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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오가 만난 세상

‘애니깽’,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름

국정감사 여적(餘滴)=길 위에서의 이삭줍기
‘애니깽’,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름 

 

※읽기 전에 잠깐!
  ‘여적(餘滴)’이란 ‘글을 다 쓰거나 그림을 다 그리고 난 뒤에 남은 먹물’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칼럼은 얼마 전 막을 내린 국정감사, 그 뒷이야기쯤으로 해석해도 무방하겠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국감 얘기를 쓰려는 건 아닙니다. ‘길 위에서의 이삭줍기’란 표현에서 보듯이, 외교통상통일위원회(외통위) 소속 의원으로서 남미(멕시코·콜롬비아·페루)로 출장을 갔던 길에 짬짬이 만난 의미 있는 여정을 네티즌들과 공유하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내 아이폰이 카메라와 녹음기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그래서 사진 상태가 썩 좋지 않음을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일부는 자료 사진입니다.)


  1905년 4월 4일 일본의 인력 송출 회사가 모집한 한인 1033명이 영국 상선에 몸을 싣고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 5월 16일 멕시코 유카탄 주의 중심 도시인 메리다 시에 도착합니다. 이로부터 저 잔혹한 멕시코 이민 1세대, ‘애니깽’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멕시칸 드림이 멕시칸 악몽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 같은 제목으로 만들어진 애니깽 소재 연극(왼쪽)과 영화(오른쪽)포스터. 1997년 개봉한 <애니깽>(김호선 감독, 장미희·임성민 주연)은 제작 기간 3년, 제작비 30억 원, 출연진 1만 여 명이 동원된 대작으로 34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연극과 뮤지컬(원작 김상렬)로도 만들어져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김선영의 3부작 대하소설『애니깽』, 김영하의 장편소설 『검은 꽃』도 애니깽을 소재로 하고 있다.

  지난 10월 10일, 메리다 시에 도착한 우리 팀은 한인 후손들의 증언과 이민사 박물관의 전시물들을 통해 멕시코 이민 1세대 선조들의 슬프고도 감동적인 삶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진들을 고르고 녹음을 듣고 관련 자료를 찾으면서 나는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5년 전 일입니다. 1905년은 나라의 운명이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혼미하고 위태로울 때였습니다. 가난에 찌든 농민과 도시 노동자, 그리고 변화를 갈망하던 이들에게 조국은 더 이상 희망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과 영국인 브로커의 감언이설에 속아 한 조각 희망을 움켜쥐고 정든 고향을 등지게 됩니다.  



▲ MBC에서 멕시코 이민 100주년을 맞아 제작한 다큐멘터리 속에 비친 에네켄 농장. 100여 년 전 출신성분이 각양각색인 한인들은 노예 사냥꾼들의 사탕발림에 속아 지구 반대편으로 망망대해를 건너왔다. 저 무성한 에네켄 잎들은 그들의 애환을 기억하고 있을까. 

애니깽은 스페인어 ‘에네켄(Henequén)’의 한국식 발음 언어. 당시 메리다 지역 경제의 중심을 차지했던 에네켄은 *용설란(龍舌蘭)의 일종으로 이민자들은 모두 이 에네켄 잎을 잘라 모아 다발로 묶은 뒤 가공 공장으로 옮기는 일(펭카)에 투입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음이 ‘애니깽’으로 변하고 그 의미가 확장돼 나중에는 22개 에네켄 농장에 분산 배치되어 노예처럼 일하던 이민자들과 그들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키가 2미터에 이르고 줄기와 가시가 억센 열대 선인장. 잎 모양이 용의 혀(龍舌) 같다 해서 우리말 이름은 용설란(龍舌蘭)이다. 초록색 이파리에 강도와 끈기가 강한 섬유질이 함유돼 있어 롤러로 으깬 후 펄프를 긁어내어 굵고 질긴 선박용 로프를 만드는 데 주로 쓰인다. 20세기 초에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해운업이 호황을 누려 특히 수요가 급증했다. 온대 지방에선 관상용으로 키우지만 꽃을 보기가 쉽지 않다. 1백년 만에 꽃이 핀다 해서 ‘세기의 식물(Century Plant)’이란 별칭을 갖고 있는데, 꽃을 피우고 나면 곧 죽는다고 한다.





▲ 2005년 메리다 시내 중심부에 세워진 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탑. 메리다 시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동네의 컨벤션 센터 앞에 조성되었다. 재외동포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인회 목사가 디자인했다. 그래서인지 세련된 맛이 덜하다. 탑 맨 꼭대기에는 양옆으로 에네켄 이파리를 뜻하는 상징물이 솟아 있다. 중앙에 있는 자석 모양 조형물은 유나이티드(United), 즉 연합·단합을 상징한다. 탑을 받치고 있는 5층 계단식 석조물은 원래 3단으로 설계되었지만 준비한 석재가 남은 데다가 좀 더 튼튼하고 위엄 있게 보이려고 2층을 더 높여 지었다고 한다. 기념탑 앞에서 찍은 인물 사진은 왼쪽부터 올센 부회장, 나(김형오), 울리세스 박 회장이다. 한인 후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메리다에는 한-멕 우정병원도 지어져 있다. 

 배에서 내리는 순간,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멀리 두고 온 가족들과는 연락이 두절되었고, 고국으로 돌아갈 길은 영원히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부초(浮草)와 같은 유랑 난민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허위 광고와 사기 계약에 의한 불법 이민의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들은 *까레이스키와는 또 다른 형태의 유민이었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살고 있는 한국인 교포(고려인, 高麗人)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1937년에서 39년 사이 스탈린은 일본과 밀약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배후지)를 말살시키려고 17만 명이 넘는 우리 동포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굴의 의지와 강인한 생명력으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집단 농장을 경영해  소련 내 소수 민족 가운데서 가장 잘사는 민족으로 뿌리를 내렸다.


  애니깽들은 당나귀보다도 더 처량한 신세였습니다. 온종일 뙤약볕 아래서 가시에 찔려가며 *중노동을 했습니다. 하루 1만 개의 할당량을 못 채우면 채찍이 사정없이 온몸을 훑었습니다. 독기를 가득 품은 방울뱀들도 발밑에서 이들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산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905년 중국인 허후이(河惠)의 편지가 황성신문에 실리면서 한인들의 비참한 처지가 고국에 알려졌다. 그는 “이곳 토인이 지구상 5, 6등 노예란 소리를 듣는데 한인은 그 밑의 7등 노예가 되어 영원히 우마(牛馬)와 같다”고 그 참상을 전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 황제는 눈물지으며 동포들을 빨리 송환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미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뒤라서 외부협판 윤치호의 멕시코행도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약속된 임금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헐값으로 살인적인 노동과 착취에 시달리면서 값싼 술로 고통과 시름을 달래려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메리다 시에 ‘제물포 거리’(아래 사진 설명 참고)가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지상 낙원 멕시코에 가면 일당 1원30전에서 3원까지 보장한다고 황성신문에 모집 광고를 냈지만 실제로는 하루 35전밖에 주지 않았다. 그나마 하루 식대 20전을 떼고 지급했다.

 

▲ 메리다 시의 중심부인 산티아고 광장 앞에 위치한 이 ‘제물포(인천) 거리’는 가슴 뭉클한 탄생 배경을 갖고 있다. 에네켄 농장의 한인 광부가 이 동네 한 바에서 술만 마시면 곧잘 “제물포, 제물포, 제물포!”를 외쳐댔고, 그러면 주위 사람들도 같이 외치곤 했다. 바의 주인은 왜 그리 구슬프게 ‘제물포’를 연호하는지 까닭을 물었고, 그 절박한 외침이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로 시작되는 흑인 영가(한 늙은 흑인 노예가 고향 버지니아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은 미국 가곡)의 사연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감동한 주인은 주점 상호를 ‘제물포’로 바꾸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일대 거리 이름도 아예 ‘제물포 거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왼쪽 건물이 바로 ‘제물포’ 술집. 현재는 정부 소유 전당포(멕시코 전당포들은 모두 국영이란다)로 운영되고 있다.
 

  1909년, 4년간의 ‘노예 계약’이 끝나 권리를 찾으려 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돼 갔습니다. 이듬해 한일합병이 되자 이들은 국적마저, 돌아갈 조국마저 상실해 버렸습니다. 무능하고 무력한 식민지 조선에 의해 이들은 역사에서조차 버려지고 지워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쿠바로 재이민을 갔습니다. 물론 그 모든 비극의 이면에는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막으려는 일제의 교묘한 음모와 야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민 비자에도 한인들의 출생지는 조선인데, 국적은 일본으로 표기돼 있었습니다. 일본 외무성 비밀문서를 통해 이미 확인된 사실입니다.)

 



▲ 제물포 거리에 붙어 있는 현판. 2007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에서 설치했다고 새겨져 있다.(왼쪽 사진) 이민사 박물관 벽에 걸려 있는 낡고 얼룩진 태극기. 그 옆에 나란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오른쪽 사진) 

  그러나 멕시코 100여 년 이민사는 좌절과 절망의 역사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도전과 개척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현장에서 한국 근현대 이민사의 깊은 수렁을 벗어나 건강하게 움트고 있는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멕시코 전역에서 에네켄처럼 굳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3만 명의 한인 후손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이들은 각계각층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계·법조계·학계·의료계·예술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리더로 떠오르거나 성공 신화를 써나가는 주인공들도 있습니다.  



▲ 1905년 4월 4일, 한인 1033명을 태운 영국 상선 ‘일포드(ILFORD)’호가 뱃고동을 울리며 제물포항을 떠났다.(위 사진) 배에 탄 사람들은 나름대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배와 기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며 40여 일간의 고된 여정(우리는 비행기로 가는데도 20시간 가까이 걸렸다) 끝에 도착한 지구 건너편, 낯선 대륙에서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아래 사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탕수수밭의 꿈은 순식간에 가시밭 현실로 바뀌어 있었다. 한 사람 당 에네켄 잎 1만 장을 채취해야 그날 하루 작업이 끝났다.

   현재 6세대까지 내려온 한인의 후손들은 멕시코 전역에 3만 명 남짓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메리다가 5000명으로 가장 많고, 멕시코시티 2000명, 티후아나 1500명 순입니다. 이들은 6개 지역 별로 한인 후손회를 결성하고 있습니다. 유카탄 주 인구 200만 중 100만 명이 메리다에 거주하는 걸 감안하면, 메리다 지역에는 주민 200명 중 한 명 꼴로 한인 후손들이 살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후손 숫자는 센서스에 의한 것이 아닌 추정치입니다. 그만큼 살기가 각박했다는 반증이지만, 정확한 통계는 또한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나는 메리다 시에 머무는 동안 거리 곳곳에서 저 사람 혹시 한인 후손이 아닐까 싶은 얼굴들을 심심찮게 만났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친근감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 농장 관리인들은 말을 타고 다니며 게으름을 피우거나 일손이 더딘 노동자들을 보면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방울뱀에 물려 죽은 한인들도 많았다. 4년만 일하면 큰돈을 벌어 금의환향할 수 있다던 이들의 꿈은 허물어져 내린 지 오래였다. 

  국적도 모두 멕시코고 모국어를 잊은 후손들이 거의 다지만, 그래도 ‘아버지·어머니·할머니·할아버지’ 등의 호칭과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한국어로 할 줄 알았습니다. <아리랑>이나 <애국가>를 부를 줄 아는 후손들도 드물지 않다더군요. 5세대, 6세대를 내려왔지만 한국인의 모습만큼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이민 1세대 중에 여자는 2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아 현지 원주민 여성들과의 결혼이 잦다 보니 혼혈도 급속히 진행되었습니다.

 

▲ 1905년 5월 멕시코 도착 직후에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위). 짚신과 한복 차림이 눈길을 끈다. 멕시코 이민사 100여 년을 통틀어 가장 오래 된 한인 1세대들의 기념사진이다. 앳된 소년의 모습까지도 보인다.
반면에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아래 사진은 위 사진보다는 좀 더 세월이 흐른 뒤인 것 같다. 남녀 아이들 옷차림이 비슷하면서도 단정한 걸로 보아 한글학교 교사들과 찍은 기념사진 같기도 하다. 위 사진과 아래 사진에는 아마도 동일 인물이 있겠지만 내 눈썰미로는 찾기 어려웠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샘솟는 사진들이다.
내가 아이폰에 담아온 이 사진들은 모두 한인 후손들이 가보처럼 간직해 오다가 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들이다.

  그날 메리다 시의 심장부에 있는 이민사 박물관에서 무엇보다도 나를 감동시킨 것은 한인 1세대들의 독립운동, 그 흔적들입니다. 설명을 해준 박물관장 *제니 장 씨도 이 대목을 얘기할 때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열정에 차 있었습니다. 애니깽이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숭고한 이름인 것은 그런 숨은 역사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1세대, 2세대 애니깽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 국민회와 연결고리를 갖고 주권을 상실한 조국의 독립운동 비자금을 대는가 하면, 광복 후에도 조국의 불우한 동포들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한글학교를 세워 후손들에게 모국어와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려고 애썼습니다. 그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말입니다.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오래 된 우리말 책들이 나의 감동을 증폭시켰습니다.

*Genny Chans Song. 이민 1백주년을 기념해 2005년에 문을 연 이민사 박물관의 관장인 그녀는 한인 후손이다.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로 열강하듯 설명을 해주었는데 간간이 한국어(낱말 수준)를 섞어 썼다. 마이 아버지 정, 마이 어머니 송, 마이 할아버지, 마이 딸 식으로 가족 관계를 얘기할 때는 특히 그랬다. 이들은 이름 뒤에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쓴다. 조상이 고씨 성이면 코로라, 최씨 성이면 산체스로 쓰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제니 정 관장은 변호사인 아들 명함 뒤에 자기 이름과 주소를 적어 주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그녀가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순백으로 빛나고 있는 추억들. 나비넥타이를 맨 다섯 명의 청년은 예쁜 드레스 차림의 아가씨들과 합동 결혼식(약혼식?)을 올리고 있는 걸까? 화동을 들러리 세운 결혼식과 아마도 목사가 주례를 선 듯한 예식 장면도 보인다. 3대 아홉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 찍은 듯한 가족 사진은 단란하고 행복한 모습이다. 이때만 해도 한국인들끼리의 결혼이 드물지 않았었나 보다. 

  한 순간 케네디 대통령의 명언이 내 머리를 스쳤습니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라.” 

  멕시코 이민 1세대들은 국가로부터 혜택이나 도움은커녕 냉혹하게 버림받은 존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조국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했고 또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 내 심금을 울린 초창기 이민자들의 나라 사랑 증표들. 발행일자가 1918년 12월 5일로 되어 있는 신한민보(1909년 2월 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민 단체가 창간한 대한인 국민회의 기관지) 호외.(위 왼쪽) 대한인 국민회 입회 증서.(위 오른쪽) 대한인 국민회 총회에 낸 의무금 증서.(아래 왼쪽) 1946년 고국의 헐벗고 굶주린 동포 난민을 구제하자며 모은 성금 장부.(아래 오른쪽) 

  그런 그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민주국가와 국민은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재외 교포들도 우리 국민들입니다. 앞으로는 투표권도 갖게 됩니다. 나는 재외 국민들이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만큼 대한민국도 재외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 이민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한국의 전통 각시 인형들. 화사한 한복 차림에 부채춤을 추고 있다.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교민들은 모두 소중한 우리 국민, 우리 핏줄들입니다. 과거를 토대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열어 나가야 합니다. 앞으로 더욱 활발한 인적·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도록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서 역할을 다하자고 다짐하며 나는 메리다 시를 떠났습니다.

  멕시코 대사관 국감을 통하여 우리는 한인 후손들 문제에 대해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째, 한인 이민 1백주년 기념탑이 너무 초라하다는 겁니다. 이 기념탑과 더불어 한인 이민사 박물관에도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3만여 한인 후손들은 우리에게도 소중한 인적 자원입니다. 이들을 할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과 좀 더 가까워지게 해야 합니다. 그 방안으로 이들에게 한글 교육과 직업 교육을 시키는 프로그램을 정부나 민간 차원에서 만들면 어떨까요. 그리하여 교육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다면 국력도 그만큼 신장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여러분 의견은 어떻습니까.



P.S. 한인회장 울리세스 박과 부회장 올센(어머니 성이 이씨인 이 두 분은 친척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민사 박물관 관장인 제니 장씨가 끝까지 동행하며 친절한 안내와 열정에 찬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 분들이 안내한 현지 음식점에서 우리는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리고는 조그만 선물로 성의 표시를 했을 뿐인데도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블로그를 통해 특별히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