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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Story/도서관

[ 김형오의 도서 산책 1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기원전 5세기, 27년간 지속된 아주 특별한 비극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퀴디데스/ 천병희 역/ 숲/ 2011

 

 

이 책을 나의 도서 산책에 제일 먼저 벗 삼는 까닭은 우선 고전 중에 고전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지금 한국을 둘러싼 복잡 미묘한 국제 정치 환경과 국가 안보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이 때 이 책이 상당한 길라잡이가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미 읽은 분들이라면 회상 속에서 의미를 곱씹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아직 안 읽어본 분들에게는 일독을 꼭 권하고 싶다.

 

이 책의 무대는 당시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던 세계 전체다. 즉 그리스의 내전이 아니라 세계대전이란 관점에서 봐야겠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두 축으로 하는 그리스의 모든 국가(*필자 주: ‘도시국가’라고도 하나 ‘국가’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요즘보다 국가의 사이즈가 좀 작을 뿐 나라별로 체제-왕정·민주정·과두제 등-가 다르며 국방·외교·행정 등이 독자적으로 행해졌다)들이 이 전쟁에 개입하고 참여한다. 요컨대 그리스 본토는 물론 이집트·시칠리아(이탈리아)·페르시아 등 당시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던 세계 전체에서 전쟁을 치렀다.

27년간(기원전 431~404년) 지속된 장기 전쟁에서 국가 간·지도자 간 치열하고도 치밀한, 그러면서도 처절한 삶과 죽음, 승리와 패배의 변주곡이 때로는 장엄하게 때로는 잔혹하고 비열하게 흐른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하찮은 일로 벌어진 싸움이 세계대전으로 번져 결국 모두의 파멸로 끝난다는 데서 시사점이 크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른 온갖 만행과 악행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받고, 심지어 추앙받기까지 하는 반문명적 상황의 고발서이기도 하다.

전쟁의 두 축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중심인 스파르타와 델로스 동맹을 이끄는 아테네이다. 또한 전통적 육군국인 스파르타와 강력한 해군을 기반으로 하는 아테네 간의 패권전이다. 초기 전쟁은 다소 싱거웠다. 스파르타가 막강 육군을 끌고 공격해 오면 아테네는 성문을 굳게 닫고 방어전을 펴는 한편 함대를 띄워 스파르타의 배후를 역공한다. 쉽게 승부가 나지 않는 질긴 전쟁을 치르며 두 진영은 점점 철저해지고 잔인해지면서 인간성과 명분을 잃어간다. 승리 만능주의와 전쟁을 위한 전쟁이 이어진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양 진영의 지도국도 서서히 쇠락해간다.

 

저자인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원인을 “점차 강성해지는 아테네 세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파르타가 일으킨 전쟁”*이라 규정한다. 아테네 출신답다.(*이른바 ‘투키디데스 함정’(Thukydides Trap)을 현대 전쟁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학자들이 있다. 즉 신흥국이 비약하여 기존 패권국에 도전할 만큼 강성해지는 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견제가 직접 부닥치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가 예사롭지 않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 전쟁 당시 스파르타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전쟁이 끝난 후,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을 기반으로 점차 제국화해 가는 데 대한 우려를 사전 제압코자 전쟁을 부추기고 또 참전한다.

 

누구도 생각 못한 처절하고도 끔찍한 전쟁으로 그리스가 자랑했던 이성과 합리성도 짓밟히고, 국가 간 합의나 약속도 소용없고, 힘과 계략이 판을 친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에 항복하지만, 스파르타는 그리스 세계의 패자(覇者)가 되지 못하고 패권은 테베(Thebes)로 넘어가는가 하다가 끝내 마케도니아에게 모두 정복당한다(이후 알렉산더 시대가 전개된다).

이 과정 모두가 전쟁을 통해 결정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간에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내일은 또 서로 치열히 싸우는 모습을 수없이 목도한다. 국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군사력이 약한 나라는 센 나라에게 먹히거나 나라 전체가 전장이 되어 초토화된다. 동맹에서 이탈하려는 나라는 가혹하게 처벌받는다. 동맹을 이끄는 강대국도 철저한 국가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세계 최강국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밀었다 당겼다 하며 주도권을 쥐고 두 세력을 긴장시킨다.

국내적으로는 끊임없는 정적 간의 대결장이 벌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심혈을 기울여 정적 제거에 성공하면 승자에 의한 장기 집권이나 정치적 안정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강력한 정적, 경쟁자가 새롭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결국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듯” 역사는 그렇게 흐른다. 정적은 “제거 대상이 아니라 타협 대상”이라는 점이 이 책을 통해 내가 터득한 진리다.

 

이 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여한 바도 있는 저자 투키디데스는 철저한 사실적 탐구를 통해 전쟁의 진실을 전하려 한다. 들은 이야기와 아는 바를 전부 다 쓰지 않고 최대한 엄밀히 검토한 다음 옳다고 믿는 것만 기술한다. 전쟁이라는 주제를 한 순간도 놓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다음 편에 소개할 박람강기(博覽强記)의 헤로도토스와 곧잘 비교된다. 헤로도토스가 넓다면 투키디데스는 깊다.

모두 8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권은 전쟁의 배경을 다루었고, 2권부터 전쟁에 대한 본격적인 서술이 진행된다. 전쟁이 끝난 후(BC 404년)에도 투키디데스는 살아남았으나 그의 글은 기원전 411년에서 끝난다. 그 뒤의 과정은 크세노폰·플라톤 등의 기록으로 파악된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동시대 사람들은 모두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했다.

 

“행복은 자유에 있고, 자유는 용기에 있다.”(2권 43장 4절) 페리클레스의 추도사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이 말은 미국 독립선언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케네디 취임사 등에도 인용 원용되었다. 우리 헌법 전문 “우리들과 우리들의 후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며 (이 헌법을 만든다)”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독자들에겐 천병희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숲, 2011년)를 권한다. 808페이지(지도 별첨)에 이르는 대작이지만 유려한 번역과 명문장들로 읽는 맛이 있고, 특히 여러 연설문들은 현장감이 살아 있다. 무엇보다 수많은 영웅·간웅의 부침, 예측 불허의 전쟁과 전투로 잡았다 하면 손을 떼기 힘들다. 이 책의 보충 교재로는 고대 그리스 연구의 대가인 석학 도널드 케이건의 동명 책자(허승일·박재욱 역, 까치글방, 2006년, 578쪽)도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The Peloponnesian War, Donald Kagan, 2003, Viking Penguin Group Inc.) 나는 이 책을 줄 그어가며 수없이 읽었다. 케이건 교수 자신의 책 4권을 요약한 것으로 투키디데스 해설판이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이해하는 데 이보다 좋은 책은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