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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비잔틴의 최후, 그 속에서 리더십을 물었다

 

[중앙일보] 2012-12-05 기사 바로가기 클릭


『술탄과 황제』 펴낸 김형오 전 국회의장

왼쪽은 유일하게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초상. 15세기 양피지에 그린 황제 9명의 수채화 중 일부다(이탈리아 모데나의 에스텐세 장서고 소장). 오른쪽은 이슬람 술탄 메흐메드 2세 초상. 베네치아 화파를 대표하는 궁정화가 젠틸레 벨리니가 1480년 그렸다(70X52㎝.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사진 21세기북스]

이제 정치인이 아니라 작가로 평가받고 싶습니다.”

 5선 의원을 지낸 김형오(65) 전 국회의장이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최후를 재조명한 『술탄과 황제』(21세기북스)를 펴냈다. 젊은 시절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30여 년간의 공무원과 정치인 경력을 마감하고 새롭게 시작한 ‘인생 3모작’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언젠가 본격 글쟁이로 나서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수필집을 낸 적은 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올해 4·11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장을 마치며 의원 한 번 더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에 불출마 선언(지난해 8월말)을 하고 훌쩍 터키로 떠났다.

 이스탄불은 비잔틴 제국 최후의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와 그를 물리친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격전을 벌인 현장이다. 거기서 48일간 머물며 자료조사와 전문가 인터뷰를 거쳐 이 책을 썼다. 역사적 팩트(사실)와 소설적 픽션(허구)이 어울린 일종의 팩션이다. 4년 전 터키 방문 때 이스탄불 역사에 매료됐던 그는 이후 현지를 모두 다섯 차례 방문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 -왜 비잔틴 제국인가.

 “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며 르네상스·종교개혁과 콜럼버스 대항해가 시작되는 세계사적 분기점임에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서양과 동양, 기독교와 이슬람이 충돌한 사건이다 보니 시각이 엇갈리는 것이다. 예컨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이슬람에겐 영웅이지만, 기독교 입장에선 사탄이며 그에게 진 것은 치욕의 역사다. 나는 그런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충분히 도전해 볼만하겠다는 야심이 생겼다.”

 -정치가에서 저술가로 변신,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텐데.

 “희랍어·라틴어 등 어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현장 장기 체류를 택했다. 관련 서적을 200권 가량 봤지만 전투 현장에 나처럼 오래 거주한 저자도 별로 없을 것이다. 돌 조각 하나, 풀 한 포기를 잡고 늘어지면서 나의 약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현지 학자들과 오랜 인터뷰는 큰 도움이 됐다. 짧은 인터뷰가 2시간 정도였다. 전직 국회의장 덕을 본 건 이게 유일하다. 장병과 장교들이 뭘 먹었고, 텐트는 어떻게 쳤는지 같은 미세한 질문에 그들이 곤혹스러워했다.”

 -어디에 역점을 뒀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나는 패자의 기록도 남기고 싶었다. 작가로서 도입한 장치는 황제의 일기와 술탄의 비망록이다. 나란히 병기했다. 일기와 비망록은 실제 역사에는 없지만, 그 내용은 어딘가 기록에 다 남겨진 것을 재구성한 것이다. 술탄과 황제의 리더십과 고뇌를 편견 없이 밝혀보고 싶었다. 부록으로 QR코드 41개를 실었다. 책에서 소화하지 못한 각종 사진·지도를 볼 수 있게 한 점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술탄과 황제 중 누가 더 매력적인가.

 “황제는 비록 패배했지만 그 나름대로 유능했고 술탄은 정복자다운 기개가 넘쳤다. 각기 최선을 다했다. 이런 류의 책은 없었다. 대개 한쪽에서 다른 쪽을 보는 식이다. 이스탄불은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이 도시를 나는 ‘이스탄티노플’로 부르자고 2년 전부터 주장해왔다. 공존과 화해의 의미다.”

배영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