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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여권위조범으로 오인받은 사연

2004년 겨울, 친구(남자)와 유럽여행을 떠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독일의 OO에서 성악을 공부하는 친구(여자)와 만나기로 했는데, 배고픈 배낭여행자에게 휴대전화가 있을 리 만무하였고, 친구와 이메일을 통해 'O월 O일에 OO역에서 연락할께~'라고 약속을 한 상태였지요.

▒ 노숙인들과의 따뜻한 시간

오전 7시쯤 약속한 역에 도착했지만, 이른 아침부터 연락하면 실례가 될 것 같아 1~2시간 기다렸다가 연락을 하기로 하고 쉬어갈 곳을 찾았습니다. 추운 겨울이어서 자리를 물색하다 보니 칸막이가 있는 조그만 승객 대기실을 발견했는데...

바람도 막을 수 있고,... 현지 노숙인 분들이 빼곡하게 누워계셔서...;;; 따...따뜻...할 것 같았습니다.

"배낭여행인데 찬밥 더운밥 따지냐, 이런 것도 좋은 경험이다." 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잠들어있는 노숙인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침은 먹어야 하니까 가방의 식빵과 잼을 꺼내 펼쳐놓고, 빵에 잼을 바르고 있는데 어느샌가 초록색 제복의 독일 경찰 두 명이 입구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반팔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영화에 나오는 나쁜 이미지의 덩치 큰 독일 경찰(게슈타포?), 딱 그 모습이었어요.
경찰들은 약간 주저하면서 우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노숙인 틈에서 빵에 잼을 바르는 두 명의 동양인들이 이상해 보이긴 했을 테니까요.

경찰의 등장이 내심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습니다.
쿨한척 노숙인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자다가 깨어난 노숙인들에게 봉변(빵을 뺏긴다든가...ㅋ)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경찰들은 괜히 노숙인들을 살펴보는 척 주변을 서성거리다 머쓱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여권 좀 보여줄래?"

우리는 왜 그걸 인제야 물어보느냐는 듯 여권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의 여권을 보던 경찰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여권의 두께를 비교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지만, 우리는 꿀릴게(?) 없었기 때문에 빵에 잼을 발라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
제 친구는 당시 ROTC 장교임관을 앞둔 상태라 군미필자로 단수여권을 발급받은 상태였고,
저는 병역을 마친 후여서 5년 기한의 복수여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 단수여권? 복수여권?



당연히 제 복수여권은 친구의 단수여권보다 페이지 수가 많았지요.
경찰들은 우리가 가진 여권의 장수가 다르다며 여권을 훼손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짧은 영어로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난 군대를 다녀와서 여권이 5년짜리인데, 얘는 아직 군대를 안 가서 일회용 여권이야. 그래서 페이지가 차이가 나는거야."
"응? 그게 말이 돼?"
"음,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한국 정부가 그렇게 하는걸 어떡해."
"그럴리가 없어. 너도 한국인이고, 너도 한국인인데 여권이 다른건 이해할 수가 없어. 위조 여권이거나 훼손된 여권 같은데?" (<- 그럴듯한 논리. 공감할 뻔 했음.)
"아냐, 아냐. 잘 봐봐. 훼손된 흔적이 없잖아."

경찰들은 종이가 접히는 안쪽 부분을 찬찬히 살피며 여권이 훼손된 흔적을 찾았습니다만 너무나 멀쩡한 여권 때문에 우리는 '여권을 정교하게 위조한 서투른 여권 위조범'이 되어 경찰서까지 가게 됐습니다.


▒ 독일 파출소

경찰서에는 직원들이 막 출근을 시작하고 있었고, 우리는 안쪽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는 경찰서 대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떨리기도 했지만, 잘못이 없으니 곧 처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경찰서 내부의 게시물도 찬찬히 둘러보고,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구텐 모르겐!' 하고 어설픈 인사를 건네며 최대한 쿨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습니다. 셀카도 찍었지요.ㅋ (메모리카드 에러로 다 날림..ㅠ)

게슈타포를 떠오르게 하는 커다란 덩치의 경찰서 직원들은 출근하면서, 우리를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가며 한마디씩 했습니다.

"얘네들 뭐야?"
"어. 한국인들인데 여권 위조범 같아. 한 놈은 군인이었고, 한 놈은 곧 육군장교가 된대."
"뭐? 이런 조그만 애들이 장교가 된다고? 푸하하. 근데 뭐 이리 편하게 있어?"

대충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경찰들은 한국 대사관에 전화하여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마침 설날이어서 한국 대사관도 휴무일이었습니다. (흐헝헝..) 기다리고 있을 친구에게라도 연락해서 유창한 독일어로 설명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이런 비참한 모습으로 도움을 청하기에는...남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겠다!'

쿨한척 있고 싶었지만 초조한 마음으로 하릴없이 대사관의 연락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 무혐의!!!! 석방!!!! 친구보고 두부 사오라 그래!!!!

오전 9시쯤 되어서 대사관 당직직원과 연락이 되었고, 이상 없는 여권임을 확인하고서야 여권을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권을 받아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다가 눈에 들어오는 한 줄의 문구!

"이 여권은 총 48면임 This passport contains 48 numbered pages."

"야, 이거 봐. 여기 이렇게 쓰여 있잖아!"

그러자 나를 더욱 허탈하게 만드는 그 경찰의 말.
"응, 안그래도 너희 대사관에서도 맨 뒷페이지를 확인하라고 해서, 나도 그걸 봤어. 잘 가~!"

'흑흑, 문이나 열어 줘...'

여권의 맨 뒷면에는 해당 여권이 몇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는지 적혀있습니다.
아마도 단수여권, 복수여권 제도 때문에 저처럼 '여권위조범'으로 오해를 받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겠죠?
혹시라도 이런 일을 당하실 땐, 여권 맨 뒷페이지를 보여 주세요..!
(유니폼을 입지 않고 경찰을 사칭하는 사기꾼에게 여권 소매치기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구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