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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과 황제

17. 테오도시우스의 성벽=『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121, 366쪽 참고 (구간 99, 312, 384쪽 참고)

Walls of Theodosius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은 내 책 <술탄과 황제>에 QR코드를 도입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었다. 책의 본문에도 군데군데 등장하고, 성벽 복원도(개정판 에필로그 화보, 구간 101쪽)도 수록하고, 부록(개정판 366~367쪽, 구간 384~398쪽)에도 여러 지면을 할애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삼중 성벽의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캡션과 함께 성벽과 성문의 이모저모를 담은 사진들을 제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전달 방법으로는 QR코드 만한 도구가 없으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스탄불에 머무는 동안 내가 가장 자주 찾고, 또 긴 시간을 답사한 곳이 바로 이 성벽이었다. 나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을 살피고 또 살피느라 해 저무는 줄을 몰랐다. 병정 놀이하는 아이처럼 성벽의 앞과 뒤를 오가고,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포탄 자국과 병사들의 혈흔을 더듬었다. 여기에 캡션을 달아 소개하는 사진들은 내가 찍은 수많은 사진들 중 일부지만, 1453년 최후의 전쟁을 독려하는 술탄 메흐메드 2세의 우렁찬 목소리와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려는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발자국이 묻어 있는 증언록이라 생각하고 싶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중 황금문은 따로 QR코드 2번, 책(부록) 371쪽(구간 389쪽)에 설명해 놓았으며, 육지 성벽의 일부인 골든 혼 부근의 성벽(마누엘 콤네누스, 헤라클리우스, 레오)은 QR코드 30번(구간 21번) 및 책 376~378쪽(395~396쪽)에 별도 기술했다.

**골든 혼(금각만) 쪽 성벽은 QR코드 23번(구간 39번, 술탄 함대의 골든 혼 진입), 그리고 해안 성벽은 QR코드 11번(구간 6번, 테오도시우스 항구) 및 34번(구간 27번, 부콜레온 황궁)을 참고하기 바란다.

 

 

마르마라 해안 성벽의 마지막 탑. 이 탑과 성벽 너머로는 마르마라 바다가 펼쳐져 있다. 성탑 중 유일하게 하단부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마도 별궁(Masion)으로도 사용되지 않았을까 싶다. 황금문(골든 게이트) 역시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재료를 확충했을 가능성도 있다. 애초에는 바다와 접해 있었지만 매립으로 인해 바다와 성벽 사이에 육지(공원과 도로)가 생겼다. 다른 성탑들보다 훨씬 높게 지어졌다.


 

대리석 탑의 하단부. 방어탑은 석회석과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게 일반적인데 이 탑은 하단부의 절반 정도가 대리석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황제 전용 부두가 가까이에 있어 대리석을 사용해 수차례에 걸쳐 화려하게 복원되었다. 대리석 기둥으로 이루어진 부분을 근접 촬영해 보니 황금문에 사용한 대리석과 재질은 같지만(마르마라 섬에서 채취) 그 형태가 완전히 달랐다.


 

나 같은 아마추어라도 그냥 터치만 하면 명장면, 명품 사진이 나올 듯한 성곽 풍경. 밭으로 변한 해자 자리에는 채소를 심었다. 무화과 나무 안쪽으로 군마가 다니던 길이 있었다. 황금문에서 벨그라드 문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풍경이다.

 

내성벽과 허물어진 내성탑(팔각형 2층 구조). 외성벽의 흔적과 앞쪽에 시골 돌담처럼 쌓은  해자 벽이 보인다.

씨앗이 뿌려지고 푸성귀가 자라는 밭은 1453년 당시에는 폭 20미터, 깊이 10미터의 해자였다. 무화과나무 너머로 내성벽과 파괴된 내성탑들이 보인다. 사진의 중상단을 보면 외성벽 위에 잔해로 남은 외성탑을 확인할 수 있다. 무화과나무들이 서 있는 위치는 외성벽과 해자 사이 통로였다. 멀리(맨 왼쪽) 보이는 것은 새로 복원된 내성탑. 복원 안 된 성탑과 확연히 구별된다.

 

내성탑(4각형)과 내성벽. 그 앞은 허물어진 외성벽이다. 지금은 밭이 된 내외성벽 사이의 통로가 확실하게 나타난다. 내성벽 위의 흉벽은 사라지고 내성탑 상부는 무너졌지만, 2층으로 된 내성탑 상부층을 보면 측면에 총안(銃眼)으로 쓰인 구멍 3개가 뚜렷하다.

 

외성탑(흰색)과 내성탑(벽돌 무늬). 평균 55미터 간격으로 들어선 아흔 여섯 개의 성탑들이 성벽과 도성을 지키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오디'를 따고 있는 여인들. 이스탄불 오디는 검자주색과 하얀색으로 익는 두 종류가 있다. 어릴 때 뒷동산에서 오디 따 먹던 추억을 이스탄불 시내에서 재현(?)할 수 있어 기분 좋았다. 뽕나무 바로 뒤편에서는 성벽과 성탑들이 지나가는 길손들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허물어진 천년 성벽 위를 걸어가며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청춘 남녀. 저렇게 한적하면서도 아슬아슬한 길 위에서는 자연스럽게 손잡을 일도 많이 생길 것 같다.

 

해자 자리에는 농작물이 푸르게 자라고, 왼쪽의 외성벽은 일부가 남아 있다. 무화과나무와 뽕나무,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고, 그 뒤로 내성벽과 내성탑의 위용이 보인다. 여기서 가꾸는 채소는 영양이 풍부하고 맛이 뛰어나다. 이스탄불은 곳곳에 무화과나무가 즐비하고 맛도 좋아 이스탄불을 '인지르(Incir ; 무화과) 도시'라고도 한단다.

 

외성탑, 외성벽, 내성탑, 내성벽이 확실히 구분된다. 밭이 된 곳은 해자가 파여 있던 자리였다. 해자 방벽까지 분명히 보여 삼중 성벽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새로 복원된 제2군문(벨그라드문) 성문 입구와 내성탑(왼쪽 사진). 해자벽, 외성벽과 외성탑이 보인다(오른쪽 사진). 사진 앞쪽 아래 지점부터 해자가 시작된다.

우뚝 선 성탑과 그 사이로 난 성문. 멀리서 보면 톱니바퀴 모양이다. 희한하게도 나처럼 이 난공불락 철옹성에 관심을 두고 탐사에 나선 사람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성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양떼. 양들은 보기와는 달리 심보가 고약해서 겨울에는 남들 추우라고 떨어져 자고, 여름에는 남들 더우라고 붙어서 지낸다는데, 정말인가? 불볕 더위인데도 하나같이 몸을 밀착시키고 있는 이 양들을 보면 우스갯소리만도 아닌 것 같다.(2010년 8월)

 

옛 도시에서 바라본 내성벽 안쪽 풍경. 차량 뒤편으로 내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그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3중 성벽의 옛 모습과 부분 복원된 모습. 해자 벽은 말끔하게 수리되었다.

8각형 내성탑 / 4각형 외성탑 /  4각형 내성탑

 

유네스크의 예산 지원을 받아 복원을 마친3중 성벽의 위용!! 어떤 방향에서 보든 아름답고 웅장하다. 방어탑들은 대부분 사각형이었지만 일부는 다각형 탑이었다.(개정판 373쪽 및 별도 부록, 구간 391~392쪽 참고) 외성벽과 내성벽 및 내성탑. 맨 앞 구조물은 해자가 끝나는 지점에 세워진 방책이다. 글자 그대로의 원상 복구가 아닌 현대화된 복원이라 아쉬운 마음이 자꾸 든다.

 

복원된 성벽. 해자-해자 방책(흉벽)-외성벽-내성탑-내성벽. 말끔한 모습이지만, 그런 만큼 옛 정취는 느껴지지 않는다.

 

 

해자, 외성벽, 외성탑, 내성벽, 내성탑의 구분이 뚜렷하다. 보수 및 복원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성벽 앞에 자리 잡은 야채 노점. 해자 터에서 경작한 푸성귀들을 팔고 있다. 당근, 가지, 고추, 토마토, 배추 등등. 싱싱하고 맛있다.

 

 

파괴된 내성탑을 중심으로 외성벽, 내성탑, 내성벽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구분할 수 있다. 복원된 것보다는 옛것이 더 아름답고 운치가 있다. 이 성벽과 성탑들이 수년 안에 말끔히 복원되면 옛 모습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내성탑 오른쪽으로 모스크의 둥그런 돔과 뾰족하게 솟은 첨탑(미너렛)이 보인다. 어느 자미인지는 이름을 잊었다. 이런 사원들이 수백 개를 헤아리니까.

 

페게 문(소문) 근처. 멀리 마르마라 바다가 보인다. 바다 쪽에서 육지로, 남에서 북으로 이동 중이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이 모호할 만큼 참 맑은 날씨였다.

 

페게 문(소문). 체육관(이스탄불시 운영)과 소문 앞이 해자가 있던 자리이다. 무화과나무 바로 뒤는 외성벽, 아치형 문 두개가 나란히 보인다.

 

해자 벽-외성벽-내성탑(금이 가 있는 것). 왼쪽 뒤로 보이는 현대식 주택과 대조를 이루며 색다른 풍경을 빚어내고 있다.

 

페게 문으로 가는 길. 아치형 다리는 해자를 채운 물이 흘렀던 곳이다. 초록색과 하늘색이 눈의 피로를 가시게 한다.

 

페게 문(실리브리 카프). 1261년 라틴 왕국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1453년 정복 전쟁 때도 격전이 치러졌던 곳이다.

 

페게 문 성벽에 기념으로 걸려 있는 당시 사용된 오스만 튀르크군의 대포알. 아랍어로 표기된 글자라서 해독을 못하는 게 아쉬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봐도 정확한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페게 문 외성벽과 내성벽 사잇길. 이곳은 예외적으로 그 폭이 좁다. 이런 통로를  '페리볼로스' 라고 한다. (한편 외성벽에서 해자까지의 통로를 '파라테이키온'이라 하였는데, 학자에 따라 간혹 혼용하여 불렀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페게 문 내성벽과 외성벽 사이로 난 이 통로를 보다가 문득 그런 성경 말씀(마태복음 7장 13절)이 떠올랐다.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 좁은 길이 생명 길이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길임을 강조한 말씀이다. 물론 '구원'을 얻기 위해 나선 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도시에서 '영원한 제국'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본문 각주 101번(362쪽) 및 QR코드 37번 참고)

 

페게 문을 통과해 성 밖으로 나가고 있는 자동차들. 성문 통과 가능 높이는 2.5미터이고 폭은 2.9미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그 옆에 세워져 있다.

 

페게 문 바로 뒤에 있는 '하딤 이브라힘 파샤 자미. 오스만 튀르크 최고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의 작품이다. 개축되면서 본래의 건축미학적 가치가 많이 손상되었다. 시난은 에디르네의 옛 황궁터에 지은 셀림 자미(유네스코 문화재) 등 수많은 건축 작품을 남겼다.

 

페게 문에서 레기움 문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무너진 성탑. 완파된 것으로 보아 전투가 격렬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겨우 형체만 남은 내성탑. 복원 공사가 모두 끝나면 이런 리얼한 장면을 만나기 힘들어질 것 같다.

 

전쟁 중 대포알의 공격을 받아 부서지고 금간 성벽과 성탑은 560년의 세월을 지나오며 지진 등의 재난을 맞아 더욱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대로가 훌륭한 설치 미술 작품이다.

 

해자-외성벽(외성탑)-내성벽(내성탑). 보수된 새 성벽과 부서진 채로 남아 있는 내성탑. 상단부가 날아가 버린 성탑 위로 포연처럼 하얗게 구름이 떠 있다.

 

해자-외성벽-내성벽(성탑). 아래 부분을 제외하고는 말끔하게 보수 공사를 마친 모습이다.

 

폐허 그대로 남아 있는 외성벽, 내성벽, 내성탑, 해자터. 조명기기 왼쪽으로 외성탑도 보인다. 외성벽 사이의 총안, 외성벽과 해자 사이의 통로(풀이 난 자리)가 뚜렷하다. 회색 벽돌 부분은 해자 둑. 해자 터에 일군 밭에서 히잡을 쓴 터키 여성들이 농사일을 하고 있다.

 

해자 안쪽 둑은 불규칙한 크기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둑의 아랫부분에 보이는 구멍은 도시 쪽에서 물을 흘려 보내는 관로였을 것이다. 외성탑의 일부와 외성벽, 여러 개의 총안이 확실하게 보인다. 이 내성탑은 사각형이고 총안이 한 면에 각각 두 개씩 있다.

 

해자(벽)-외성벽-내성벽(성탑). 해자 둑 돌틈 사이로 뿌리를 내린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레기움 문의 외성문. 성문을 감시하고 방어했던 외성탑 터가 사진의 앞쪽으로 살짝 보인다. 모자를 쓰고 배낭을 멘 반바지 차림으로 도성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 뒷모습이 보인다. 이 성을 쌓은 적색파 서커스단의 이름을 따서 '붉은 문(로우시우 ; Rhousiou)'이라고도 부른다.

 

레기움 문에 새겨져 있는 명문. “테오도시우스의 명에 의해 콘스탄티누스는 강력한 성벽을 두 달 안에 세웠다. 팔라스(아테네)의 여신도 이렇게 강한 성채를 이렇게 빨리 짓지는 못할 것이다.”

 

레기움 문 상인방에 있는 명문. 콘스탄티누스(공사 책임자)가 보수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석벽 틈 사이로 잡초가 둥지를 틀고 있다.

 

레기움 문 내성문 안에서 교통 정리를 하고 있는 자원 봉사자. 성문은 차량이 통행하기에 그 폭이 넉넉하지 않아서 한 쪽이 진행하면 맞은편 차는 기다려야 한다. 성문 역시 2층 아치형으로 지어졌다.

 

레기움 문 안쪽에서 본 내성벽. 오른쪽 가옥은 터키의 전통적인 2층 구조 주택으로 1층보다 2층이 약간 더 돌출되도록 지어졌다.

 

레기움 문에서 톱카프 방향으로 가는 길. 내외성벽과 내성탑이 뚜렷하다. 초승달(반달) 모양의 외성탑(무화과나무 부분), 그 뒤는 내성벽이다.

 

북쪽으로 계속 진행하며 있는 삼중 성벽. 사각형과 장방형 내성탑. 전면에는 창(총안)이 2개 있고 측면에는 3개의 창이 있다. 성탑은 장소에 따라 여러 모양을 갖고 있다.(<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권말 부록 368~369쪽 및 별도 부록 참고, 구간 386 및 390~391쪽 참고) 외성탑, 외성벽, 해자.

 

내성탑-내성벽-외성탑-외성벽-앞쪽의 푸른 색깔을 띤 돌더미가 있는 곳이 해자의 위치였다. 외성벽 계단으로 한 사나이가 올라가고 있다.

 

2010년 여름, 터키의 8월은 섭씨 40도가 훌쩍 넘는 무더운 날씨였다. 톱카프를 향해 걸어가는 내 등 뒤에 멘 배낭에는 생수병이 보통 두 개 정도 들어 있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곡선을 그린 외성탑과 4각형 내성탑. *내가 보기에는 반달 모양에 가까웠지만 이곳 사람들은 터키 국기를 연상하는 듯 초승달로 표현한다. 외성탑 앞에서 한 사나이가 잔디밭에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다.

 

톱카프에서 제4군문 방향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 가로등이 깃발을 든 산작 타르들처럼 그 앞에 도열해 있다.

 

대포알이 관통한 흔적일까? 중앙에 큰 구멍이 난 외성탑의 모습. 그 뒤로 내성벽과 내성탑이 보인다.

 

제4군문 근처 내성탑과 내외성벽의 잔해. 1453년 당시에는 이렇게 한가롭게 나무들이 서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4군문 지나면 바로 있는 밀렛 자데시(대로)로 트램바이(전철)가 다니는 큰 도로로 변했다. 이 문 근처를 가장 먼저 부수고 들어왔다는 것이 이스탄불대학교 페리둔 교수의 주장이다. 도로가 난 덕에 내・외성벽의 두께와 통로, 내성탑의 높이와 모양 등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1600년 성벽으로의 초대. 드디어 성벽을 관광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뒤쪽이 새로 보수한 성벽인데 사진으로는 옛맛이 안 난다. 톱카프(로마노스 문) 가기 직전에 있다.(왼쪽 사진) 2년 전에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많이 깨끗해져서 무엇보다 다행이다.

보수된 성벽을 담으로 활용한 야외 레스토랑의 모습. 맨 왼쪽이 내성벽, 그 앞은 4각형 내성탑(터키 국기가 살짝 보인다), 맨 오른쪽이 외성벽과 외성탑이다.(가운데 사진)

1453년 전쟁터에서의 오찬. 성벽을 테마로 내세운 레스토랑에서 지인들끼리 담소를 즐기고 있다. 구청에서 운영하는 식당이다.(오른쪽 사진)

 

 

보수를 마친 내성벽 쪽 총안. 바깥쪽 구멍은 작고 안쪽 구멍은 크다. 방어와 공격에 모두 유리한 구조이다.

 

매립과 단장이 모두 완료된 내외성벽과 그 사잇길. 산뜻한 반면 고색창연한 풍치는 자취를 감추었다. 매립된 만큼 높이 올라왔고, 옛날 군마가 다니던 길에 잔디를 깔아 놓아 다니기는 참 편하다.(이곳만 그렇다.)

 

톱카프 근처의 8각형 내성탑. 그 뒤는 4각형 내성탑, 오른쪽은 외성벽(흉벽)이다. 내성탑 위, 벽돌이 떨어져나간 부분은 대포를 맞았던 자국일까?

 

톱카프 성문. 히잡을 쓴 두 아가씨가 팔짱을 끼고 성문 밖으로 나가고 있다. 왼쪽 벽에는 터키 국기가 선명하다.

 

 

톱카프의 앞문과 뒷문(이중 문) 사이. 거구의 사나이들도 이 문 앞에 서면 왜소하게 느껴진다.(위-오른쪽 사진)

톱카프. 복원의 손길을 거쳤지만 성벽의 엄청난 두께를 실감할 수 있다. 왼쪽 벽에 화살표와 함께 파란색 페인트 글씨로 쓴 'WC'는 낙서인가, 화장실 방향 표시인가.(위-왼쪽 사진)

톱카프 성문 앞에 이스탄불 정복자협회에서 부착해 놓은 정복 전쟁 기념 동판.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아침, 정복자 파티의 군대는 대포를 쏘아 부서진 이 근처의 공백을 통해 이스탄불로 진입했다."(아래 사진)

 

 

 톱카프에서 지나 리쿠스 계곡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만난 성벽과 허물어진 내성탑. 버팀대를 세워 무너짐을 방지하고 있다.

오른쪽 피사체를 저녁에 본 모습. 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저만치 성벽 너머로 모스크의 미너렛(첨탑)이 뾰족하게 깎은 연필처럼 저물어가는 하늘을 가리키며 서 있다.(왼쪽 사진)

 

 

톱카프 아래 쓰러져가는 내성탑들. 저 상태라면 우르반의 소형 대포알 하나만 정통으로 맞아도 폭삭 무너져 내릴 것 같다.

 

보수된 성벽과 본래 모습의 성벽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비교를 위해 일부 성벽은 더 이상 복구를 하지 않고 유지시키는 것도 문화유산을 제대로 지키는 한 방법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질 듯한 성탑(내성탑과 외성벽, 톱카프 아래쪽).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인 만큼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역력하다.

 

뒤편에서 본 내성벽 모습. 성벽은 완전히 무너지고, 지각 변동으로 길이 올라왔다.(톱카프에서 리쿠스 계곡 쪽으로 가는 길에)


외성벽의 잔해. 이 허물어진 성벽은 아마도 지진과 세월의 풍화 작용 탓이겠지만, 1453년 당시 격전이 휩쓸고 간 뒤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제5군문(펨프톤 문). 치열한 공방이 있었던 곳이며, 터키인들은 ‘휘줌(Hǖcum ; 공격, 함락)의 문’이라 부른다.

 

제5군문(펨프톤 문)에 새겨진 명문. 비잔틴 제국 최후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가 복원했다는 내용이다.

 

리쿠스 계곡 근처의 내성벽(왼쪽)과 내성탑. 메소테이키온 성벽 중에서도 취약한 지역이었다.

 

허물어진 모습이지만 외성벽의 두께를 실감할 수 있다. 외성벽은 2미터 두께에 8.5미터 높이였다.

 

난공불락 철옹성도 세월의 무게는 견디지 못하는가. 내성탑과 성벽 그리고 외성탑의 잔해(에디르네 카프 쪽에서 제5군문 방향을 바라보고 촬영).

 

에디르네 카프(카리시오스 문)와 제5군문(펨프톤 문) 사이의 소문(小門).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에디르네 카프(카리시오스 문)와 제5군문(펨프톤 문) 사이에 있는 내성탑과 내성벽의 잔해. 정밀하게 성분 분석을 해보면 여기저기에서 1453년 숨진 병사들의 혈흔이 발견될 것만 같다.

 


에디르네 카프(카리시오스 문)에서 리쿠스 계곡 쪽으로 내려가는 길. 멀리 터키 국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에디르네 카프(카리시오스 문) 통로에서. 성문의 폭을 가늠할 수 있다. 내 옆에 있는 아가씨는 해안 성벽을 전공한 니사 박사. 

 

에디르네 카프(카리시오스 문) 정문. 성벽 오른쪽에 이스탄불 정복자협회에서 기념 동판을 붙여 놓았다. "정복일(5월 29일) 정복자(술탄 메흐메드 2세)가 이 문을 통해 들어갔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시작(골든 혼 기준) 부분. 멀리 보이는 시가지는 골든 혼 건너편으로 갈라타(페라) 지역이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8각 성탑. 성탑과 성벽의 두께 그리고 높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