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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5 중앙일보 시론] 껍데기 분칠은 그만하고, 속을 바꾸자

‘아레테’는 기원전 그리스에서 지도자가 갖춰야 할 최고의 가치였다. ‘덕’ 또는 ‘탁월함’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이지만 원뜻은 용기, 설득력 그리고 명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우스가 보여준 아레테는 적과 위기 앞에서 빛을 발한 용기였다. 뒤를 이은 오디세우스의 아레테는 언변이었고, 페리클레스는 이를 아테네 시민에 대한 설득력으로 승화시켰다. 군인에겐 용기, 정치인에겐 설득력이 아레테의 핵심이고 지도자의 요건이었다. 고대 그리스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것도 지도층에 이 아레테가 충만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 때 우리는 아레테의 기본인 용기도, 설득력도 보지 못했다. 제복 입고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보여줘야 할 용기는커녕 제복에 대한 최소한의 명예마저 그들은 지키지 못했다. 한마디로 모든 제복 입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렸다. 오히려 학생·교사·일반인·임시직 승무원들이 순결한 자기희생으로 제복의 역할을 대신해 더욱 가슴을 베어내듯 아프게 했다.

 어느 누구도 희생자 가족과 국민을 설득하지 못했다. 설득은 믿음과 공감을 전제로 하건만 현장에 간 총리와 장관은 대화 상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분노와 불신과 애절함만이 가득한 공간엔 유언비어와 선동이 독버섯처럼 돋아났다.

 바다에 몸을 던진 제복이 없듯이 유족과 국민을 위해 몸을 던진 리더는 보이지 않았다. 여과 장치도 제어 과정도 없다 보니 화살이 곧장 대통령에게로 날아갔다. 대통령의 언행에 토를 다는 지적이 빗발쳤다. 사건 즉시 대통령이 현장에 간 것은 잘한 일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가 최고 책임자로서의 자세는 확실했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대통령도 참모들도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수천만 국민에게 확고한 믿음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말과 행동이 미처 준비되지 못했다. 참모들은 ‘말씀’을 받아쓰기 바빠 정부의 역점 사항인 ‘창조’와 ‘개혁’은 남이 하는 일로 생각했을까.

 설득에 실패하면 사태 장악도 안 되는 법이고 정부의 신뢰는 무너지고 만다. ‘내가 옳으니 날 따라 오라’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한 세상이다. 케밥과 다이빙벨 소동은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낸 해프닝이다. 터키 국민 요리인 케밥으로 실의에 찬 분들을 위로하려던 선의는 누군가의 “케밥은 잔치 때나 먹는 요리”라는 한마디로 순수성을 의심받으며 자칫 두 나라 국민 관계까지 어색해질 뻔했다. 불신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세상엔 유언비어가 얼마나 침투하기 쉬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구명조끼 입고 선실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엉터리 방송으로 무고한 생명을 잃은 부모 심정에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다이빙벨은 두고두고 반성해야만 할 대목이다. 이런 초유의 사태가 터지면 온갖 아이디어가 백출하게 마련이다. 언로는 틔워두되 책임자는 냉정해야 한다. 이 방면에 손때가 묻은 사람이라면 물때와 바닷속 선체 상태를 보면 바로 판단이 서야 한다. 베테랑 전문가는 그만두고 책임감만 있었어도 이런 해프닝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생명과 직결된 일에 검증되지 않은 작업은 할 수 없다. 내가 책임자로 있는 한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소신과 용기를 지닌 사람을 우리는 왜 만나지 못할까. 기본이 약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아드 폰테스(Ad Fontes:근원으로!)”라고 외쳤다. 여기서 말한 근원은 고대 그리스 문물을 뜻하지만 바로 이것이 인류 문명사에 큰 획을 그은 르네상스의 정신을 열었다. 기본이 없이는 학문도 정치도 문명도 발전할 수 없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렸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 보니 절차와 과정은 ‘과감하게’ 생략됐다. 어느덧 ‘목표 달성과 결과 만능주의자’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지난 시대의 금언이었으나 새 시대엔 장벽이 되었다. 늦게 가더라도 분명히 알고 정확히 가야 한다. 하드웨어에서 콘텐트로 소프트웨어적 발상 전환을 해야 한다. 지금 나오는 대책들은 기구·조직 개편하고 사람 바꾸자는 식이다. 여전히 하드웨어적이다. 속을 바꿔야 하는데 껍데기 분칠할 생각부터 한다. 수나 양보다는 질과 격이 중요하다.

 왜 우리에겐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가진 ‘제복다운 제복’이 안 보이는지, 왜 국민 생명과 직결된 부서가 기피 대상이 됐는지를 철저히 진단하는 일이 먼저다. 두 달밖에 안 된 장관 바꾼다고 사고가 안 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를 바꿔야 한다. 근원으로 들어가 차분히 안을 들여다보자. 진정한 용기로 속속들이 자기 무장을 하고 진심으로 남이 공감할 수 있는 설득의 논리를 개발할 때까지 거듭 고민하자.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세상이다. 살아 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헌신할까를 먼저 생각하자. 언제까지나 봄이 오지 않는 나라에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김형오 부산대 석좌교수 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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