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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4 중앙일보] 이렇게 자기 목소리 없는 여당 처음, 정국 주도 한 번도 못해

[김진국이 만난 사람] 김형오 전 국회의장


연말 국회가 엉망이 됐다. 국회선진화법까지 만들었지만, 동물국회 아니면 식물국회다. 정치의 중심은 국회다.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국회는 국민의 대표기관이다. 국회가 무력화되면 집정관은 황제가 된다. 착한 독재자를 만날 행운을 기대하기보다 제도적으로 위험을 분산하자는 게 민주주의다.

여당, 청와대 눈치 보고 지시 따라
존재감·투쟁력 등 약한 야당 덕 봐

선거법, 패스트트랙의 허점 중 하나
‘게임 룰’ 만들며 한 선수 젖혀버려

대통령 권한 축소 않는 개헌 반대
검·경 등 5대 권력기관 독립 확보를

 

 

지난달 27일 오후 선거법 개정안 표결 직전 김형오(73) 전 국회의장을 만났다. 그는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오후 5시 서울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국회 얘기만 나오면 TV를 끄든지 채널을 돌린다“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이 다 정치 때문“이라고 했다.

      김현동 기자



“요새는 국회 얘기만 나오면 TV를 끄든지, 채널을 돌리든지…. 죄인이 된 심정입니다. 20대 국회에는 정치가 사라졌어요. 이렇게 자기 목소리가 없는 여당은 처음일 거야. 청와대 지시만 따르는 여당이야. 정국을 청와대가 주도해요. 민주당이 주도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 야당도 잘한 게 없죠.
“그게 ‘야당 덕’입니다. 야당이 존재감, 투쟁력, 대안 제시 능력, 또는 시민 접촉성이 약해. 여당이 굳이 열심히 할 필요를 안 느끼는 거지. 이러다 보니까 청와대에 의한 정치가 돼버리고, 여야가 동시에 추락하는 겁니다.”

- 어떻게 하면 해결될까요.
“어떤 결과를 국민이 받아들이거나, 정치 당사자들이 합의하는 게 많아지면 좀 괜찮은 정치야. 궁극적인 책임은 여당에 있지만, 야당이 야당답지 못했어. 싸움도 제대로 못 했고, 협상도 과감하게 못 했어요.”

-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금 잘 싸우는 겁니까?
“좀 늦었지만 오랜만에 야당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아직은 황 대표밖에 없지 않나요.”

정부, 과거·현재만 있지 미래 제시 못 해

- 동물국회를 없앤다고 선진화법을 만들었는데, 제도만으로는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직권 상정 제도가 있으니까 여야 협상이 안 돼요. 여당은 그냥 밀어붙이고, 야당은 협상으로 조금 얻는 것보다 끝까지 투쟁하는 게 국민에게 선명해 보이니까. 내 국회의장 임기가 끝나고 선진화법을 만들었는데,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어요. 신속처리법안(패스트트랙)에 올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정교하게 짜야 하는데, 허점투성이야. 그중 하나가 선거법이야. 아니, 게임의 룰을 정하면서 한 선수는 젖혀버리고, 다른 선수들끼리 정해버리나. 있을 수가 없는 거야.”

- 그래도 연동형은 필요하지 않나요.
“아니, 장난도 이런 장난이 없어요. 계산법에 따라서 내가 찍은 사람과 정당이 당선되기도 하고, 낙선되기도 하는 이게 뭐냐 이거야. 연동형을 하자는 가장 큰 이유는 사표(死票) 방지잖아요. 사표를 방지하려면 헌법을 고쳐 대통령 선거부터 바꿔야 할 거 아닙니까. 시간상으로 안 된다면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그가 먼저 ‘적폐 청산’ 문제를 꺼냈다.

“적폐청산이 필요하죠. 정권이 바뀌고, 탄핵이라는 큰 파도를 뛰어넘었으니까. 그런데 제도 개혁이 아닌 인적청산에만 치중하다 보니 정치 보복으로 흘러버린 거야. 중장기 정책이 5년마다 단절되고, 비전을 잃어버린 나라가 됐어요.”

- 벌써 임기 절반을 넘었는데….
“국민에게 희망과 위상을 제시하는 게 진보 정권의 특징인데 이 정부는 그게 없어. 과거와 현재만 있지 미래를 제시하지 못하는 거지. 지금이라도 2년을 어떻게 잘 마무리할 것인가, 뚜렷한 지표를 설정해야 하는데, 국민이 사회주의 아니야, 전체주의 아니냐, 무슨 인민 민주주의 아니냐, 의심하는데도 여기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밝힌 적이 없어요.”

그러면서 그는 미세먼지, 한·미동맹, 경제, 교육에 이르기까지 불만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미세먼지 때문에 생명권이 위협받고 있어요. 그런데 며칠 전 한·중·일 정상이 만났지만, 이 초미의 관심사에 대해 말 한마디 못 해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원자력은 스스로 때려 부수고, 경쟁력 우위를 차지할 수 없는 태양광·풍력에는 투자해요. 세계 역사상 가장 엉터리 정책으로 꼽힐 겁니다.”

그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고 세금을 내는 것”이라며 “70년 동안 한·미동맹 그늘 속에서 국가안보를 유지해왔는데 이걸 뒤집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미동맹이 아니고 다른 어떤 대체수단이 있을 수가 없어요. 중국이 북한과 한국, 어느 쪽으로 먼저 가겠어요. 너무나 뻔한 겁니다. 중국과 원수 지면 안 되겠지만, 그것도 굳건한 한·미동맹의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겁니다. 외교의 기본원리도 모르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지금 갑자기 뭘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뭘 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은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을 후임자한테 물려주고 국민을 안심시켜야 해요. 경제의 주체는 민간인, 기업이거든요. 그런데 이 정부는 경제의 주체는 정부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교통순경이 운전자를 밀쳐내고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하면 이게 제대로 되겠어요? 교통정리만 잘하면 돼요. 자사고 폐지를 법률 아닌 시행령으로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웃긴 거고, 2025년이면 다른 대통령 임기 아닙니까. 아니 정시가 좋은지 수시가 좋은지를 대통령이 어떻게 결정해요.”

- 선거법이 개정됐는데, 헌법도 거기 맞춰 고쳐야 하지 않나요.
“헌법을 고쳐야 하는데… 헌법을 고치자 하니까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건 손도 안 대고 엉뚱한 것만 하니까, 그런 개헌은 난 반대야. 지금 섣불리 개헌하면 통제경제,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 시스템으로 가는 개헌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을 못 꺼내겠습니다.”

- 국회의장 시절 개헌안까지 만들었지 않습니까.
“대통령 권력을 축소하는 개헌을 하자고 동의만 하면 오케이야. 대통령 권한이 강대한 게 처음에는 좋지만 갈수록 짐이 된다는 사실을 대통령들이 너무 늦게 깨달아요. 문 대통령 퇴임 후가 전임 대통령들과 다르기를 바라지만…. 대통령의 불행도 불행이지만 나라가 이게 뭐야. 그래서 개헌을 절대로 해야 하는데….”

- 개헌한다면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합니까?
“완벽한 삼권분립에다 대통령 권한을 줄이는 거죠. 총체적인 책임은 대통령에게 가더라도 경찰·검찰·국세청·국정원·방송통신위원회, 5대 권력기관이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대통령도 행복해지는 겁니다. 마지막에. 그동안 초반 2년간은 권력의 하수인이 되고, 후반 2년은 새로운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 대통령에게 칼을 거꾸로 돌리는 일이 반복됐어요.”

21대 국회선 4차 산업혁명 발목 잡지 말길

- 21대 국회의 가장 큰 과제는….
“4차 산업혁명에 발목 좀 안 잡는 국회의원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또 국회가 국정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연말이 되면 국회의장이 팔이 아프게 방망이를 때려요. 2, 3분에 법안 하나씩. 내용도 몰라요. 의장도 모르고 의원들도 모르고…. 얼렁뚱땅 그냥 법을 만들어요. 제헌 국회 때는 독회(讀會)가 있었어요. 1 독회, 2 독회…. 내가 보니까 4 독회까지 있더라고. 우린 독회 한 번도 안 해요.”

- 국회가 제 머리를 못 깎으면 외부에서 해줘야 하지 않나요.
“맞아요. 국회가 잘 되려면 윤리위원회와 선거구획정위원회는 100% 국회 외부 사람으로 구성해서 결정하고, 수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거구를 1년 전에 획정하게 돼 있는데 한 번도 시한을 지킨 적이 없어요.”

그는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이 다 정치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지금 분열·갈등·분노·증오를 폭발시켜 싸움을 시키는 거야. 적은 수로 적을 만들어서 타도하는 레닌식 투쟁 수법을 써서 엄청 재미를 보고 있어요. 정치에 의해 경제도, 문화도 다 망가지고, 기술도 엄청난 퇴보를 하고…. 그래서 분열 지향적인 정치를 퇴출하고, 정말 헌신과 희생,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품성과 자질,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들이 나오도록 교육 프로그램 같은 걸 하고 싶어요. 진보로 가서 하든, 보수로 가서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는 92년 14대 총선 때 부산 영도구에서 민자당 후보로 처음 당선돼 18대까지 내리 5선 했다. 정치를 그만둔 뒤 2년 동안 현장답사와 100권이 넘는 관련 도서를 수집해 비잔틴 제국의 최후를 다룬 『술탄과 황제』를 집필하는 등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김진국 칼럼니스트·대기자 kim.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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