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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3 문화일보] 오피니언-時評 '기러기 가족’과 한국 교육의 길

고정 필자로 참여하고 있는 문화일보 오늘자(33) 時評입니다. 입학식과 새 학기를 맞아 한국의 공교육이 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기러기 가족문제와 함께 짚어 보았습니다. 자식의 미래를 맡길 수 없는 교육을 하는 나라는 미래도 없는 법입니다. 우리 교육, 달라져야 합니다.


어제는 입학식, 오늘은 새 학기가 시작된 날이다. 그러나 지난해까지 함께 공부하던 친구 가운데 몇몇은 이제 국내에서는 더 이상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기러기 가족’이 되어 떠나버린 것이다.


10년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일이다. 아이들 유학 뒷바라지를 위해 남편과 떨어져 사는 ‘기러기 엄마’들을 만났다. 사진도 찍지 말고 신상이나 대화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서였지만, 일단 말문이 터지자 약속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야기를 더 하자며 나를 붙잡았다. “미국 오면 편할 줄 알았는데 더 바쁘다, 매일같이 아이를 태워다 주고 태워 와야 한다, 한국 사교육비면 죄다 해결된다 해서 왔는데 돈이 훨씬 더 든다, 따라가기 위해 영어 과외를 한다, 국어와 수학은 따로 공부시킨다….”

내친김에 기러기 아이들도 만나 보았다. 미국에서 등록금이 제일 비싼 스탠퍼드대보다 학비가 더 든다는 인근의 사립학교에서 부모와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는 중고생들이었다.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내 공통적인 물음은 “미국서 공부하면 뭐가 좋은가”였다. 놀랍게도 답변이 한결같았다. “질문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요.” 그 순간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질문을 하기 위해’ 그 비싼 학비를 내고 이 먼 곳까지 와서 혼자 지낸단 말인가. 한국의 공교육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런 어느 날, 내 지역구에서 필리핀으로 자녀를 유학 보낸 젊은 어머니들을 만났다. 당시 부산에서 가장 못 사는 동네였건만 의외로 기러기 가족이 많았다. 미국엔 못 보내도 허리띠 졸라매고 필리핀에라도 보내야 영어라도 배울 게 아니냐는 거였다.

이제 자식 교육을 위해 기러기 가족이 되는 건 흔한 일이 돼버렸다. 이유가 무엇이든 어린아이들이 부모 곁을 떠나 남의 나라로 공부하러 가는 것이 어찌 정상이겠으며, 바른 교육이라 하겠는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조기 유학생 수가 약간 줄고는 있다지만 아직도 해마다 2만4000여 초·중·고생이 이런저런 연유로 나라 밖으로 공부를 하러 간다. 1년짜리 미만은 몇이나 되는지 알 수도 없다. 누적 통계조차 없어 이 시간 우리 아이들이 어느 나라에 얼마나 나가 있는지도 모른다. 유학 중인 대학생 수(22만 명)를 감안하면 적게 잡아도 10만 명 이상일 것이다. 초등학생 비율은 점점 증가 추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몇 차례나 한국의 높은 교육열을 칭찬했다. 교육열이 높은 것과 교육의 질이 높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오바마가 이 점을 착각했거나 알면서도 자국민에게 자극을 주려고 한 발언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나 교육열이 뜨겁고 미국이 본받아야 할 나라라는데 왜 우리 아이들은 오히려 미국으로, 외국으로 나가는가.

교육은 ‘백년대계’라 했다. 개인과 국가의 미래는 교육이 좌우한다. 자식의 미래를 맡길 수 없는 교육을 하는 나라는 미래도 없는 법이다. 우리는 백년대계는커녕 1년 계획도 못 세워 갈팡질팡한다. 실제로 ‘질문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교실’조차 못 만들고 있지 않은가. 교육 정책을 다루는 사람이나 비판하는 사람이나 자기 자식은 외국 학교에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신도 못 믿는 교육을 누구더러 믿으라 하겠는가.

요즘 제주도 거주를 선호하는 중국의 신흥 부자 ‘푸이다이(富一代)’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교육 문제가 한몫을 차지한다. 이곳에 자리 잡은 국제학교들이 중국의 젊은 부모들을 바다 건너 이 섬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 국제학교에 비해 학비가 싸면서 교육의 질도 좋기 때문이란다. 이 ‘아이러니’를 다각적으로 연구·분석해 보면 뭔가 우리 교육에 대한 답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러기 아빠의 외롭고 고달픈 삶을 풍자한 ‘가장자리’란 ‘개그 콘서트’를 본 적이 있다. ‘가장(家長) 자리’에 머물지 못한 채 변방 구석(가장자리)에서 떠도는 우리 아버지들의 현주소를 통렬하게 꼬집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나라, 가장 긴 시간 공부를 시키는 나라, 원하는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나라, 그러면서도 대학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나라에서 오늘도 어린 자식들은 영어를 배우러 먼 나라로 날아간다. 아버지들은 남겨진다, 날개도 없이.


김형오 / 부산대 석좌교수, 前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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