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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실록(제도개선등)/김형오의 말말말

“미국이 부럽다”

“미국이 부럽다”
법이란, 공권력이란, 국가란 무엇인가?

김형오


고개 숙인 남자.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국제통화기금) 총재는 블랙 코트 속으로 몸을 숨기려는 사람처럼 한껏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호텔 객실 여종업원 성폭행 미수 혐의로 뉴욕 맨해튼 형사법정에 선 그는 더 이상 막강 파워를 휘두르던 금융위기 해결사가 아니었다. 차기 프랑스 대통령 후보로서의 당당함은 찾을 수가 없었다. 문신으로 몸을 도배한 뉴욕 뒷골목 불량배들 틈에 뒤섞여 그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 파렴치범일 뿐이었다.

체포부터 구금까지 예외는 전혀 없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파리행 에어프랑스가 이륙하기 10분 전 1등석에 타고 있던 그를 끌어내려 연행했다. 여느 피고인과 똑같이 홍채 인식기로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쳤으며, 법정 출입이 허락된 언론사 카메라 플래시가 그를 향해 작렬했다. 도주 우려가 있다는 검찰 의견을 받아들여 판사는 그의 보석 신청을 기각하고, 악명 높은 구금 시설인 아일랜드 구치소 독방에 수감했다. 주요 혐의가 인정된다면 최대 25년형도 가능한 중범죄란다. 2012년 프랑스 대선 부동의 선두주자였던 이 유망한 미래 권력은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우파 언론들은 물론 좌파 성향의 리베라시옹 신문까지도 그의 정치 생명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이 스캔들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금 법 집행의 엄정성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미국 사회가 부럽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우리라면 어땠을까? 국제적인 압력과 국내 상황을 배제한 채 이 거물급 인사에게 수갑을 채우고 그를 법정에 세울 수 있었을까? “예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부자든 빈자든, 권력이 있든 없든, 다수든 소수든, 희든 검든 법은 공평하고 엄정하게 적용되는 것이 미국의 건국이념이고 확립된 전통이다. 미국이 선진 민주국가, 세계 일등국가인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법이란, 공권력이란, 국가란 그래서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4월 11일, 미국 수도 워싱턴 D.C.의 빈센트 그레이 시장은 연방정부 예산안에 항의해 가두시위를 벌이다가 시의회 의장과 함께 경찰에 체포됐다. 미국의 3대 TV와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신문은 이날 경찰이 그레이 시장 손에 플라스틱 수갑을 채우고 소지품을 압수하는 장면을 헤드라인 뉴스로, 1면 톱기사로 내보냈다. 그레이 시장은 지방정부가 지급해온 저소득 여성들의 낙태 지원금 폐지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를 벌였다. 어쩌면 약자를 위한 정의로운 싸움으로도 비쳐질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그 행위의 배경 여부를 떠나 불법을 저지른 지도층 인사들이 법의 심판을 받는 일이 전혀 낯설지 않다. 2년 전에도 하원 의원 5명이 워싱턴 주재 수단 대사관 앞에서 수단 정부의 국제구호단체 추방에 반대해 항의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 저지선을 넘어 구금당했다.

우리는 어떤가? 신공항 사태를 비롯해 작금의 LH공사 이전 및 과학벨트 지정 문제에서 보듯이, 법을 만들고 지키고 수행해야 할 정치인들과 지자체장들이 오히려 지역 이기주의에 편승해 불법 시위에 앞장서고 정부와 대통령을 협박한다. 단식에 돌입하며 불복을 외치고, 삭발을 하면서 원천 무효를 선언한다. 정권 퇴진 운동도 불사하겠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들려온다. 법은 무너지고 공권력은 땅에 떨어졌다.

대한민국은 상식을 상실했다. 공권력에 맞선 저항이 정의란 이름으로 미화되는가 하면, 법에 불복하는 것이 지역민들을 위한 도리고 희생인 양 치장이 된다. 그러나 그 속을 까발려보면 오직 표심만이 숨어 있을 뿐이다. 선거가 코앞이라서 유권자들의 인격은 안 보이고 오로지 ‘표’만 보이는 모양이다.

상류가 흐리고 더러운데 하류인들 맑고 깨끗할 리가 없다. 취객이 파출소에서 기물을 부수고 경찰을 폭행하고 용변을 보아도 그저 팔짱만 끼고 있는 게 공권력의 현주소이다. 그나마 파출소를 버리고 도망이나 안 가면 다행이다. 아무도 접시를 깨뜨리려 하지 않고, 그 누구도 구정물에 손 담글 생각을 안 한다. 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미래도, 희망도 없다.

스트로스-칸 총재 스캔들의 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미국의 공권력이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이 막대한 이 프랑스의 거물을 자국의 법정에 세울 수 있었던 자신감의 배경에는 워싱턴 시장의 예에서 보듯이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잣대로 철저하게 법을 적용해온 미국의 원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나는 그 점이 부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