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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오가 만난 세상/김형오의 문화 카페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9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9
                              - 해상 전투의 현장에서


  2차 대전의 명장 *조지 스미스 패튼이 만약 정복자 메메드 2세를 평했더라면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패튼은 “군인이 소유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철저하고 완전하며 거만한 자신감”이란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술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감, 그것도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완전무장한 신념의 사나이가 바로 술탄 메메드 2세였습니다.

  *1885~1945년.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맹활약한 미국의 육군 장군. 북프랑스에서는 하루에 110킬로미터를 진격했을 만큼 저돌적인 작전과 무자비한 욕설로 유명했다. 멕시코 원정 당시에는 반란군 지휘소를 기습, 장군을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보닛에 매달고 개선했다. 줄담배에 진주로 장식한 권총을 차고 호통과 엄격한 규율로 병사들을 통제했지만 병사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그를 더 존경했다. 패튼은 늘 자신만만했다. 스스로를 연합군 최고의 야전 사령관이라고 굳게 믿었다. 패튼의 모토는 오직 진군뿐, 방어란 말은 그의 사전에 없었다.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톱카프 궁전 전망대에서 찍은 바다 사진. 저기가 바로 내가 탐사할 해상 전투의 현장이다! 내 마음은 벌써 바다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는 저 하얀 배 위에 탑승해 있었다.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던가요?
 “우리는 바다에서, 해변에서, 상륙지 들판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적과 싸울 것이다.”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모두 동원한 총력전을 펼칠 거란 의미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술탄의 자세와 각오도 처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강렬했습니다. 육상·해상·공중전(불화살과 대포알이 허공을 날아다녔으니까요)은 물론, 4편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선 지하(도성 침투용 땅굴) 전투까지 치렀으니까 말입니다.

▲ 지대가 높아(해발 267미터) 도시 전체를 조감도처럼 실감나게 전망할 수 있는 참르자(소나무 언덕)에서 내려다본 보스포루스 해협 일대. 해협 위 오른쪽이 유럽이고 아래쪽이 아시아다. 왼쪽 소나무 숲 너머로 보이는 아시아 연안 동네인 위스크다르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군인들이 *같은 제목의 노래를 즐겨 부르고 미국의 흑인 여가수 어사 키트가 터키어로 리메이크하는 등 국내외 여러 가수가 부르면서 우리 귀에도 익숙해진 지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위스크다르(우스크다라) 머나먼 길 찾아왔더니…”로 시작되는 노랫말로 잘 알려져 있다. 원래 제목은 <캬팁>인데 ‘캬팁’은 하급 공무원을 일컫는 말. 위스크다르에 살고 있는 아가씨가 공무원 총각을 사모하는 내용이 담긴 애틋한 연가이다. 노래하는 사람 기분에 따라 빠르게 부르면 흥이 나고 느리게 부르면 애잔한 곡조가 되는 묘한 매력을 지닌 터키 전통 민요이다.

  육상 전투는 이미 서술했으니 오늘은 전편에서 말씀드린 대로 해상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 전에 잠깐, 왜 그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외교적인 배경을 더듬어 볼까요?

  *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연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입니다. 1453년 전쟁에도 그 이면에는 정치적·외교적·종교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읽히고 설켜 있었습니다.

  *1780~1831년. 독일 태생으로 열두 살에 입대해 사관학교에서 병학(兵學)을 공부했다. 프랑스 혁명 때는 프로이센 왕국의 사관으로 활약했으나 예나의 패전 이후 러시아군에 투항, 나폴레옹으로부터의 해방 전쟁에 진력했다. “전쟁은 외교의 연장”이란 자신의 말을 증명 혹은 실천이라도 하듯 1815년 프로이센으로 복귀해 군사학자 및 참모장 등을 지냈지만 콜레라에 걸려 급사했다. 사후에 출간된 『전쟁론』은 이 분야의 손꼽히는 고전.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는 별개로 계속되는 정치적 행위이며 도구일 뿐”이라는 전쟁 철학을 갖고 있었다.

  황제 역시 비잔틴 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외교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스만의 술탄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루멜리 히사르를 세우면서 해상 통제권을 장악하고 제국의 목을 조여오자 유럽은 아연 긴장합니다. “아직 어린 술탄”이라는 느긋한 평가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메메드 2세”로 인식이 급변합니다. 힘없는 황제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외교에 매달립니다. 도성 시민과 성직자들이 굴욕감을 느끼며 반대하던 동서 교회의 통합마저도 받아들일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유럽 각국은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강 건너 불 보듯하는 안이한 상황 인식과 무관심, 각 나라를 연결하고 이끌 리더십의 부재 등으로 황제의 사절들은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교황과 베니스의 미미하고도 형식적인 지원, 제노아 군인 주스티니아니가 이끌고 온 700명의 용병, 그게 전부였습니다.

▲ 카슴파샤 인근 수상 레스토랑에서 찍은 골든혼 풍경. 이 만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봉쇄 사슬이란 장애물을 선박의 육상 이동이라는 기발한 방법으로 돌파한 술탄의 해군과 비잔틴의 다국적 해군이 1453년 4월 28일, 드라마틱한 해상 전투를 벌였던 현장이다. 콘스탄티노플 도성 시민들은 맞은편 언덕에서 전쟁에 패한 자국의 병사들이 공개 처형 당하는 장면을 눈물로 지켜보았으리라. 그날의 격전과 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유람선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운명’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혼신의 힘을 쏟아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이 자기 편을 들어 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황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쩌면 1100년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그와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결코 피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고 매순간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비장하게 맞섰습니다. 마지막이란 걸 알면서도 여러 차례의 항복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구차하게 사는 대신 아름답게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양쪽 무두가 펼친 치열한 첩보전과 심리전 속에서 술탄은 현명하게도 비잔틴 쪽의 역정보, 허위 사실 등에 결코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서방 국가들의 지원이나 개입이 지지부진할 거란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육로로 지원군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기독교 국가였던 헝가리와는 동맹 조약을 맺어 예방 조치를 해놓았습니다. 갈라타에 거주하던 제노아 사람들에게도 압력을 넣어 그들이 비잔틴 제국을 돕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압력을 받은 세르비아는 오스만 군의 선봉에 서서 도성을 공격했습니다. 술탄은 그렇게 힘의 외교로 이웃 나라들의 손발을 묶고, 스파이를 활용해 도성 안의 민심을 흔들었습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나와 함께 종군 기자가 되어 배를 타고 해상 전투, 그 격전의 현장으로 떠나 볼까요?

▲ 자, 이제 출항이다! 나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단단히 끼고 썼다. 이 선글라스를 통해 보면 마술처럼 1453년 당시의 해상 전투가 눈앞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우리 일행을 태운 배가 바다를 종횡 무진하던 날은 날씨가 무척 맑았습니다. 하늘도 바다 빛깔이었지요. 그러나 육지에서 볼 때의 바다와 배 위에서의 바다는 느낌이 전혀 달랐습니다. 훨씬 더 광활하게 다가왔습니다.

  32킬로미터에 이르는 길고 좁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흘러갑니다.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바다의 윗물과 아랫물이 교차해 흐릅니다. 윗물은 흑해에서 마르마라 해 쪽으로, 아랫물은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 쪽으로 그렇게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생성 이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빙기에 빙하가 녹으면서 원래는 호수 상태였던 흑해의 얼음물이 빠져나가면서 지표면을 침식시켜 생긴 해협이란 의견, 또 하나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 간에 급격한 지각 변동으로 깊은 틈이 벌어지며 생긴 해협이란 견해다. 종이를 양손으로 잡아당기면 찢긴 부분은 들쑥날쑥하지만 맞대면 원래 모습이 되듯이, 해협 역시 들쑥날쑥 분리된 모습처럼 보이지만 보스포루스 물을 모두 빼낸 다음 양쪽 해안을 맞대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는 주장이다. 이별할 때 반으로 쪼개어 둘이 하나씩 나눠 가졌던 연인들의 거울처럼….

  염도 높은 지중해 물(아랫물)과 염도 낮은 흑해 물(윗물)이 몸을 뒤섞으며 남북으로 서로 엇갈려 흐르기 때문일까요? 보스포루스는 유속이 매우 빠르고 물살이 거세어서 뱃길이 결코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해풍도 모자를 빼앗아 갈 듯 세차게 불어 턱 끈을 단단히 조여야 했습니다. 게다가 급커브 길이 많고 안개도 짙게 끼어 이 지역에선 *해상 사고가 심심찮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에도 그런 사고들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유조선끼리 충돌해 폭발하면서 주위의 석유 저장고까지 폭발시켜 보스포루스 전체가 불타는 느낌이었던 일, 모터보트끼리 부딪쳐 승객 열세 명이 어두운 바다 속으로 사라진 일, 짙은 안개 속을 항해하던 화물선이 보스포루스 해안에서 10미터쯤 육지로 올라가 단숨에 바닷가 목조 저택 두 채를 무너뜨리고는 세 명을 즉사시킨 뒤 3층 거실로 머리를 처박고 들어온 일 등등.


▲ 크루즈 선장은 일반 관광객들의 유람 코스와는 사뭇 다른 내 주문을 소화해 내느라 고생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름다운 풍광보다는 해상 전투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선장은 그래서 난감한 표정으로 더러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형 크루즈 선들의 출입 금지 구역까지 거센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항해술이 노련한 베테랑 선장이었지만, 배가 뒤집힐 듯 기우뚱거리고 물살이 뱃전으로 쳐들어올 때는 바닷가 출신인 나도 조금은 불안했다. 지금도 고마운 건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선장이 해류와 해풍 등 주로 1453년 4월과 5월에 치러졌던 해상 전투에 초점을 맞추고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해댄 나에게 무뚝뚝하지만 친절하게 상세한 답변을 해주었다는 점이다. 해전 당시 술탄의 함대에 합류했더라면 혁혁한 공을 세웠을 것 같은 선장이다.

  그러나 이런 해상 사고는 전쟁과 비교하면 견줄 바가 못 됩니다. 1453년에는 이 일대 바다가 온통 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 최강 해군과 전함은 모두 해양 도시 국가인 베니스의 차지였습니다. 베니스는 자국의 이익이 걸린  이 싸움에서 비잔틴 제국을 돕기 위해 자금 및 식량 지원과 함께 함대를 출동시켰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러 있던 베니스 선박들도 전함으로 개조되어 전력에 힘을 보탰습니다. 오스만 군의 포위전이 시작되었을 때 전투 장비를 갖추고 골든혼 봉쇄 사슬 안에 머물러 있던 선박 수는 모두 26척이었습니다. 골든혼 해역, 특히 방재 구역의 지휘권은 제노아 공병 출신 바르톨로메오 솔리고가 쥐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페라 지역을 관리하는 제노아 인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그에게 골든혼의 지휘권을 맡긴 것 같습니다.

▲ 베니스의 조선소에서 배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인부들과 기술자들. 제노아와 함께 오리엔트 무역을 양분하고 있던 당시의 베니스는 상선을 비롯해 군사용 함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냈으므로 조선 기술이 굉장히 발달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가브리엘레 트레비사노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같은 베니스 선장인 알비소 디에도 역시 끝까지 남아서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해 황제를 기쁘게 했습니다. 해군의 전투력과 항해술, 실전 경험만큼은 비잔틴이 오스만보다 우세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을 위해 싸운 베니스 선장 출신 해군 제독. 4월 20일 해전 당시 야음을 틈타 골든혼의 쇠사슬을 살며시 풀고 요란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3척의 베니스 갤리선을 끌고 나와 오스만 군을 혼란스럽게 한 뒤 아군의 배들을 안전하게 골든혼 쪽으로 인도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4월 28일 기습 공격전에선 총지휘를 맡아 베니스 갤리선 2척을 몰고 골든혼 안쪽으로 쳐들어갔지만 사전 기밀 누설로 실패, 근근이 목숨만 구해서 돌아왔다.


  때문에 술탄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를 퍼부어 해군력의 약세를 만회하려고 전함을 대폭 보강해 해전 경험이 풍부한 발토글루 제독이 이끄는 *대규모 함대 1453년 3월 말경 마르마라 바다에 집결시켰습니다. 선박 수로는 비잔틴 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13세기 초 십자군이 그랬듯이 함대를 골든혼 안으로 들여보내 그쪽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성으로 진입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골든혼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막강한 봉쇄용 철제 사슬이었습니다. 이 쇠사슬은 그 전부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도성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3단 갤리선, 2단 갤리선, 노 딸린 갤리선, 푸스테(기동력이 뛰어난 가볍고 긴 배), 파란다리아(운송용 바지선), 쌍돛배, 외돛배, 소형 연락선 등으로 구성. 선원과 노잡이는 용병이 대다수였지만 죄수와 노예들도 섞여 있었다. 해군의 전투력 보강을 위해 술탄은 1452년 겨울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적의 전함과 병참 기술도 필요하다면 즉각 도입했다. 함대의 총 규모는 140척부터 480척까지 문헌마다 견해가 제각각이다.



▲ 15세기와 16세기 무렵 지중해를 항해하던 군사용 선박. 노를 저어 움직이는 갤리선에 커다란 삼각돛을 달아 속도와 기동력이 매우 뛰어났다. 베니스는 전투용인 경(輕)갤리선과 수송용인 중(重)갤리선을 건조, 최강의 해상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지중해 각국에선 죄수를 강제 동원해 전투용 갤리선의 노를 젓게 하는 일이 오래도록 성행했다.

  1453년 4월 12일, 발토글루는 증원군인 흑해 함대가 도착하자마자 큰 배들을 쇠사슬이 막아선 골든혼 입구 쪽으로 출동시켰습니다. 화살이 빗발치고 대포들이 불을 뿜었습니다. 불 붙은 나뭇조각들이 비잔틴 배를 향해 날아가는 가운데 오스만 군 일부는 닻줄을 끊고 쇠갈고리와 사다리를 붙잡은 채 배에 기어오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각도가 엇나간 포탄도 비잔틴 군의 키 큰 갤리선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는 해군 제독 *루카스 노타라스 대공(大公)의 증원 함대까지 파견돼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 군은 결집된 조직력으로 높이가 낮은 오스만 군의 배 안으로 창과 화살과 투석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발토글루는 후퇴 명령을 내려야 했습니다.

  *종교 통합에 있어서는 황제의 반대편에 섰던 비잔틴 제국의 종교 지도자. 하지만 전쟁 당시에는 골든혼 쪽 성곽 방어의 총책임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도성 함락 이후 술탄이 중용하려 했지만 처자와 함께 죽음을 택함으로써 명예를 지켰다.


  이 패배에 모욕감을 느낀 술탄은 며칠 뒤 탄도가 높아진 개량 대포를 갈라타 곶 바로 건너편에 배치하고 공격을 가했습니다. 첫 포탄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 포탄이 갤리선에 명중해 배를 침몰시키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비잔틴 군의 배들은 페라 성벽을 보호막 삼아 봉쇄 사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오스만 군의 집요한 해상 공격은 비잔틴 군의 육상 방어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육지 성벽에 투입됐던 수비군을 골든혼 방어를 위한 지원군으로 분산 배치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1453년 4월 20일 아침, 교황이 무기와 식량을 가득 실어 보낸  제노아 갤리선들과 옥수수를 선적한 비잔틴 대형 수송선이 남풍을 타고 마르마라 해역으로 재빨리 접어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술탄은 해군 제독 발토글루에게 배들을 나포하되 여의치 않으면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임무를 완수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라는 엄포도 덧붙였습니다. 발토글루는 곧바로 대함대를 이끌고 몇 척 안 되는 만만한(?) 먹이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잔잔하고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해풍이 드센 거친 바다에서 단련된 비잔틴 군의 함대를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술탄의 해군은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4척에 불과한 기독교 군 함대에게 100척이 넘는 오스만 해군이 참패하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발생했을까요?

▲ “술탄은 왜 격전이 치러지고 있는 바다로 뛰어들었을까? 그것도 배가 아닌 백마를 타고….” 그런 캡션과 함께 6편 맨 마지막에 올렸던 사진이다. 짐작했겠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격상 멀리서 명령만 내린 채 지켜보고만 있을 술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함대가 고작 4척뿐인 적의 배를 앞에 두고 고전을 면치 못하자 속이 탄 술탄은 싸움에 가담이라도 할 것처럼 관복이 물에 젖는 줄도 모른 채 말의 다리가 허용하는 깊이까지 직접 말을 몰고 바다로 뛰어들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해전을 진두지휘했다.

  그날의 바다는 보스포루스 해류와는 정반대로 역풍이 몰아쳐서 물살이 무척 드세고 거칠었습니다. 오스만 해군은 갤리선을 조종하느라 애를 먹은 반면 비잔틴 해군의 배는 선체가 높고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집중 공격을 하기에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비잔틴 배들은 오스만 배들을 줄곧 따돌리며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아크로폴리스 아래 지점을 막 돌아 골든혼 안으로 진입하려는 순간 갑자기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배의 돛들이 힘을 잃었습니다. 물살의 한 지류가 남쪽의 보스포루스 해협 쪽으로 급류하다가 여기서 만나 북쪽의 갈라타 해안 쪽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지점입니다. 그런 만큼 물살의 끌어당기는 힘이 남풍 뒤엔 특별히 더 강해져 비잔틴 배들은 그만 거기에서 거미줄에 걸린 곤충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발토글루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형 선박들로 비잔틴 배들을 에워쌌습니다. 그러나 배 위에서 쏘는 경(輕)대포로는 앙각(仰角-올려다본 각도)을 맞추기 힘들었습니다. 발토글루는 자신이 탄 3단 노 갤리선의 앞머리로 비잔틴 수송선의 선미루(船尾樓-배의 고물에 만들어 놓은 선루)를 들이받으며 병사들로 하여금 적군 배들로 쳐들어 올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얼핏 비잔틴 배들이 수많은 오스만 배들에게 일방적으로 포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상황은 딴판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준비된 제노아의 해군 병사들이 물통으로는 불을 끄면서 도끼를 휘둘러 배에 올라오려는 적군의 손과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찍었습니다. 비장의 병기인 ‘그리스의 화염’(4편 참고) 또한 눈부신 활약을 했음은 물론입니다.
  오스만 군은 노 때문에도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배들끼리 노가 서로 뒤엉키는가 하면 공격을 받아 부러져 나가는 노도 많았습니다.
  전투는 비잔틴 수송선을 둘러싸고 가장 불꽃이 튀었습니다. 3척의 제노아 갤리선은 수송선이 곤경에 빠지자 일제히 힘을 합해 수송선에 찰싹 달라붙었습니다. 마치 네 개의 웅장한 요새가 탑을 치켜올리고 오스만 함대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모양새였습니다.
  오스만 배들은 선해전술(船海戰術)이라도 쓰듯이 막대한 타격을 입으면서도 끊임없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위기의 순간, 그러나 해풍은 비잔틴 군 편이었습니다. 해가 지면서 돌연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세찬 북풍이 휘몰아치자 비잔틴 배들은 돛을 한껏 팽창시키고는 오스만 배들의 포위망을 뚫고서 골든혼 쪽으로 질주했습니다. 어둠도 비잔틴 군 편이었습니다. 피아조차 식별 못하는 짙은 어둠 속에서 비잔틴 배들은 아군의 엄호 아래 잠깐 열린 쇠사슬을 넘어 의기양양하게 골든혼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계속된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해전은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발생시켰습니다. 비잔틴 군은  ‘적군은 1만 명 넘는 사망자를 낸 반면 우리는 며칠 뒤에 죽은 두세 명의 부상병을 제외하면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내지 않았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후세의 사학자들은  상당히 과장된 통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처절한 전투로 인해 그 일대 바다가 며칠 동안이나 피로 물들었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원군의 배들이 무사히 도착해 합류함으로써 비잔틴 군은 병력은 물론 무기와 식량까지 늘리게 되었습니다.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도 다시 지펴졌습니다.

▲ 해상 전투 장면을 묘사한 세밀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의 방향이 제각각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런 기본 개념조차 염두에 두지 않고 그린 걸까? 아니면 바다에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상태? 그래도 활과 화살, 창과 칼, 소총과 대포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의 긴박했던 전투 상황을 읽을 수 있다.

  해전에서의 거듭된 패배는 오스만 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술탄은  *발토글루를 비겁자며 배신자라고 몰아세우면서 당장 목을 베려 했지만 부하들의 간청으로 겨우 목숨만은 살려 두고, 자신의 측근 함자 베이를 새로운 해군 제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익히 아시다시피 배들을 육로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골든혼 진입에 성공했습니다.(6편 참고)

  *불가리아 태생의 배교자.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발토글루는 오스만의 해군 제독이 되어 기독교 군과 싸웠다. 아군의 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눈까지 심하게 다쳐가며 술탄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패전의 대가는 혹독했다. 간신히 참수형을 면했으나 직책은 물론 사유재산을 모두 박탈당한 채 곤장까지 맞는 형벌을 받았다. 술탄에게 버림받은 뒤로는 무명인이 되어 가난하게 살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물고 물리는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졸지에 골든혼을 장악당할 위기에 처한 비잔틴 황제는 6편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비상 대책 회의를 열어 밤중에 몰래 오스만 함대에 접근해 배들을 불태워 버릴 기습 작전 계획을 짭니다. 또 한 차례의 대규모 해상 전투가 이번에는 골든혼을 무대로 벌어지게 된 겁니다. 그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해 볼까요?

  최초의 예정일(디데이)보다 4일 늦은 4월 28일, 동이 트기 두 시간 전쯤 트레비사노가 직접 지휘를 맡은 베니스 갤리선 2척의 호위 아래 단단히 무장한 비잔틴 군의 대형 수송선 2척(한 척은 베니스 배, 다른 한 척은 제노아 배)이 페라 성벽의 보호 구역을 살그머니 빠져 나왔습니다. 갤리선 후미로는 트레비존드에서 온 자코모 코코 선장이 이끄는 3척의 푸스테와 가연성 물질을 실은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이 조용히 뒤를 따랐습니다. 이제는 적들의 배를 불바다로 만들 순간이 다가왔다면서 행동 개시를 하려는 순간, 아뿔싸, 해안가에 묵묵히 있던 오스만의 대포가 잠든 바다를 깨우는 굉음과 함께 불을 뿜으면서 선제 공격을 해왔습니다. 동참하기로 한 제노아 인들의 선박이 준비되지 않아 거사가 연기되는 사이에 기밀이 새나가 오히려 오스만의 역공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페라의 탑에서 비치는 불빛을 조명탄 삼아 오스만의 대포들은 목표물을 조준해 줄기차게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수많은 배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돌격 대장 역할을 맡았던 코코 선장은 용맹무쌍하게 앞장서 싸우다가 포탄을 맞고 침몰한 푸스테와 장렬하게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트레비사노도 갤리선을 버리고 선원들과 함께 구명보트로 옮겨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해안까지 헤엄쳐 나온 비잔틴 병사들은 도성 시민들에게 잘 보일 만한 공개된 장소에서 모두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술탄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육로를 통한 선박의 골든혼 진입에 이은 이 해전의 승리로 그는 더욱 확고한 해상 통제와 더불어 성벽 돌파를 위한 강력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 원근법과 음영을 무시하고 그린 이슬람 세밀화. 화가가 달라도 화풍이 같아 누구 작품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무표정한 얼굴들이 쌍둥이 형제들처럼 닮은꼴이다. 범선이 육지로 달리는가 하면, 백마를 탄 술탄은 활과 화살로 무장한 채 바다로 뛰어들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담긴 ‘1페이지 그림책’을 해독이 까다로운 암호를 풀 듯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상상력이 자유자재로 발동한다.

  전세는 점점 비잔틴 제국에 불리해져 갔습니다. 1453년 5월 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다리다 지쳐 베니스 함대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면서 쌍돛 범선 한 척을 오스만 해군 몰래 파견했습니다. 투르크군으로 위장한 12명의 자원병이 오스만 깃발을 꽂은 그 배를 타고 성공적으로 골든혼과 마르마라 해를 빠져 나와 북풍을 받으며 에게해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정작 베니스 함대는 아직 콘스탄티노플로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지금처럼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서 콘스탄티노플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던 탓입니다.
  에게해를 샅샅이 뒤졌지만 베니스 함대를 찾지 못하고 그들이 곧 나타날 조짐도 발견 못한 쌍돛 범선 선장은 선원들에게 어찌 해야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자체 토론 끝에 그들은 만장일치로 복귀를 결심했습니다. 죽든 살든 황제에게로 돌아가 탐색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 신하된 자들의 도리요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떠난 지 20일 만인 5월 23일, 이 무명의 용사들은 이미 오스만 군의 말발굽에 짓밟혔을는지도 모를 콘스탄티노플로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서 위험을 무릅쓴 채 다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순간을  도성 안에서 황제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들의 최후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특수 임무를 띠고 출항했던 쌍돛 범선이 절망적인 소식만을 가득 싣고 귀항하자 이제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대상이라고는 천년 성벽과 성모 마리아밖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 마르마라 해는 남쪽 지중해와 북쪽 흑해 사이의 내해(內海), 바다 안에 있는 바다(Sea in Sea)이다. 연안에는 아홉 개의 작은 섬들이 있는데 *‘왕자 섬’이라 불린다. 여러 종류의 배들이 흑해로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폭이 좁고 안개가 자주 끼어 선박끼리 충돌하는 일이 많아 이를 막으려고 시간을 정해 교대로 일방통행시키기 때문이다. 낮에는 흑해에서 마르마라 해로 가는 배들이, 밤에는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로 가는 배들이 보스포루스를 통과해 항해를 한다.

  *비잔틴 시대에 왕족이나 고관, 사제들의 유배지로 쓰이던 섬들. 황제의 명에 따라 수도원들도 이곳에 많이 지어졌다. 1453년 당시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앞두고 발토글루를 보내 이 섬들을 점령하게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섬이었던 프린키포만의 수비대원 30명은 끝내 항복하지 않고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전사하거나 사로잡혀 도륙되었다. 섬 주민은 모두 노예로 팔려 갔다. 19세기 후반부터 이 섬들은  휴양지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아홉 개의 섬 중 네 개는 무인도다. 섬 안에서는 차량 운행이 금지돼 있어 천연의 아름다움과 정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 내가 ‘종군 기자’란 표현을 썼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넘치는 의욕에서 나온 말입니다. 550여 년 전 해상 전투의 현장을 생중계하듯이 전달할 능력이 내겐 없습니다. 다만 나는 책에서 읽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되새기면서 해풍의 방향과 전투 지점, 물살의 흐름과 세기 등을 가늠해 보았을 따름입니다. 나머지 미진한 부분은 눈 밝은 독자들이 사진들을 보면서 헤아려 주리라고 믿습니다.
  (해상 전투 편에서 언급한 함대의 규모와 전쟁의 양상 및 결과 등은 영국 역사학자 스티븐 런치만과 작가 로저 크롤리, 터키 역사학 교수 페리둔 에메젠과 마흐뭇 바자르의 저서 및 견해를 종합한 다음 내 탐사 경험을 덧붙여 간략하게 정리했음을 밝혀 둡니다.)

▲ 돌마바흐체 황궁. 19세기 중엽 31대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 연안을 따라 길게 지은 바닷가 궁전으로 건물 길이가 600미터에 달한다. 발토글루가 지휘하는 해군 본부가 바로 이 위치(당시 지명은 *디플로키온)에 있었다.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1938년 11월 10일, 이 궁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를 기리기 위해 이 궁전의 모든 시계들은 그가 서거한 시각인 오전 9시 5분에 바늘이 멈춰 서 있다. 요즘 내 시계도 돌마바흐체의 시계처럼 1453년,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에 바늘이 머물러 있다.

  *바다가 조용하고 배가 정박하기 좋은 곳이라 해서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그리스어로는 Diplokion, 터키어로는 Çifte Sütun, 영어로는 Double Columns이다. 이는 우리 말로 옮기면 모두 ‘이중 기둥’이란 뜻을 담고 있다. 1422년에 제작된 부온델몬테의 콘스탄티노플 설계도에는 지금의 탁심 광장과 마츠카 사이의 계곡을 흐르고 있던 하천 바로 건너편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바닷물을 정밀 분석해 본다면 혹시 아직도 미량이나마 전쟁의 잔해인 피의 성분이 남아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자 황혼 물든 저녁 바다가 갑자기 핏빛으로 보였습니다.


▲ 해안 성벽 바로 앞에 있는 마르마라 바다로 물놀이를 즐기러 나온 청소년들. 지금 이들은 방학 기간이다. 오스만과 비잔틴 전사의 후예들답게 늠름하고 골격이 튼튼해 보인다. 수심이 꽤 깊고 가까이로 선박들이 지나가는 바다에서 튜브나 구명 조끼도 없이 헤엄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또 어느 순간 나는 저 깊고 차가운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2만 마리 양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1991년 11월 15일에 일어났던 기막힌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날 루마니아에서 구입한 2만 마리가 넘는 양을 싣고 보스포루스를 지나던 레바논 선박이 러시아로 밀을 싣고 가던 필리핀 화물선과 충돌해 양들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몇 마리 빼고는 모두 파티 대교(보스포루스 제2대교) 밑 어두운 심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불쌍한 일입니까.
  한동안은 또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혹은 자동차들이 유행처럼 파티 다리 아래로 몸을 던졌다더군요.


▲ 유럽(왼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며 놓여 있는 보스포루스 제1대교. 터키 공화국 창건 50주년에 맞추어 1973년에 개통되었으며 왕복 6차선 도로가 나 있다. 총길이는 1560미터, 양 교각 사이 거리는 1074미터, 다리의 폭은 33.4미터, 중앙 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64미터이다. 교각 오른쪽으로 오르타쾨이 모스크(빨간 동그라미 안)가 보인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이다.

  이스탄티노플을 둘러싼 바다에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쌓여온 숱한 사건과 비극적인 사연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 만큼 그 밑바닥에는 온갖 것들이 해류에 휩쓸려 이리저리 낙엽처럼 굴러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과 동물의 뼈, 창검과 소총, 대포와 대포알, 녹슨 훈장과 계급장, 부서진 선박과 자동차의 쇳조각들 등등….

▲ 여기는 골든혼 입구. 갈라타타워가 랜드마크처럼 우뚝 서 있다. 나는 골든혼 저 끝까지 가 보고 싶었지만 선장은 항해 금지 구역이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전후좌우로 요동치는 배가 선장의 말을 뒷받침해 주었다. 놀이동산 바이킹과는 전혀 다른 아찔한 경험이었다. 하는 수 없이 뱃머리를 돌려 다시 보스포루스로 향해야 했다. 보스포루스에서는 배를 세워 놓으면 바닷물의 흐름에 따라 배가 남쪽으로 떠내려 가지만, 골든혼 일대는 다르다. 어떤 해역에서는 바람이 정지하면 배가 오도가도 못한 채 발이 묶인다고 한다. 런치만의 책에 나오는, 조류가 한데 얽혀 배들을 곤경에 빠지게 하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리라. 해상 전투 현장을 탐사하고 돌아와 관련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선명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진실은 역시 현장에 있다!
전쟁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제노아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오스만에 첩보를 제공하는 스파이도 적지 않았다. 물론 비잔틴을 위해 싸운 제노아인도 많았다. 700명의 용병을 거느리고 맹활약한 제노아의 명문가 출신 주스티니아니, 골든혼 봉쇄 사슬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제노아인 공병 솔리고 등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었다.


  나는 아직도 영혼의 거처를 찾지 못한 채 바닷속을 하염없이 떠돌고 있을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시 묵념을 올렸습니다. 저녁 노을이 바다로 스며들어 번지고 있었습니다. 붉게 물든 바다가 내 눈에는 위령제를 위해 불을 밝힌 수많은 촛불들이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때마침 바람도 강하게 불면서 바다 표면과 맞부딪치며 장송곡 같은 마찰음을 연주했습니다. 오늘 밤에는 이 바다위로 안개가 마치 향연(香煙)처럼 피어오를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종군 기자들의 수첩 맨 마지막 줄에는 아마도 애도사 혹은 추도사가 적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 지도로 보는 탐사 경로
  이 지도에 표시돼 있는 파란 색깔 바다 부분은 거의 다 크루즈 선을 타고 탐사했다고 보면 된다. 단 지금은 흙이나 시멘트로 메워진 해자 부분은 빼고 말이다.

P.S.
  요즘 국회는 연중 가장 바쁘게 돌아갑니다. 국정감사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년간은 상임위가 없는 국회의장으로서 이 기간을 이용해 ‘희망 탐방’을 떠났던 나도 올해는 외통위 소속 의원으로서 국감을 치르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10월 8일부터 19일까지는 해외 공관들을 감사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있게 됩니다. 그래서 9편은 주말과 휴일을 반납하고 미리 써 둔 다음 남미 국감 도중에 이메일을 통해 마지막 교정을 보고, 10월 13일, 블로그에 올리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육지 성벽과 해안 성벽, 루멜리 히사르와 해상 전투 등 직접적으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매듭짓게 됩니다.

  10편부터는 약 7회 분량으로 아야 소피아를 비롯해 몇몇 모스크와 박물관, 우르반의 대포, 술탄과 황제의 약전(略傳) 및 리더십 비교 등을 다루어 볼 생각입니다.

  그 동안 내 이스탄티노플 이야기에 관심을 보여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아래 한 장의 사진으로 잠깐의 작별 인사를 대신합니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 마르마라 바다 위에서 바라본 아야소피아(빨간 동그라미 안)와 그 일대. 10편과 11편, 12편에서는 교회에서 모스크로, 다시 박물관으로 탈바꿈한 아야 소피아를 집중 탐사할 계획이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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