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속으로/신문/방송기사

[한국경제]한경과 맛있는 만남 - 김형오 前 국회의장 "정치 본질은 `하수도 관리`…입으로만 하려는 사람 많아"

 

[한국경제]2012-12-14 기사 바로가기 클릭

 

정치 떠나니 마음 너무 편해

악조건을 이기기 위한 결단…마키아벨리 같은 간계…모두 필요한 게 리더십

2009년 이스탄불 방문했다 비잔틴제국 이야기에 매료…하루 10시간씩 집필해 책 완성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입법부의 수장을 지냈던 정치인이 역사책을 들고 돌아왔다. 우리나라 역사도 아닌 15세기 중반 비잔틴제국의 멸망을 다룬 책이다. 지난 20년간 정치만 해온 사람이 무슨 책이냐고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책장을 넘기는 순간 달라진다. 웬만한 저술가 못지않게 치밀하고, 문학적 기교도 뛰어나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쓴 술탄과 황제(21세기북스 펴냄) 얘기다. 김 전 의장은 지난해 8월 갑자기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그의 지역구는 여당 지지세가 강한 부산 영도. 사실상 보장돼 있는 6선 의원의 길을 스스로 접은 것이다. 총선 불출마 이후 김 전 의장의 행보에 대해 다양한 억측이 나왔지만 그가 작가로 변신할 것이란 사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신문기자와 정치인에 이어 작가로서 제3의 인생을 시작한 김 전 의장을 서울 마포 음식점 ‘샤르르 샤브샤브’에서 만났다. 식당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동네 골목길 한쪽에 자리잡고 있었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식당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가득찬 손님을 보고 제대로 찾았음을 알 수 있었다. 자리를 잡고 샤부샤부를 주문하니 고기와 야채로 상이 가득 찼고, 각자의 자리에는 개인용 샤부샤부 냄비가 놓여졌다.

 

◆역사책 내놓은 전 국회의장

인터뷰는 그가 내놓은 책에 대한 얘기로 시작됐다. 김 전 의장은 “책을 쓰는 동안에는 하루에 3시간 이상 잔 적이 없고, 매일 10시간 이상 앉아 글을 쓸 정도로 몰두했다”며 “5개월이 걸렸는데 체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기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왜 갑자기 책을 쓰겠다고 생각하게 됐을까. 김 전 의장은 2009년 1월 국회의장 자격으로 터키 이스탄불을 방문한 게 계기가 됐다고 했다.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을 구경하던 중 우연히 쇠사슬 유물에 얽힌 이야기를 듣게 됐다. “가이드가 ‘비잔틴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무함마드 2세의 해상 침공을 막기 위해 쇠사슬로 항만을 아예 막아버렸죠’라고 설명하기에 ‘아 그럼, 이 쇠사슬 덕분에 침공을 막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가이드가 ‘아뇨, 배를 끌고 갈라타언덕을 넘어 점령에 성공했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더군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나 싶었죠.”김 전 의장은 돌아오자마자 국내에 있는 당시 전쟁과 관련된 서적을 모조리 섭렵했다. 공부를 거듭할수록 호기심은 커져갔다. 당시 전쟁을 다룬 책들도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직접 책을 써 보자고 마음먹었다. 이후 전쟁의 무대였던 터키를 다섯 번이나 방문했다. 한번은 현지 대학에 방문연구원으로 등록해 45일간 마치 종군기자처럼 성벽을 몇 날 며칠 찾는 등 격전의 현장을 샅샅이 뒤졌다. 이 과정에서 수십명의 현지 전문가와 인터뷰했고, 해외 서적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한마디로 미친 듯 푹 빠져 지냈다.김 전 의장은 벌써 다음 책에 대한 구상도 마쳤다고 했다. “지금 계획하고 있는 책은 정말 쓰고 싶었던 대작”이라고 말했다. 어떤 내용인지 귀띔해 달라고 하자 “아직 공개하기는 이르다”며 손을 내저었다. 사실 그는 국회의장 시절 수필집 2편을 내면서 등단까지 한 ‘베테랑 작가’다.

 

◆“정치인은 하수도 관리하는 사람”

냄비 속 육수가 끓기 시작하자 김 전 의장은 “가열기 온도를 조금 낮추시고 야채랑 고기를 잠깐 넣었다 드세요”라며 시범을 보였다. 고기를 상추에 싼 뒤 소스에 찍어 먹으면서 “샤부샤부 집이 많지만 이렇게 담백하고 깔끔한 샤부샤부는 드물다”고 극찬했다. 그의 식성은 소박하다. 5000원 정도 하는 국밥을 즐겨 먹는다. 손님이 찾아오거나 직원끼리 회식하는 특별한 날은 무조건 이곳을 찾는데, 그가 즐겨찾는 식당 중 가장 비싼 곳이라고 했다.대화는 정치이야기로 흘러갔다. 김 전 의장은 “예전엔 하루 2시간 정도 신문을 정독했고 저녁뉴스도 꼬박꼬박 챙겨봤는데,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정치 관련 기사를 보지 않았다”며 “정치판을 떠나니 확실히 마음이 편하더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단지 사라질 뿐이다’고 했듯이 정치에도 역시 은퇴가 없고 서서히 사라질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부 동료들이 정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정치에 대한 소신을 물었더니 “정치는 하수도 관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물은 상수도와 하수도가 있죠. 상수도는 종교인이나 철학자 교수 같은 분이 관리하고, 정치인은 하수도를 관리한다고 봅니다. 하수도를 잘 관리하려면 더러운 물에 손을 집어넣어 뚫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지도자 중에는 입으로만 하수도를 관리하려는 분이 있어요. 그게 좀 아쉽습니다.”한국의 정치 개혁이 어느 정도 실현됐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많이 변했죠. 선거 때마다 변하고,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변해요. 특히 김영삼 정부랑 노무현 정부에서 많이 깨끗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김 전 의장은 “내가 처음 국회의원 할 때만 해도 보좌관이 일종의 ‘해결사’ 노릇을 하는 문화였는데 요즘엔 다들 각 분야 전문가들을 채용하지 않느냐”며 “점점 정책에 무게가 실리는 것도 의미 있는 변화”라고 말했다. 정치개혁과 관련해 ‘안철수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김 전 의장은 “나올 게 나왔다고 본다”며 “안철수 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기존 정당인 민주통합당과 힘을 합치기 보다는 끝까지 자기만의 길을, 정치개혁의 길을 갔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분도 기성 정치권에 편입되면 수 많은 정치인 중 한 명이 될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에 대해서는 “위기의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자신이 쓴 책 주인공의 사례도 거론했다. 김 전 의장은 “비잔틴 황제는 항복하자는 신하들의 조언을 다 물리치면서 끝까지 버텼고, 오스만튀르크 술탄 역시 토호계급의 반대가 계속되자 모든 걸 던지면서 공격을 이어갔다”며 “악조건을 이기기 위한 결단과 마키아벨리식 간계, 가차 없는 냉혹함 등을 모두 갖춰야 하는데, 우리 후보들이 그런 내공과 리더십을 길렀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다음 대통령은 국회와의 소통에 힘써야”

한참 동안 고기와 야채를 데쳐 먹자 접시에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무리는 칼국수로 하면 됩니다. 육수를 더 붓고 세게 끓이세요.” 김 전 의장은 건배를 제의했다.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면서 먹으니 기분도 좋네요.”최근 정치 개혁을 바라는 목소리가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잠깐의 침묵 뒤에 답이 나왔다. “요즘 국회의원을 줄이자는 얘기도 나오는데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국회의원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하게끔 만들어야지 숫자를 줄이는 게 정답은 아니죠.”

"제대로 정치하려면 당론·공천·지역구에서 자유로워야"

그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국회를 비효율적 조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며 “국회와 제대로 소통을 못 하다 보니 일을 열심히 한 것에 비해 저평가받아 아쉽다”고 했다. 이어 “인수위 시절에도 몇 차례 야당과 협상해야 한다고 조언했는데, 이 대통령과 일하는 분들이 대부분 정치와 한발 떨어져 있다 보니 이런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비례대표를 늘리자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도 순기능에 비해 부작용이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비례대표 제도를 통해 각 분야 전문가를 국회에 입성시키겠다는 건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아요. 비례대표는 공천 권한을 가진 일부가 사실상 마음대로 한다는 거죠. 그 결과 오히려 보스 정치만 강화시켜요.”

 

◆후배 국회의원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후식이 나올 때쯤 19대 국회 초선 의원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우선 세 가지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첫 번째가 당론, 두 번째가 공천권, 세 번째가 지역구민이죠.” 당론과 공천권으로부터의 자유는 정치권에서 많이 나오는 이야기지만 지역구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말은 생소했다. 어떤 의미인지 다시 물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국회의원은 많지 않아요. 자칫하면 지역구민의 반발을 들을 수 있으니 말이죠. 우리나라 지역구 의원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지역구민 행사에 참여해야 해요. 그런데 소홀하면 ‘인간미 없다’고 욕을 먹는 문화죠. 그러면 언제 정책 연구하고, 법안을 공부하겠어요. 이런 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김창준 전 미 하원의원과의 일화도 들었다. “예전에 미국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둘 다 바빠 정신이 없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나는 지역구민 만나느라 바쁘고, 김 의원은 강연하고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하더군요. 그때 정말 부럽다고 생각했죠.”지역구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김 전 의장은 “실제 실현하기는 쉽지 않을 일”이라며 “한 발은 지역구민과의 소통이라는 현실에, 다른 한 발은 정책 연구라는 이상에 딛고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대화 주제는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김 전 의장은 “온 힘을 쏟아 책을 쓰고 나니 우리나라의 독서문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다른 나라에서 지하철을 타면 책읽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한국에서는 다들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책읽는 문화가 더 널리 퍼져 다음 책을 더 기쁜 마음으로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

 

<하략> 기사 전문은 바로가기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