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바일 차트 1위에 오른' 2AM', 유희열의 토이와 인연이 깊은 '김연우'
▲ 가녀린 목소리와 전자음악이 돋보이는 '캐스커', 新여성 발라드 시대를 개척하겠다는 'AB에비뉴'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한 연우와 2AM를 보며 추억에 잠겨봤더니 문득 1990년대 대중음악사가 떠오르더군요.
그들의 인맥을 쫓아 올라가볼까 합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김연우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룹은 '토이'입니다.
그는 토이(유희열)의 객원가수로 참가해서 주옥같은 곡들을 팬들에게 선사했죠. 특히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여전히 아름다운지>가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고음은 안정되어 있고 굳건한 느낌을 주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는 애절한 노래에서 보다 극적인 효과를 높이는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도 유희열과 김연우는 서로 다른 해의 유재하가요제에서 각각 대상, 금상을 차지했던 대중음악인들입니다. 그리고 유희열을 떠올리면 김장훈과 이승환이 생각납니다. 김장훈은 유희열을 본격적으로 대중음악계에 끌어들였고 유희열은 김장훈에게 히트곡 <난 남자다>라는 곡을 선사했죠.
또 유희열은 이승환의 <그대를 모릅니다>라는 노래의 작곡자입니다. 이승환은 유희열을 비롯한 여러 가수들에게서 곡을 받았는데, 오태호, 김광진, 김동률, 정석원, 김현철 등이 떠오르는군요. 이승환으로 연결되는 유희열과 김동률은 친분이 있어서 서로의 콘서트에 찾아가기도 한다지요.
김광진의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은 김장훈, 이승환, 이소라 등이 참여해서 불렀죠. 이소라는 본격적으로 알린 <그대 안의 블루>를 통해서는 김현철과의 교집합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김연우(객원가수)-유희열(그룹) 객원가수체제의 선배격인 공일오비는 윤종신-정석원의 라인을 탄생시켰는데, 공일오비는 토이 이상으로 객원가수를 많이 쓰기도 했었죠. 윤종신의 가수 초기에는 정석원(공일오비), 후기로 갈수록 유희열의 곡을 많이 불렀습니다.
또 공일오비와 무한궤도의 인연 속에서 신해철이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신해철은 초창기 김동률의 앨범 작업에도 많은 도움을 줬고, 초창기 공일오비 앨범에 객원가수로 나오기도 했었습니다.
여기서 과거 E.O.S의 김형중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의 앨범들 가운데에는 신해철이 프로듀싱한 적도 있고 윤상의 영향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4집의 경우에는 유희열의 도움을 받았죠. 윤상과 신해철은 <노땐스>라는 테크노 앨범을 공동작업하기도 했습니다.
김동률과 이적은 <거위의 꿈>으로 유명한 '카니발'이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낸 적이 있는데, 이적은 김진표와 한 그룹이었고, 김진표는 신해철이 빠진 넥스트 맴버와 결합하여 노바소닉을 결성했죠.
그런데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각기 교류하고 있었지만, 음악적인 스타일이나 취향은 전체적으로 한 덩어리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 가운데 '대영기획'이란 회사도 떠오르는군요. 위에 언급했던 가수들은 엘리트 느낌을 주는 발라드 주력의 가수들 혹은 자기 색이 분명한 라이브 무대의 실력파로 특징지어지는 편입니다.
이번에는 2AM을 통해 1990년대를 떠올려볼까요?
일단 2AM하면 JYP를 빼놓을 수 없겠죠. 원더걸스, 2AM, 2PM과 같은 인기그룹들은 박진영과 함께 하고 있는 가족들이죠.
그런데 JYP를 떠올리면 빼놓을 수 없는 가수들이 있습니다. 바로 김건모, 클론, 박미경이죠. 박진영은 무명일 때 김건모의 백댄서로 활동을 했었죠. 박미경은 긴 무명생활 끝에 김창환 사단을 만나면서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높이면서 <이브의 경고>를 통해 전성기를 누렸는데, 개인적으로는 박진영과 호흡이 잘 맞는다고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클론 역시 김건모의 백댄서 출신이었죠. 그런데 박진영, 박미경과 클론의 강원래가 1992년쯤 아주 잠시 그룹을 조직해서 활동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던 사실 중 하나죠. 다만 그들은 성과가 좋지 않아 그룹 활동을 그만둬야 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모두 품었던 사람은 김창환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가수들 뿐만 아니라 신승훈, 엄정화, 노이즈, 홍경민도 김창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가수들이죠. '김창환 사단'이란 말이 탄생한 것도 그가 발굴하거나 곡을 써준 가수들이 대거 히트를 치며 유명세를 탔기 때문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은 김창환 그리고 김창환 사단이죠.
대체로 전자 인맥들에 비해서 신승훈, 홍경민 정도를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흑인음악풍의 가수들 혹은 댄스가수들이 보다 눈에 많이 띄는 것 같군요.
(김창환은 '산울림'의 김창완과 다른 사람이죠.)
제가 즉석에서 나눠본 이 두 인맥들의 공통점은 그 구성원들의 상당수가 싱어송라이터들이었다는 겁니다. 설령 곡을 많이 쓰지 않거나 노래만 부르는 가수일 지라도 각기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죠. 이들이 폭넓고 복잡한 교분이 형성되었던 이유는 각자의 개인적 친분 이상의 음악적 역량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990년대가 한국대중음악의 르네상스시대였던 이유도 이런 교류와 선의의 경쟁 덕택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당시 가수들은 지금 가수들에 비해 보다 뚜렷한 개성을 살린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일정한 인기를 구축했던 가수들은 방송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아도 음반판매를 통해 최소한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죠. 팬들도 음반을 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구요. 저도 소장하고 있는 수백장의 음반은 소중한 보물들입니다.
요즈음 가요판에서 '댄스음악 + 아이돌 스타'로의 편중이 심화되면서 1990년대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많은 싱어송라이터들이 대중음악을 주름잡았기 때문에 서로 곡을 주고 받고 프로듀싱도 같이 하는 등의 음악적 교류를 넓혀나갔던 것이죠. 그 속에서 발전이 있었구요.
현재 대부분 10대 후반 ~ 20대 초중반의 연령대의 가수들은 기획사가 짜놓은대로 활동하고 성장하다 보니 음악적(작사, 작곡, 편곡, 노래) 독창성이 떨어져 보입니다. 때로는 '댄서에 음악적인 부분을 이식한 것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음악이 과거의 것에 비해 마냥 뒤쳐졌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자기 색깔이 뚜렷한 뮤지션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보다 많이 제공되었으면 하는 거죠.
언젠가 대선배 가수인 최백호씨는 자신이 DJ로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를 통해 "요즈음 가수들은 좋은 시스템에서 배우고 있어서 가창력은 연습이 잘 되어 있지만, 가수로서 자기 호흡, 자기 색깔이 부족해서 안타깝다."라고 이야기한 적 있는데 저 역시 공감합니다.
"그 사람이 아니면 그 노래의 맛이 안 난다"라고 할 만한 가수들,
"정말 오랫 동안 사랑받을 노래다!"라고 느껴질 노래가 많지 않아 섭섭한 요즈음입니다.
(요즈음에도 좋은 노래들이 나오긴 하지만 쉽게 질린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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