌·흙 등을 이용해 기하학적이면서도 자연스런 미감을 뽐내고 있다. 돌과 돌, 벽돌과 벽돌, 돌과 벽돌 사이에는 강력한 식물성 접착제를 발라 놓았다. 오른쪽 성벽은 2중 성벽 모습을 하고 있다.

▲ 유네스코의 예산 지원을 받아 복원한 성벽 모습. 일률적이고 인위적이어서 예스런 멋이 사라졌다. 화장과 성형 수술로 치장하고 멋을 낸 미인을 보는 듯하다. 수비군이 창검이나 활로 맞서 싸우기 유리하도록 네모난 구멍 뒤는 넓고 앞은 좁은 형태이다. 일정 부분 방패 역할을 해낸 것. 부챗살 모양을 하고 있는 구멍 위의 아치는 비잔틴 양식의 성벽임을 말해 준다. 이스탄불은 1985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복원 공사가 최근에 이루어졌더라면 이보다는 나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시대의 비잔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복원된 성곽 모습을 본다면 현대 문명의 수준을 얕잡아 보지는 않을는지….

▲지각 변동으로 땅이 솟아올라 문과 자동차의 왼쪽 벽 부분이 반 지하 상태로 변했다. 1층 표시와 3층 표시 부분은 대칭을 이룬다. 1층도 지표면의 융기로 인해 거의 지하층이 된 상태. 창문들이 비잔틴 양식이다. 지붕 위를 보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란 가운데 잎이 무성한 나무가 앞머리를 건물 이마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 1500여년 된 성벽 위로 화살처럼 쏟아지는 여름 햇살 아래 각양각색 빨래들이 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마르고 있다. 중세와 현대의 기가 막힌 앙상블! 마치 퓨전 설치미술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 1898년에 완공된 불가리아 교회. 불가리아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보던 이곳의 원래 이름은 ‘성 스테판 교회’이다. 외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고딕 양식과 신바로크 양식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사전 제작한 주철 구조물을 다뉴브 강과 흑해를 거쳐 배에 싣고 와 조립은 이스탄불에서 하는 독특한 건축 방식을 사용했다. 이 교회는 정면이 골든혼 쪽을 바라보고 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무슬림이지만 터키가 비교적 타 종교에 관대한 나라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해마다 6월이면 이 교회에서 인터내셔널 이스탄불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 성벽 문을 뚫고 차도를 만들었는데 인도가 없다. 문화재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런 걸까. 성문을 통과하면 왼쪽 옆으로 작은 보행자 도로가 나 있다. 가슴과 등을 밀착시킨 청춘 남녀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성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 부분도 3중 성벽 못지않은 두께를 갖고 있다.

▲ 성벽 위에 연립 주택을 짓고 사는가 하면 성벽 사이에도 집이 있다. 빨래가 널려 있는 연립 주택 맨 꼭대기 층의 창문으로 어느 예쁜 소녀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가는 우리가 쳐다보자 부끄러운 듯 이내 안으로 숨어 버렸다. 창문 밑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면 다시 나타날까나.

▲ 1500년 된 성벽 위에 지어 올린 시멘트 건물 옆으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모던한 느낌의 화이트 하우스와 금방이라도 나무 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낡은 판잣집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성벽 틈에는 풀이 돋아나 있고, 그 밑으로는 폐건축 자재 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다. 무성하게 자란 무화과나무가 쓰러질 것 같은 집을 떠받쳐 주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 성벽 위로 연립한 현대식 주택들. 우리나라도 왕년에는 이런 적이 있었던가.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이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는 ‘이스탄티노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짧은 기간에 급팽창해 1000만을 훌쩍 넘는 인구를 갖게 된 세계적인 거대 도시가 갖는 한계일까. 유럽 쪽이 아시아 쪽보다 땅값이 비싸다 보니 특히 골든혼 성곽 지역이 더 크게 훼손된 측면도 없지 않으리라.

▲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문양 같은데 훼손도가 심해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단순한 장식일까, 다른 용도가 있는 걸까. 이 도시에는 이런 애매한 문화유산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 골든혼 쪽 성곽을 누비고 있는 4인조 탐사대. 맨 앞의 모자 쓴 사람이 나, 김형오이다. 성곽 위의 아파트나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는 하도 많이 보아서 무덤덤해졌다. 왼쪽 차도 건너로 골든혼을 끼고 흘러가는 바닷물이 웅덩이처럼 보인다.

▲ 골든혼 성곽 안쪽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본부(페네르 그리스 관구)를 향해 가고 있다. 기독교의 성물과 성녀들의 묘지, 주교가 앉는 의자, 귀중한 성상 등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다.

▲ 그리스 정교회 벽면에 새겨져 있는 비잔틴의 상징 쌍두 독수리. 두 개의 머리는 왕국의 주권과 동서양을 초월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상징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은 지금도 국가의 상징으로 문장(紋章) 등에 이 쌍두 독수리 문양을 쓰고 있다.

▲ 그리스 정교회에서 만난 벽화. 정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성 조지)의 용감한 모습이다.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자 14성인 가운데 한 사람인 게오르기우스는 회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칼이나 창을 들고 용(드래곤)을 무찌르는 백마 탄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성벽과 가로등 사이를 통과해 좁은 길로 가다가 문득 그런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 좁은 길이 생명 길이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길임을 강조한 말씀이다. 물론 ‘구원’을 얻기 위해 나선 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도시에서 ‘영원’한 제국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 뒤로는 13절과 14절에 걸쳐 이런 말씀이 이어진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그리스풍으로 지어진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그리스 요리를 점심으로 먹었다. 우리가 타고 다닌 승합차와 운전기사 에르한의 모습이 보인다.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와 우리말 실력이 보통이 아닌 친구였다. 내 카메라폰에 담은 이 식당의 내부도 한 쪽 벽면은 성벽을 그대로 활용한 모습이었다.

▲ 그야말로 부서진 성벽이다. 잔해만 남았다. 그래도 그 부서진 면면을 보면 이 성벽이 얼마나 단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실감이 난다.

▲ 골든혼 성벽 바로 뒤 안쪽에 있는 오스만 시대의 수도.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난 뒤에 대대적으로 수도 시설을 확충 보급했다. 치수(治水)야말로 정치(政治)의 기본임을 알았던 까닭이리라.

▲ 성벽의 높이와 두께를 실감해 보자. 거구의 사나이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진 위로도, 그리고 왼쪽 옆으로도 성벽은 더 높고 길게 이어져 있다.

▲ 아타튀르크 다리 부근에 있는 지발리 성문 앞. 성문 위로 모스크가 보이고 가파른 오르막길이 펼쳐져 있다. 골든혼 연안 성벽에 있던 도시로 들어가는 몇 개의 성문 중 현재는 아야 성문과 함께 유이(唯二)하게(?)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성문이다. 그러나 1453년 전쟁 당시에는 골든혼이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해주어 이쪽 지역의 성곽들은 온전한 모습이었다. 지발리 성문 오른쪽 벽에는 이스탄불정복자협회에서 만든 현판▶이 붙어 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오스만 사령관 ‘제베 알리 베이’가 무혈입성한 문이라고 한다. 그 뒤 세월이 흐르면서 사령관 이름(제베 알리)을 따 마을 이름이 ‘지발리’로 바뀌었다. 왼쪽 벽에는 흰색 표지판이 걸려 있다. 내용은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 웬 깃발들이 이렇게 줄지어 세워져 있나. 알고 보니 대학교 깃발들이었다. 위 사진 성벽에 ‘쓰레기 투기 금지’ 팻말을 걸어놓은 바로 그 대학이다. 민가뿐만 아니라 이런 공공건물도 성벽을 담벼락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학 간판도 성벽을 이용해 붙여 놓았다.

▲ 골든혼 건너편 카슴파샤 지역. 선박과 조선소·크레인 등이 보인다. 1453년 여기에서 무슨 일이?

▲ 원근감을 무시하고 그린 골든혼의 옛 모습. 입구에 굵은 방어 철책을 설치해 놓았다. 보기에도 견고한 이 쇠사슬 때문에 술탄의 배들은 골든혼으로 진입을 하지 못한다.

 

  맨 밑에 실어놓은 두 컷의 사진은 ‘이스탄티노플 여섯 번째 이야기’의 예고편 격입니다. 다음(6편)은 ‘배가 산으로 가다’ 편이 이어집니다.

 

*P.S. 이스탄티노플 4번째 이야기에도 많은 분들이 격려의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몇 분의 글을 발췌해 옮겨보면….

  “불타는 탐구욕과 활활 끓고 있는 그 열정에 심심한 존경을 보냅니다. 건강도 살펴가며 하시기 바랍니다.”(이우종님)
  “옛 우물에서의 은어 낚시! 이스탄불이라는 우물에서 등비늘 반짝이는 은어들을 많이 낚으신 것 같군요.”(피플님)
  “다음에 꼭 그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네요. ‘이스탄티노플’ 명예시민으로서….”(두륜님)
  “그림을 보고 있으니 그 정밀한 묘사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 그림 읽어 주는 남자?”(산리마을님)
  “역사는 투쟁 속에 진보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황제와 술탄의 대결, 흥미진진합니다.”(Socio89님)
  “글맛과 묘사의 역동성과 생생함의 차원이 다르다. 진정성을 갖고 역사의 진실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며 다가갈 때 그만큼 살아 있는 글이 된다는 것도 잘 보여준다. 함락의 막바지에 운명처럼 다가오는 오스만 군대의 대포 소리와 군악대의 우렁찬 소리 사이로 들리는 비감한 교회 종소리를 회상하는 필자의 묘사는 너무나 압권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못지않은 김형오 의장의 ‘이스탄티노플 이야기’를 이제는 지인들과 나눠야 할 것 같다.”(술탄님)

  그밖에도 여러 분들이 덧글로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힘으로 이 벅찬 작업을 감당해 나갑니다. 앞으로도 의정 활동 틈틈이 시간을 내어 전심전력하겠습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5편갈라타 타워(지도 윗부분, 빨간색 사각형 글씨)골든혼 성곽 일대(지도 윗부분, 빨간색 표시부분)를 탐사한 내용이다. 육지 성벽에 비해 훨씬 훼손 정도가 심한 지역이다. 성벽을 건물의 한 부분으로 삼아 이렇게 많은 집을 지은 도시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하늘색 사각형 부분1편, 분홍색 사각형삼각형 부분2편, 갈색 사각형 부분 3편의 탐사 경로이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용 가운데 오류나 다르게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지적 바랍니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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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플 2010.09.15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더풀!!

  2. 한가위 2010.09.16 0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름달처럼 풍성한
    이스탄티노플 이야기
    한가위 이후에도 기대할게요
    명절 잘 보내세요

  3. BlogIcon 김화자 2010.09.18 2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름달 처럼 넉넉하시고 풍요로 우신 추석 명절 되십시요.
    행복 하시고 따듯하신 한가위 되시길 기원 합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4. 세레나데 김 2010.09.26 1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전 연립 주택 창문 너머로 아름다운 소녀가
    얼굴을 내밀고 방긋 웃었습니다.
    어라, 다시 들어가 보니 그새 사라졌네요.
    신비스런 그녀를
    <이스탄티 걸>이란 이름으로 불러 봅니다.

  5. 소나티네 2010.09.27 08: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전 이스탄티걸이 또 고개를 쏘옥~~
    이스탄티노플 이야기는 그만큼 잔상을 많이 남깁니다

  6. BlogIcon 스압 2010.09.30 1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벽에 지은 집에 사는 이들은 기분이 어떨까 궁금합니다.
    '우리집 벽이 수백년전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라니!!'
    집에 값비싼 골동품 하나씩은 기본이겠네요. 부럽다. 돈 떨어지면 조금씩 팔아도...ㅋㅋㅋ

  7. 유한새 2010.09.30 2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기의 철옹성에 무혈입성이라...!!

  8. 만국기 2010.10.12 08: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리하면서도 부드럽고, 냉철하면서도 따뜻하고, 깊이 있으면서도 쉽게 읽히는 탁월한 역사 기행문입니다.

  9. 형오투어 2010.10.12 2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컴퓨터가 바로 타임머신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이스탄티노플,
    그 가상의 도시를 여행하는 기분 정말 끝내 줍니다.
    착륙하고 싶지 않네요.

  10. BlogIcon silk flowers 2010.10.18 0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멋진 역사의 도시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