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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8 동아일보] 국민 앞에 오만한 정당, 힘 먼저 빼라


김형오 △1947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1975∼79년 동아일보사 기자 △제14, 15, 16, 17, 18대 국회의원 △2008∼2010년 국회의장 △현 부산대 석좌교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 △저서 ‘술탄과 황제’(2012년),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2016년)


한국의 민주주의는 세계 몇 위일까?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올해 초 한국 민주주의 지수를 22위라고 발표했다. 미국(20위), 일본(23위)과 비슷하고 자유와 평등의 나라 프랑스(27위)보다 조금 높다. 북한은 조사 대상 167개국 중 꼴찌였다. 그러나 이 리포트를 보고 기뻐하거나 당연하다고 믿는 국민은 얼마나 될까. 왜 우리는 우리의 성취에 자부심을 갖지 못할까. 만족을 모르는 욕심 탓일까, 자기 비하(卑下)가 심해서일까.

바야흐로 4·13총선 정국이다. 너도나도 민주주의를 노래하고 희망의 청사진을 내밀지만 미덥지가 않다. 벌써부터 고질적인 계파싸움, 진영논리, 집단이기주의가 들썩인다. 더구나 앞으로 3년 연속 전국 규모의 선거가 치러진다. 국력을 갉아먹고 국론 분열을 부추길까 걱정이다. 가뜩이나 경제는 어렵고 국제 정세는 긴박하며 북의 위협은 노골적인데 지도자와 국민이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다.

선거는 공정성이 생명이다. 무엇보다 국민의 냉정하고 현명한 선택이 중요하다. 그래야 선거 불복 등 후유증도 최소화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 사즉생의 각오로 공권력을 엄정히 집행해야 선거 망국론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여야 정당과 정치 지도자는 어떤가. 새로 분당한 야당은 양당제에 식상한 국민에게 청량감을 안겨줘야 하는데, 왜 무엇을 위해 창당했는지 분명한 메시지를 못 던지고 있다. 선장이 바뀐 제1 야당은 전권을 쥔 1인 체제를 굳혀가고 있다. 과거 야당과 다른 모습이지만 본질적 변화인지 임시방편인지,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미지수다. 그들만의 편협한 정의(正義)에서 벗어나 전체 국민을 향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

여당은 어부지리, 반사이익을 챙기기는커녕 스스로 표를 까먹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친박(친박근혜)-비박(비박근혜) 진영이 수준 낮은 논쟁을 벌이며 최고회의에서도 얼굴을 붉힌다. 당원 중심의 엉성한 상향식을 국민 공천제라 말하고, 내 편 세우려고 전략 공천을 주장하지만 둘 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테러방지법을 놓고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하며 세계 기록을 세운 국회다. 본질적 문제가 아닌데도 타결 못 짓는 협상력 부족은 어찌하면 개선될까. 선거구가 사라진 사상 초유의 위헌 상태를 두 달 넘게 방치하며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국회는 정치 신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여야 의원들이 의기투합(?)해 늑장 부렸다는 의혹을 피할 수 없다. 그러고도 선거를 연기하자는 참회의 말 한마디 나오지 않으니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것인가.

이번 19대 국회는 다음 20대 국회에 반면교사로 남을 것 같다. 대통령이 일 못 한다며 직접 비난한 유별난 국회다. 삼권 분립 국가에서 이런 노골적 개입은 지나친 면이 있지만, 문제는 대통령의 언급을 속 시원한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여론이다. 국회가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쳤으면…. 이런저런 이유로 여당은 대통령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지도부도 당당히 할 말을 못 한다. 국정의 한몫을 맡은 야당 역시 책임 있는 자세를 못 보여줌으로써 수권 정당, 대안 정당 이미지를 심지 못했다. 여야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여의도가 국정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일에도 실패했다. 

19대 국회를 최악으로 만든 ‘원흉’으로 국회선진화법이 꼽힌다. ‘다수결’ ‘소수자 보호’ ‘대화와 타협’이라는 국회 운영의 3대 원칙 중 다수결 원칙보다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뜻이 이 법에 숨어 있다. 그러나 그 정신이 실종되자 소수 야당 횡포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법 취지가 오용된 결과다. 

국회의원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 기관이다. “국가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하여…양심에 따라”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의원에겐 소속 정당이 있고 정당은 당론이 있다. 당론을 어기면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힘든 구조다. 이러니 당론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투표(cross-vote)가 법에는 있어도 현실에는 없는 것이다. 자유투표가 활성화된다면 선진화법을 고치지 않아도 되련만 그것은 이상론이다. 헌법 기관으로서 자율적 권능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은 대통령제지만 한국 정당은 미국에 비해 막강하다. 당 대표, 최고위원, 사무총장 등 ‘기라성’ 같은 조직이 있고 (물론 미국엔 없다), 사안마다 당론을 정해 국회를 규율한다. 당론 결정도 대체로 밀실에서 몇몇에 의해 이뤄지거나 강경파가 주도한다. 공천권을 갖고 국고 보조금까지 받는다. 무소불위의 권한에 비해 책임은 지지 않는 이런 정당 밑에서 국회는 자율적인 대화와 타협의 장이 되기 어렵다. 정치 불신의 최상층 구조는 여기서 비롯된다. 느리고 둔하고 오만해진 공룡 정당이 빅데이터와 인터넷 혁명 시대에 과연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을까. 국회 위에 군림하는 정당이 국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당론 국회가 아닌 상임위 중심 국회로 바뀌어야 대화와 타협이 이뤄지고 국정의 중심축이 될 수 있다. 정당의 힘을 빼는 혁파 작업이 한국 정치 개혁의 본질적 과제다.

비례대표 제도는 직능 대표성과 전문성을 상실한 지 오래됐다. 이번 선정 과정에서 계파 간 나눠먹기나 잡음을 내는 정당에는 표를 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직선제 개헌 이후 대통령을 여섯 번 선출했다. 평화적 정권 교체가 제도화됐지만 문제는 남아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불일치로 선거를 따로 치러 국력이 낭비되고, 대통령의 레임덕이 빨리 온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무원은 복지부동하며 부처 이익만 챙기려 든다. 더구나 중앙 행정부처가 흩어져 있다 보니 공무원들이 세종시와 여의도를 오가며 시간을 좀먹는다. 사기는 떨어지고 국가 경쟁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정부 수립을 위한 첫 선거가 1948년 5월 10일에 있었다. 2년 임기의 이 제헌 의원들은 1년 중 320일 국회 문을 열었다. 휴일 휴가는 따로 없었고 폭언 폭행 야유 따위는 생각도 못 했다. 불철주야로 일했다. 그렇게 심신을 바쳐 일하고는 불과 15.5%만 국회에 다시 진출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아직도 늦지 않다. 포용과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국민 앞에 다가가라. 그러면 불신의 검은 장막을 걷어내는 신뢰의 정치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높아진 민주주의 지수에 은근한 자부심도 갖는 그런 나라에서 말이다. 

이재명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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