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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헤드라인

<한국핵정책학회 추계학술대회 격려사>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17-09-29 한국핵정책학회 추계학술대회 격려사>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김형오 전 국회의장



친애하는 한국핵정책학회 회장 및 회원, 그리고 내외 귀빈 여러분!

지금 한반도는 북한 핵미사일 위협으로 625 전쟁 이래 최대 안보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 절박한 시기에 한국핵정책학회가 기로에 선 한국, 핵 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마련했습니다. 최고 전문가들의 기탄없는 토론과 진단 그리고 명쾌한 처방을 기대합니다.


    사진제공 : 파이낸셜 타임즈


전문가도 아닌 저는 오늘 아침, 왜 이 자리에 서게 된 걸까요? 먼저 제 이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그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오랜 기간 정치권에 몸 담았고, 대한민국 의전 서열 두 번째인 국회의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 어느 정당, 어느 정파에도 소속돼 있지 않습니다.


20년 남짓한 국회의원 생활 초반 10여 년 동안 저는 과학기술정보통신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정치외교학도였던 저는 왜 전공과는 거리가 먼 이 분야에 종사한 걸까요? 대한민국을 살릴 미래의 먹거리이자 성장 동력은 정보통신과 과학기술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상임위에서 2년 정도 활동하다가 다른 상임위로 옮기는 것이 당시 국회의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관례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줄곧 과학기술 그리고 정보통신 분야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이 분야에 문외한이던 저는 매년 국정감사 우수 위원으로 선정됐고, 몇 가지 자부할 만한 업적도 쌓았습니다.


국회의장 시절, 저는 상임위 경험을 살려 아랍에미리트(UAE)로 날아가 그곳의 실질적 통치자인 모하메드 왕세자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문제를 협의했습니다. 한국의 원자력은 최고의 기술력을 가졌으며, 가장 안전하고 가장 값싸고 가장 빠른 시일 안에 지을 수 있고 지은 후에도 가장 경쟁력 있고 경제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돼 있음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습니다. 모하메드 왕세자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가 그를 만난 후 1년도 안 되어 한국 대통령과 모하메드 왕세자는 아랍에미리트에 한국형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기로 정식 합의했습니다. 석유 부국 UAE가 사막을 옥토로 만들기 위한 장기 비전하에 우리 기술로 만든 원자력발전소의 완전 가동을 이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저는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적어도 한 곳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를 직접 방문해 현장을 익히고 관계자들과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10여 년 전 위도 방폐장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때 저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당시 여당의 실세 정치인들과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정치 생명을 걸고 위도 중저준위 방폐장 설치를 반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환경 보호를 내세운 시민단체는 물론 다수의 군민들도 격렬한 반대 시위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야당 의원인 저도 곤경에 처한 정부를 수수방관하거나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위도 방폐장 설치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 결과 며칠간 제 의원회관 사무실은 마비 상태였고, 저는 감당하기 힘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중저준위 방폐장이 많은 인센티브를 받고 경주에 설치키로 한 것은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저는 위도 방폐장 문제가 불거지기 2년 전쯤 스웨덴의 방폐장을 직접 시찰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 여름철이라 안내자나 저나 모두 반팔 차림으로 가운조차 걸치지 않고 암벽 동굴 속에서 한 시간을 시원하게 보내다 나왔습니다. 동행한 스웨덴 대사와 제 아내 역시 간편복이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쓰다 버린 장갑장화옷가지마스크 등을 압축해 기밀용기에 담아 보관하는 곳이 위험하다 못해 금방 방사능에 오염된다면 우리 부부는 벌써 이 세상에 없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참석자 여러분!

제 고향은 우리나라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가장 밀집한 부산입니다. 집안 어른친척조카친구들이 두루 살고 있습니다. 부산울산경주는 500만 명의 인구 밀집 지역이며, 산업·문화·역사의 중심지입니다.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난다면 큰 문제지만, 지난 40년간 한국의 수많은 원자력 발전소 중 단 한 곳도 방사능 유출 문제로 심각한 사고가 났거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경우는 없습니다. 기차 사고, 비행기 사고, 빌딩 화재도 발생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집니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이자 숙명입니다. 사고가 두렵고 필연적이라면 비행기와 기차도 세워야 하고, 대형 빌딩은 출입을 금지시켜야 합니다. 또 원전의 안전이 문제라면 서해를 공유하고 있는 중국의 원전에 대해 짓지 말라고 강력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와 서해바다를 마주하는 중국은 원전 35기가 가동 중이며, 2030년까지 무려 100기를 더 지어 원전 세계 최강국이 되겠다고 합니다. 이원전은 거의 대부분 한국 서해 바다와 맞닿는 중국연안에 위치합니다. 바람은 언제나 중국 쪽에서 불어오고 조류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한국만 원전을 안 짓는다고 피해가 안 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쌓아올린 원자력 발전 최첨단국 한국의 위상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가당치도 않은 논리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선동과 감정과 허구로 짜인 각본에 놀아나는 대한민국이라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가 힘듭니다. 나라의 미래와 경쟁력과 비전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정책이 이대로 추진된다면 한국의 미래가 얼마나 어둡게 될지, 또 한국의 추락이 어느 나라를 더욱 이롭게 할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자리를 함께 해주신 여러분!

우리는 요즘 정말 불안합니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 우려 때문이 아닙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 때문입니다. 북한 김정은과 미국 트럼프 간의 말 폭탄이 언제 한국으로 방향을 틀지 알 수 없습니다. 양쪽은 핵을 가지고 서로를 겨누는데, 우리는 핵도 없고 비핵화가 기본 정책입니다. 싸우지 말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평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저는 정치외교학을 수십 년간 공부하고 현장에서 정치를 해온 사람입니다. 또 역사를 좋아합니다. 제가 아는 정치학 어디에도 힘없는 나라가 힘센 나라를 끌고 간 경우가 없었으며, 제가 본 역사책 어디에도 힘없는 나라가 자기보다 강한 나라를 침략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전쟁과 싸움은 상대가 만만하고 깨뜨릴 수 있다고 판단할 때 생기는 것이지 지려고 싸우는 경우는 없는 법입니다. 평화가 말로써 지켜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평화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노력과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행복은 자유에 있고, 자유는 용기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2500년 전의 정치인도 자유를 지킬 용기를 시민들에게 요구했습니다. 또 페리클레스보다 조금 앞선,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은 명령에 의해 싸웠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자유를 향유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지불할 용기나 용의가 있는가요? 자유는 공짜로 숨 쉬는 공기 같은 건가요? 아니,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가 지켜주는 것인가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그 반대도 얼마든지 성립하는 냉혹한 국제정치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핵은 보수와 진보의 논리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핵을 스스로 만들든지, 핵을 가진 것과 같은 조건이나 위치를 만들든지, 아니면 상대가 핵을 못 가지게 하고 못 쓰도록 해야 합니다.


원자력 발전소 몇 개 있다고 결코 핵무기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쌓아놓은 원자력 기술마저 무용지물로 만든다면 우리는 원자탄은 물론 그 용도가 무궁무진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대열에서도 낙오될 것입니다. 이는 북한이 원자탄을 만들었다고 해서 더욱 고도의 기술과 노력이 요구되는 원자력 발전소를 제대로 짓거나 운영할 수 없는 이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는 치열한 경쟁시대에 접어 들었는데 우리는 우리의 특장점마저 땅에 파묻어려 합니다.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1000년 제국 비잔티움이 멸망하고 그 자리에 오스만 튀르크가 새로이 융성하는 역사적 사건에 빠져 있었고 이것을 책으로 냈습니다.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과분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분명한 한 가지는, 나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흥할 때는 흥하는 이유가 있고 망할 때는 망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 시점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고 어떤 모습으로 죽어야 하는가를 수없이 되뇌이며 많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다고 역사 앞에 말할 수 있을까!

요즘 참 잠이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