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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Story/어제 그리고 오늘(과거와 현재의 일상 이야기)

앨범 속에서 어머니를 만나다

앨범 속에서 어머니를 만나다

김형오(국회의원, 18대 전반기 국회의장)

소설가 최인호씨가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란 제목의 책을 썼지요?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은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자식들 가슴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얼굴, 지워지지 않는 목소리로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 계십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지 않습니까.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희생과 거룩한 사랑의 표상입니다.


내 어머니, 당신이야말로 그런 분이셨지요. 저는 오늘 앨범 속에서 어머니, 당신을 만났습니다. 빛바랜 사진첩을 들추다가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사진첩은 이야기첩의 다른 이름입니다. 일기장을 펼친 듯 추억을 새록새록 끄집어내 줍니다. 타임머신에 태워 과거로 데려가 줍니다. 어떤 사진은 오래 전에 해둔 메모처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또 어떤 사진은 어제 일처럼 너무나 생생합니다. 눈길을 뗄 수 없게 하고, 마음을 붙잡아 쉽사리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게 하는 사진들도 여럿입니다. 일제 강점기 할아버지께서 우리 고향 고성의 남산에 올라 벗님들과 찍은 사진, 해방될 때까지 만주에서 활동하셨던 아버지가 젊은 시절 동료들과 백두산을 등정하며 천지를 배경으로 찍은 늠름한 사진, 이목구비가 또렷해 왠지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색동 한복을 입고 찍은 제 돌 사진, 집사람과 데이트하며 찍은 사진, 양가 어른들과 함께 찍은 제 결혼식 사진과 폐백 사진…. 어머니와 찍은 사진이 이렇게 드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좀 더 멋진 사진, 좋은 사진이 없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그 중에서 제 대학 졸업식 때 어머니와 찍은, 그때로서는 흔치 않았던 컬러 사진과 함께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제 눈길을 고정시켰습니다.

이 사진 속의 어머니는 지금의 제 나이 또래로 보입니다. 아니, 그보다 좀 더 젊은 모습입니다. 늘 저보다 한참 위인 것처럼 기억되던 당신이 저와 동갑내기로 인식되다니, 세월은 참 경이롭습니다.

부산시 영도구 영선2동 돌담집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대학 졸업반을 전후한 어느 여름날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진 속의 저는 그 당시 유행하던 헤어스타일에 검은 선글라스로 멋을 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단정한 머리 모양과 옷차림새에 안경 너머로 단아한 웃음을 짓고 계십니다. 딸들이 ‘아빠 모습이 홍콩 영화 주연 배우 같다’면서 좋아했던 사진입니다. ‘홍콩 배우’ 옆에 서 계신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상입니다.

어머니는 보기 드문 미인이셨지요. 그 당시 흔치 않았던 여고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꽃가마 타고 재를 넘고 물을 건너 고성으로 시집오셨다지요. 어머니 여고 시절 그 예쁜 사진들은 모교에 기증해 이제 마산여고 100주년 기념관에나 가야 볼 수 있겠네요.

어머니는 꽃 가꾸기를 좋아하셔서 크지 않은 꽃밭에 꽃들이 참 많았습니다. 특히 장미를 좋아하셔서 돌담 밑에 심은 덩굴장미가 담장을 가득 덮으며 피어나곤 했습니다. 그 향기는 또 얼마나 그윽했는지요. 돌담을 따라 장미꽃이 만발하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곧잘 한두 송이씩 꺾어 가곤 했지만 당신은 애써 모른 척하셨습니다. 꽃 좋아하는 사람 치고 절대 나쁜 사람 없다는 것이 당신 생각이셨지요.

아버지께서는 바닷가에 잘 자란다는 해송을 구해 심어 놓으셨습니다. 대학 신입생 때 제가 어머니 심부름으로 통영에 가서 사 온 야자나무도 정원을 장식하고 있었지요. 어린 야자들은 어머니의 섬세한 손길 아래 무럭무럭 자라나 저는 방학 때 집에 오면 마치 제가 자란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돌담집은 제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여행길에서 돌담집을 만나면 당신이 마당에서 꽃을 돌보고 있을 것 같고, 돌담 너머로 “어머니!” 하고 부르면 반갑게 달려 나오실 것만 같습니다.

별이 총총히 켜진 밤이면 그 별들이 마치 어머니께서 가꾸고 돌본 하늘나라 정원의 꽃들처럼 여겨집니다.

어머니는 노년에 부산 근교에서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감․밤․배․살구․복숭아 같은 유실수도 가꾸셨습니다. 내색은 안 하셨지만 노년의 당신에게 농사는 낙(樂)보다는 노(勞)와 고(苦)에 더 가까웠을 것 같습니다. 갓 결혼한 저한테 손수 따서 포장한 과일 상자를 보내 주셨지요. 그때는 고마운 줄만 알았지 밭농사, 과일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올해는 기후가 안 좋아 작황이 시원찮다”라고 하시면 그저 그런 줄로만 알았지요. 적지 않은 연세에 이미 몸까지 편찮으셔서 그렇다는 걸 몰랐으니 얼마나 미련한 아들이었는지요.

어머니는 편지 쓰기를 즐기셨습니다. 저한테도 그리고 며느리한테도…. 당신은 필체가 참 단아하면서도 활달하셨습니다. 한자를 즐겨 쓰셨고, 이따금씩 ‘시즌(잡곡 시즌)’ 같은 외래어도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글씨에 못 미치지만 필체만큼은 어딘가 당신을 닮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글도 저한테 쓴 편지였습니다. 병환 중에 있으면서도 어머니는 그 당시 첫 아기를 가져 배가 부른 며느리한테 부담이 될까 봐 알리지 말라 하셨지요. 그러면서 그 쇠약해지신 몸으로 제 몸보신하라시며 직접 처방해 지으신 한약을 편지와 함께 부치셨습니다. 아둔한 아들은 당신의 그 편지가 힘에 부친 몸으로 쓴 글씨라는 것도 뒤늦게야 알아차렸습니다. 어머니는 편지를 보내시고 바로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다시는 걸어서 돌아오지 못하실 줄을 서울에 있던 저는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석가탄신일 전날 눈을 감으셨지요. 지금도 그 편지를 읽으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왜 어머니께서 그토록 새아기(제 처)에게 극진한 사랑을 쏟으셨는지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결혼한 치 채 1년도 안 돼 병석에 누우신 당신은 이 둘째 며느리 얼굴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때 낳은 첫 딸, 어머니의 손녀는 그새 결혼을 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당신에게는 증손자, 증손녀입니다. 저도 덩달아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품에 손자손녀를 안고 있는 사진을 보면 당신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증손자, 증손녀 사진을 어머니 사진 옆에 나란히 놓아 드리렵니다. 아이들에게도 증조할머니 사진을 보여 주렵니다. 그리운 어머니, 여전히 제 마음 속에 살아 계신 어머니, 앨범 속 증손자, 증손녀와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 2011년 1월 발간된 "海原 수필 동인지 - 파도밭을 건너며 제11집" 에 실린 '사진 한 장에 얽힌 사연' 을 소재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