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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글와글 정보마당

유럽에서 맨손으로 기차 세운 사연

2002년, 회사를 퇴직한 누나, 그리고 누나 친구와 함께 3명이 생애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경비는 누나의 쥐꼬리만한 퇴직금으로 충당했는데, 배낭여행이다보니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요.

- 밤기차의 낭만?

쿠셋이라는 침대칸을 이용해서 오스트리아에서 스위스로 야간에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야간에 이동하면 수면시간과 이동시간을 합쳐서 시간을 아낄수 있기 때문이죠.

(당시에는) 야간에 국경을 넘는 경우에는 기차의 차장이 여권티켓을 거둬서 보관하여 국경통과절차를 처리하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돌려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저희는 3명의 여권과 티켓(유레일패스)을 차장아저씨에게 전달하고 단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목적지인 취리히 역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는데, 차장이 여권만 주고 지나갔습니다.
'처리할게 남았나보다' 라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짐을 챙겨 내리면서 차장아저씨에게 밝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이제 유레일 패스도 주세요~"
"응? 줬잖아?"
"아니, 여권밖에 안 줬는데요."
"아까 주지 않았어? 이런! 너희랑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에게 줬나보다!"

얼굴이 창백해지는 차장 아저씨.
우리랑 같이 탔던 사람은 동유럽 출신의 백인 가족들이었는데, 동양인과 백인을 구분 못하나?!

우리는 그때까지도 아저씨가 모두 책임질 거라고 생각하고 기차에서 내려 아저씨를 기다렸어요.
창밖에서 보니 차장 아저씨는 우리가 있던 침대칸을 막 뒤지더라구요.
우리 말을 안 믿는거 같아서 기분이 좀 나쁘기도 했지만, 아저씨가 책임질거라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 어?"

당황한 누나와 누나 친구. 남자는 나 밖에 없는 상황!
이럴 때 비행기 값이라도 해야겠다!


- 밥값을 하자!

전 달리는 기차를 따라 달렸습니다.
마치 헤어지는 연인들이 다시 만나는 영화처럼, 달리는 기차에 매달렸죠.


중학생때 영어신동 소리를 듣던 저는 외쳤습니다.

"H...How....Wh..where...are you going?!"
(번역: "어...어떠....어...어디 가세요?!")

차장 아저씨는 기차에 매달린 저를 보고선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습니다.
그리고 기차 복도의 비상정지 버튼을 눌러서 기차를 세웠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비상벨이 울리고 역무원들이  달려왔습니다. 그 중에 한명이 저한테 소리를 쳤어요.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대충 "이런 장난은 너희 나라에서나 해!" 이런 뜻이었습니다.

전 울컥해서 소리쳤습니다.
"야! 이 )@(*#&%!!" (<- 물론 한국말로 소리쳤습니다. 영어로 하면 알아 들을까봐.)

돌아서서 가던 역무원이 가던 길을 멈추고 제게 성큼성큼 걸어왔습니다.
선로 공사를 하던 중이었는지 손에는 연장도 있었고, 일행도 있었습니다.

"So...sorry..." (번역: "미...미안해...")



- 가재는 게편


어쨌든 일이 좀 커졌습니다. 출발하려던 기차는 멈춰섰고, 저희는 역무원들의 친절한(?) 안내로 역구내의 사무실로 갔습니다.

잠시 후, 차장이 아까의 미안해하던 얼굴은 간데없이 무척이나 화가 난 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섰습니다.
차장은 말을 바꿔서 '아까 분명히 줬다. 얘네가 받고서 없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독일어로 뭐라 이야기를 하는데, 역무원들도 우리가 표를 받고서 잃어버린척 한다는 분위기더라구요. "야! 너가 보관했으면 다시 돌려주는게 너의 일이야! 일 똑바로 못해?!"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기분이 나빠서 "영어로 이야기 하라. 우린 독일어를 할 줄 모른다."라고 이야기 했는데 계속 독어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더니, 차장에겐 잘못이 없다고 차장을 보내주는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한국말로 속된 욕을 쏟아내며 차장을 붙잡았습니다.
대충 "이러고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나쁜 사람." 이런 뜻이었습니다.
차장의 팔을 잡았더니 동양인이라면 무조건 무술의 고수라고 생각해서인지 역무원이 깜짝 놀라 경찰을 불렀습니다. 전 경찰이 올 때까지 차장을 못가게 붙잡았습니다.

1~2분도 안되어 곤봉을 치켜든 6명의 경찰이 달려왔습니다.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저는 "여기예요! 여기!" 라며 마치 내가 부른것 처럼 반가운 표정으로 밝게 웃으며 경찰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재는 게편, 경찰은 차장편.
경찰은 차장을 돌려보내고, 우리의 몸을 수색하더니 짐을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처사에 분통을 터뜨리며, 누나와 누나 친구는 급기야 눈물을 보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전 오기가 생겨서 제 짐을 모두 쏟아서 속옷까지 다 보여줬습니다.

"OK? OK?"
(번역: "나한테 없다고!")

누나는 대사관을 연결해달라고 요청해서 대사관에 전화를 했습니다만,
울먹이며 상황을 요약하는 누나에게 대사관 직원의 첫마디:

"저희가 차비를 드릴수는 없구요..잘 해결해 보세요.."

엥..;; 가재는 게편, 경찰은 차장편, 한국 대사관은 우리편이 아닌 것확실했습니다.
누가 차비를 달라고 했나요. 흥! 우리는 스스로 강해져야만 했습니다.


- Never Give Up!
취리히역의 경찰들도 난감해 했습니다. 하지만 처리할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범인은 차장인데!!!) 
결국 경찰에게 도난신고서(police report)를 발급받아 보험 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기로 했습니다.

유레일 패스가 없으면 여행 일정을 소화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리고 분한 마음에 누나들은 계속 훌쩍거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여행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혹시나 하며 분실물 보관소를 찾았습니다.
거기서 우연히 어느 한국인 관광객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어? 한국분이세요? 왜 울어요?"
자초지종을 들은 아저씨께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에이. 젊은이들이 그렇다고 지금 여행을 접으면 쓰나? 내가 표를 사줄께. 한국가서 갚아요."
(대사관 직원이 빈말이라도 이런 말만 해줬더라면 서럽지나 않았을텐데..)

(Never Give Up! 출처: 여기)

 "네? 아니예요. 도와달라고 말씀드린게 아니예요. 하도 억울하고 분해서."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라구요. 억울하고 분하다고 포기하면 지는거예요."

결국 우리는 기존 일정을 수정하여, 최소한의 경비로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을 다시 짜고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분실물 보관소에서 만난 아저씨께 물질적 도움은 받지 않았지만, 정말 큰 힘을 얻어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답니다.

뱀발 1.
그 후, 이탈리아.
한국인 민박집에 들어갔는데, 먼저 묵고 있던 여행객이 우리에게 '유레일 패스를 잘 간수하라'는 조언을 해줬습니다.
"저도 어떤 사람한테 들었는데요, 한국인들이 유레일 패스를 차장한테 맡겼다가 못 받아서 난리가 났었대요. 그런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어? 저희도 그랬는데!"
알고보니 저희 이야기였습니다...;;;

뱀발 2.

몇 년 뒤에 기회가 되어서 유럽을 한번 더 찾았었는데요, 다시 찾은 유럽에서는 차장 아저씨가 밤기차 침대칸이어도 유레일패스를 걷어가지 않더라구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 그림은 일러스트레이터, 포토샵, 플래시로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