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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in 블로고스피어

막힌 변기를 손으로 뚫은 사연

군대 훈련소에서의 일입니다.

화장실 청소가 시작되는 시각부터 점호 종료 시까지 화장실 사용을 할 수 없었습니다.
화장실은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해야만 하는 일종의 거룩하고 신성한 곳이었습니다.

처음에 훈련소에 가면 긴장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변비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시간이 흐르다 보면 신호가 왔을 때 바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대에서 키가 가장 큰 친구(1번)를 화장실 오장이라고 불렀습니다.
화장실 오장은 소대장 훈병/향도훈병과 더불어 소대 내에서 교관들이 아는 척 해주는 권력(그것을 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마는)을 갖고 있어서 경외의 대상이었죠.

화장실 당번은 키가 큰 순서로 구성되어서 좀 무섭게 느껴졌는데,
청소시간에 화장실 사용을 못 하도록 위압감을 줘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어쨌거나 전 다급한 신호를 받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그나마 좀 친하다고 생각되는 화장실 당번에게 사용을 요청했습니다.

화장실 청소가 말끔하게 다 끝났다고 난색을 보이는 화장실 당번에게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고 당부하고서
키가 큰 화장실 오장의 눈을 피해 한 칸을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일을 마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럴 수가!
너무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여서였을까요.

휴지가 섞이지 않은 100% 순수함만으로 변기가 막혀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제가 있던 신병교육대에는 우습게도 변기를 뚫는 압축기도 없었습니다.
화장실이 막히면 소화전의 소화호스를 사용해 변기를 뚫었는데, 그 엄청난 수압으로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방식이었지요.

소화호스를 사용하면 물기 한 점 없이 말끔히 청소된 이 거룩한 공간을 나의 순수함으로 더럽히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시각은 8시 50분. 동기들은 이미 점호대형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습니다.
소화호스를 사용할 시간도, 그 뒷정리를 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나 하나 때문에 화장실 당번은 물론이고, 화장실 오장과 소대장 훈병, 아니 나아가 우리 소대 전체,
아니 우리 중대 전체, 아니 동기 전체가 잠을 못 잘 수도 있는 위기일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이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화장실 오장의 눈을 피해 자리를 마련해준 동기를 곤경에 빠트릴 수 없었습니다.
곧이어 문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화장실 당번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다 안 쌌나? 빨리 나온나."

"응? 좀 기다려라. 다 쌌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라고 하지만, 저에겐 아무런 도구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쓰자. 생각해라. 생각해라.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해..!'

팔을 걷고 변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샘이 깊은 물이란 이럴때 쓰라고 생긴 표현일까요?
활동복이 젖지 않도록 소매를 어깨까지 끌어올려 민소매 옷처럼 만들었지만,
제 순수함이 더해져 넘칠 듯이 불어난 물은 어깨까지 적셨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손끝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습니다.

(후비적 후비적..)



홍해를 가르던 모세의 심정이 이러했을까요?
꿀렁꿀렁~ 서서히 내려가는 변기를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동기들아, 기뻐해 줘! 너희는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지금 우리는 큰 위기를 넘겼다!'

어깨까지 젖은 물기를 다른 한 손으로 모두 털어내고, 활동복 소매를 내리고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문을 나섰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문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당번이 화장실 상태를 확인하러 들어가고,
전 쓴웃음을 지으며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야! 세면대도 쓰면 안된다!"

뒤따라 나온 화장실 당번이 걸레 한 장을 들고 황급히 제 뒤를 따라와 세면대의 물기를 닦아냈습니다.

"꼭 써야 된다.."

물기를 닦는 동기를 앞에 두고 차마 어깨까지 닦을 수는 없었습니다. 손을 닦고 점호를 받았지요.
다행히 그날 점호에서 화장실 청소상태에 대한 지적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

자세한 묘사는 생략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저와 같은 경험을 할 누군가를 위해 조언하자면

"더럽혀진 손은 씻으면 됩니다."

단, 깨.끗.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