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이자 탤런트인 윤여정은 영화 <여배우들>에 함께 출연한 이미숙, 고현정의 권유로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고 합니다.
40여년 연기 인생에서 예능프로그램 출연은 처음이라고 하니, 그녀로서는 참 흥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편으로는, 드라마에서 자주 보아왔던 윤여정이지만,
배우로서 그녀의 연기 인생은 어떻게 펼쳐져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그 궁금한 부분을 한 번 정리해봤습니다.
연기자로서의 출발
배우 윤여정은 1971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를 통해 처음 데뷔했습니다. 남궁원, 전계현과 함께 이 영화에 출연한 윤여정은 대종상 신인여우상,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속편으로 제작된 <충녀> 역시 흥행에 성공하며 그녀는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죠.
또 윤여정은 영화 <화녀>와 <충녀> 사이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장희빈>에도 출연했었는데, 주인공인 '장희빈' 역을 맡았더군요. '장희빈'은 독한 연기의 상징이자, 매 10년간 비교가 되곤 하는 여배우의 '바로미터'같은 배역인데, 그녀가 이런 배역을 맡았다는 것 역시 흥미롭습니다.
▲ 신혼 당시의 조영남-윤여정 부부 (1974년 8월 23일자 경향신문)
이처럼 그녀가 맡은 역할들은 대체로 여성적이고 다정다감하며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독특하거나 똑부러지거나, 그녀만의 확실한 색깔의 연기가 작품의 성격과 어우러지며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윤여정은 연기 인생 대부분을 평범하지 않은 중장년 아줌마를 연기해온 연기자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녀가 활약한 1970년대 초반, 윤여정은 배우로서의 실력과 시대적인 운도 함께 따랐던 것 같습니다. 당시 기사를 살펴보면 문희의 은퇴, 윤정희의 출연자격정지로 인해 여배우 기근이던 상황에 출연신청이 밀려서 급기야 과로로 쓰러졌던 적도 있었다고 하니까요. <무릎팍도사>에 나온 윤여정의 '70년대 김희선' 발언은 그만큼 당시 그녀의 인기와 위상을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이순재-김혜자의 집안과 윤여정-김세윤의 집안은 대조적이었죠.
결혼과 귀국
1973년에 가수 조영남과 약혼한 뒤 1975년 미국 시카고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됐었죠. 이 당시 윤여정이 남편이 있는 미국으로 갈 무렵, 이민 간다는 헛소문 때문에 미국 가기 직전 문공부(지금으로 치면 문화관광부격)에 가서 6개월 내에 돌아온다는 각서까지 썼다고 합니다. 지금으로써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웃기는 일이었죠.
그녀가 미국으로 가서 남편 뒷바라지를 하던 중, 조영남-윤여정 부부는 1984년에 영구귀국을 선언했죠. 귀국 후 윤여정은 MBC의 베스트셀러극장 <고깔>이라는 작품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컴백 신고를 했습니다.
▲ 최근 김수현-임상수의 갈등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에미>
그리고 화제작 <어미>라는 영화를 찍었죠. 이 작품을 통해 김수현과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췄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김수현 사단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 황기성사단의 창립 작품인 <어미> (혹은 에미)를 통해 연출 박철수 감독, 시나리오 김수현, 여주인공 윤여정의 라인업이 구성되었고, 이들이 뜻을 모아 함께 촬영한 작품 <어미>는 결국 그해 대종상영화제의 작품상을 획득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쓴 김수현은 끝내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박철수 감독이 시나리오 일부를 고쳤다고 해서 보이콧을 한 것이죠. 박감독은 그때를 회고하며 "김수현 작가로부터 똥감독이란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최근에 김수현 작가가 임상수 감독과 마찰을 빚은 바 있는데, 일부 언론에서는 당시의 박철수 감독을 떠올리는 기사를 싣기도 했습니다.
▲ <사랑이 뭐길래>와 더불어 김수현-윤여정의 대표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
그런데 윤여정과 김수현의 인연은 영화 <어미>에서 시작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1972년 청룡영화상에서 첫 대면을 한 뒤, 윤여정이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간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이미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김수현과 윤여정의 이런 개인적 친분관계는, 작품을 통해서도 작가와 핵심인물의 관계로 빈번하게 이어지는데, <사랑이 뭐길래>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KBS의 <첫사랑>과 함께 역대 최고 시청률 1~2위를 기록했던 국민드라마였죠. <목욕탕집 남자들(1995)> 역시 당시로서는 빼놓을 수 없는 화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이 두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1987년 윤여정이 조영남과 이혼한 후, <사랑이 뭐길래(1992)>로 뛰어오르기까지 힘든 길을 걸었습니다. 이혼녀라는 꼬리표와 홀로 양육해야 할 두 아이는 그녀가 평생 짊어져야 할 몫이 됐기 때문이죠.
▲ 친구 같은 엄마로 나온 영화 <꽃 피는 봄이 오면>, 아들 역은 최민식
2000년대와 영화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의 연착륙 이후 윤여정은 여배우로서 안정감을 찾았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출연한 드라마를 살펴보면, <거짓말>에서 친근한 어머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철없는 엄마와 같은 역을 소화했었죠.
그런데 이런 캐릭터들은 영화에서도 살아났습니다. 1990년 <죽어도 좋은 경험> 이후 13년 만에 찍은 영화 <바람난 가족>부터 시작된 영화계 진출은 독특한 캐릭터를 넓혀가는 계기가 됐습니다.
▲ 아들뻘 봉태규와 호흡을 맞췄던 영화 <가루지기>
<바람난 가족>에서는 바람난 시어머니의 캐릭터를 소화했죠. 2004년 영화 <꽃 피는 봄이 오면>에서는 친구 같은 엄마, <그때 그 사람들>은 철없는 엄마 등의 모습으로 등장했죠. 드라마에서 드러났던 중년 여인의 모습을 이어가면서도 그것을 다양하게 구현했습니다.
<우리들의 행복했던 시간>의 수녀 역과 <가루지기>의 할멈 역은 서로 극과 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다작을 했으면서도 새로운 캐릭터가 나온다는 건 그만큼 끼와 노력을 겸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들의 행복했던 시간>에서 여주인공의 고모(수녀) 역을 맡았던 윤여정
글을 마치며
언젠가 어느 노교수께서 은퇴하시기 직전에 "인간이 가장 서러울 때가 언제일 것 같으냐?"라고 제자들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집이 없을 때" 등 다양한 답변들이 나왔는데, 노교수께서는 고개를 저으시며, 정답은 '배고플 때'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일제시대와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온 분의 말씀이어서 더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람의 무언가를 쥐어짜내게끔 하는 것은 결국 '배고픔'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윤여정이 <무릎팍도사>에서 자신을 두고 '생계형 배우'라고 했던 말 역시 이혼 직후의 어려웠던 세월을 의미하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한 때 최고에 올랐던 배우가 기자에게도 잊혀진 위치로 돌아와서 단역으로 섰을 때 격세지감을 느꼈을 겁니다.
윤여정은 당시 겪었던 시련을 <무릎팍도사>를 통해 털어놨습니다. <전원일기> 촬영 도중 김수미가 툭 던진 말 한 마디에 그냥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배우로서 성공한 지금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는 것이죠. 윤여정이란 여인의 생명력과 현명함에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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