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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오가 만난 세상

꼬라오 마을에 ‘희망꽃’ 피운 꼬레아의 우정

국정감사 여적(餘滴)=길 위에서의 이삭줍기②
꼬라오 마을에 ‘희망꽃’ 피운 꼬레아의 우정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페루의 쿠스코(Cusco) 외곽에는 꼬라오(Ccorao)라는 이름의 작은 시골 마을이 있습니다. 해발 3700미터 높이에 있는 원주민 마을입니다. 꼬라오, 왠지 정겹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쩌면 꼬레아(Corea, 한국)와 발음이 비슷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발음을 떠나 이 마을은 실제로 우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6년 전부터 봉사단원을 파견해 희망의 씨앗을 심고, 또 꽃을 피워가고 있는 마을이니까요.


▲ 꼬라오 도자기 학교 입구에 세워진 입간판. 맨 위에 큰 글씨로 ‘비엔베니도스(Bienvenidos)’라고 써 놓았다. 우리말로 “환영합니다”라는 뜻이다. KOICA 앞치마를 두르고 도예 작업 중인 한국 여성, 페루 국기와 나란히 걸린 태극기 그림이 눈길을 끈다.

▲ 손에 손에 태극기와 페루 국기를 든 어린이들이 마을 어귀까지 마중을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반기듯이 스스럼없이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체온이란 따뜻한 것이다.


▲ 어른들도 참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성긴 이빨을 그대로 드러낸 채 해맑은 웃음으로 반겨 맞아 주었다. 옷은 비록 남루해도 태극기는 눈부시게 깨끗하다. 의료 지원 및 봉사를 좀 더 강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0월 17일, 우리 팀은 바쁜 일정을 쪼개어 꼬라오 마을을 공식 방문했습니다. 무상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주는 나라가 된 대한민국이 국제 사회에서 G20 국가에 걸맞은 기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꼬라오 마을은 우리의 원조 사업으로 현지 주민들 삶의 질이 높아진 대표적인 성공 모델입니다.

▲ 산세바스티안 시의 훌리안 로카 시장이 조끼 비슷하게 생긴 원주민들의 전통 의상을 내게 입혀 주었다. 기온이 낮아 조금 쌀쌀한 느낌이었는데 잘됐구나 싶었다. 행사 내내 그리고 페루를 떠날 때까지 나는 이 조끼를 입고 다녔다.


▲ 98%의 호기심에 2%의 경계심이 담긴 눈빛으로 우리 일행을 바라보는 두 여자 어린이. 아마도 자매인 듯싶다. 그 뒤로는 우리가 선물로 가져온 쌀 포대가 쌓여 있다. 흑백으로 찍었더라면 50~60년대 우리의 시골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페루는 우리에게 중남미 지역 제1의 지원 대상국이면서 또한 전 세계적으로 봉사단을 가장 많이 파견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최근 3년간 연평균 지원 규모는 약 861만 달러. 중점 지원 분야는 교육 및 보건 의료, 인적 자원 개발 등입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대외 원조(지원)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한참 부족합니다. 이웃 나라 일본과 비교해도 너무 미미해 수치로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일본과 우리의 GDP 차이가 6배라면, 대외 원조 규모는 다시 그 1/10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 중절모를 쓴 할머니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나는 머리에 원주민들이 준 전통 모자인 ‘츠요’를 쓰고 있다. 원래는 귀가 살짝 덮이도록 좀 더 내려 써야 하는 모자란다. 할머니는 무릎 위에 아기를 안 듯 쌀 포대를 안고 있다.


▲ 오늘은 꼬라오 마을의 잔칫날이나 마찬가지다.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보려고 몰려나왔다. 주민들 입가에선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그만큼 우리 한국의 봉사단원들이 순수함과 진정성으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리라.


  KOICA(이사장 박대원)는 옛 잉카 문명의 중심지로서 약 3천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꼬라오에 2004년 처음 도자기 학교를 세웠습니다. 잉카 전통 자기에 한국식 유약 바르는 법을 가르쳤는가 하면, 판로를 개척하고 마케팅 기법도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꼬라오 마을은 관광객 수가 늘어나고 도자기 매출액이 껑충 뛰어올라 주민들의 소득 또한 증대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비바 꼬레아”를 연호해가며 그렇게나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친근하게 대해 주었나 봅니다.

▲ 고산 지대라서 걸음도 천천히 걷고 힘쓰는 일은 하지 말라 했는데 하도 많이 아이들을 안아 주다 보니 나중엔 숨이 가쁘고 팔이 저릿저릿했다. 그래도 마음은 뿌듯했다. 유년기로 돌아가 어릴 적의 나를 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 교복인 걸까? 대부분의 아이들이 빨간 티를 입고 환영을 나왔다. 붉은 악마 악동을 연상시키지만 붉은색은 페루의 국기 색이고 국민 색이다. 뒷줄 왼쪽부터 김영우 의원, 외통위 전홍조 국장, 한병길 페루 대사, 황진하 의원, 훌리안 로카 시장, 나 김형오, 에스테반 꼬라오 마을 대표, 최병국 의원.


  KOICA는 현재 내년에 완공할 계획으로 100만 달러의 예산을 지원해 꼬라오 마을에 감자가루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도자기 전시장과 마을회관도 확충할 예정입니다.

▲ 선물로 쌀 140포대를 준비해 와 꼬라오 마을 대표인 에스테반 씨에게 전달했다. 130여 가구가 한 포대씩 나누어 가질 분량이다. 문득 한국전쟁 직후 미군이 나누어 주던 옥수수가루 포대를 받으려고 번호표를 손에 든 채 교회 앞마당에 줄을 서 기다리던 우리 동네 어른들 모습이 오버랩 되어 떠올랐다.


▲ 우리도 답례로 꼬라오 마을 주민들이 준비한 선물을 받았다. 손에 들고 있는 선물들이 각양각색이다. 왼쪽부터 장봉순 코이카 소장, 김영우 의원, 황진하 의원, 나, 훌리안 로카 시장, 최병국 의원, 한병길 페루 대사.


  나는 이 마을에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천사 같은 두 여성을 만났습니다. 권은주씨와 김아람씨. KOICA 단원인 그녀들은 미혼으로서 1년 남짓 꼬라오에 머물며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 도자기 학교 마당에서. 내 어깨 너머로 잉카의 도예가가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고 있는 모습을 담은 조각상이 보인다.


▲ 잉카 전통 스타일의 도자기에 유약을 바른 완성품을 감상하고 있다. 왼쪽부터 코이카 봉사단원 권은주씨, 황진하 의원, 최병국 의원, 나.


▲ 서울에서 가져온 특별선물을 꼬라오 마을의 두 한국인 천사에게 전달하고 있다. 뭘까요? 힌트! 내 이름 석 자 중에서 한 글자와 똑같은 음식이다. 왼쪽부터 장봉순 코이카 소장, 한병길 페루 대사, 최병국 의원, 권은주씨, 나, 김아람씨, 황진하 의원, 김영우 의원.


  그 일이 얼마나 힘겨울는지 경험해 본 나는 잘 압니다. 왜냐면 꼬라오는 해발 3500~3700미터를 넘나드는 고산 지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이 해발 2744미터입니다. 백두산보다도 1000미터나 더 높은 곳, 웬만한 식물은 서식조차 할 수 없는 까마득한 고지대에서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가난한 산골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고 있는 아담한 체구의 앳된 두 여성….
  게다가 환경은 얼마나 열악한지요. 목욕은 거의 하지 않고, 옷도 한번 입으면 해질 때까지 갈아입지 않는다는 원주민 마을입니다. 그래서 그녀들이 더욱 더 대견하고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 꼬라오 마을의 전통 공예품이나 의복·장신구·도자기 등을 파는 가게. 우리가 머문 한 시간 반 동안 관광버스가 8~9대는 올 정도로 홍보가 잘 돼 있었다. 도자기 전시 판매장은 이 사진 왼쪽에 있다.


▲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를 한 채 헤어지기 전에 찰칵! 뒤에 있는 버스는 관광객들이 타고 온 것이다. 우리는 마을 입구에 차를 주차시키고 걸어서 왔다. 이미 앞 사진들에 나온 인물들이라서 개별적인 소개는 생략한다. 다만 오른쪽에서 세 번째, 가방을 허리 아래로 내려뜨린 이 미모의 여성은 누구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시는 분 연락 바람.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힘이고 가능성입니다. 나는 그 연약해 보이는, 그러나 누구보다도 강인한 그녀들에게서 내 조국의 눈부신 미래상을 보았습니다. 21세기를 선도해 나갈 젊은이들의 맑은 열정과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국정감사로 떠난 출장길에서 만난 그녀들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마을에 머무는 동안 열 번도 넘게 외쳤던 구호를 다시 한 번 외쳐봅니다. “비바, 페루! 비바, 꼬레아!, 비바, 꼬라오!”

▲ 작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로가 아쉬워하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파이팅을 외쳤다.

  사실 여기 오기 전날 밤부터 우리는 고산병 예방약도 먹고, 주의를 단단히 들었습니다. 절대로 뛰지 말 것, 무거운 것 들지 말 것, 어지럽거나 구토가 나면 곧바로 연락할 것…. 그러나 원주민들의 뜨거운 환영과 따뜻한 환대 덕분인지 우리는 전날의 주의 사항도, 여기가 백두산보다 1000미터나 높은 곳이란 사실도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마치 그들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혹은 지리산 계곡 같은 곳에서 반갑게 만난 지인처럼 금세 친해져 격의 없이 어울렸습니다.


▲ 노란 손수건 대신 태극 깃발과 페루 깃발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어떤 할머니들은 우리를 만나 너무 기쁘다며 눈물을 흘렸었다. 헤어질 때도 마찬가지, 사진에는 안 나오지만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는 할머니들이 더러 있었다.

  그래서일까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작별하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면 원주민들은 어김없이 그 자리에 서서 계속 깃발을 흔들며 함박웃음으로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 차례의 재촉 끝에 우리는 손을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한 뒤 타고 온 버스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런 우리 뒤를 원주민들의 눈길과 마음이 아주 멀리까지 따라 나왔습니다. 이 모두가 KOICA의 두 천사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