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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헤드라인

나경원은 장수(將帥)다



김형오(전 국회의장)


  나경원이 대통령 직속 두 개 기관의 책임자 자리에서 해임됐다. ‘사표 수리’가 아니라 굳이 ‘해임’이라고 하는 데는 무슨 곡절이 있을 게다. 당연히 여러 말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정치는 말이다. 표현이다. 국회(國會)의 어원도 “말하는 곳”이라 하지 않나. 그 말로써 나라를 이끌고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얻는 것이 정치다. 말 못 한다는 YS가 수많은 명언을 남긴 건 정치적 수사와 메시지가 국민의 마음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이번 해임 사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았을까, 그 역풍은 없을까. 오랜 정치 경험에서 이 점이 염려스럽다.(*1)

  (*1) 나는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에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정무비서실에서 보냈다. 그때 내린 결론은 그 후 20년 현역 정치인으로 있으면서 더 굳어졌다. “권력은 냉혹하며 그 끝은 허망하다.”였다. 냉혹해질수록 더욱 허망해지는 것이 정치권력의 세계임을 실감하며 반평생을 살아온 셈이다.

  바람직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를 떠나 한국의 정치 체계에선 당의 대표가 매우 중요하다. 지난번 당대표로부터 호된 시련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실로선 궁합이 맞는 당대표를 당연히 선호할 것이다. 이른바 핵관들이 나서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소수 여당인데 당내 전열까지 흐트러지면 정국을 주도하기가 더욱 어렵다는 논리다. 국내외적 여건이 만만찮고, 지지율은 답보에 여러 악재가 도사리고 있는 현실에서 핵심 관계자들의 마음은 급하고 초조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신중하고 현명하게, 때로는 느긋한 척해야 한다. 합리적인 국민들이 납득할만한 전략과 대책을 잘 세워야 하고, 특히 표현(말)을 잘해야 한다. 소통 능력이다. 말 한마디, 표현 하나가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돌아서게도 한다. 그런 점에서 ‘사표 수리’가 아닌 ‘해임 조치’는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몇몇 인사들의 나경원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은 지나친 감을 준다. 과연 그가 그렇게 비난받을 일을 했는가. 당내에서 이만한 일도 용납되지 않는단 말인가. 이준석이 대표로 있을 땐 입도 벙긋 안 하더니 왜들 이러는가. 가장 염려스러운 점은 덧셈의 정치를 해도 부족할 판에 뺄셈부터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경원은 당내 몇 안 되는 장수(將帥) 중 한 사람이다. 1년 후에 치를 총선이라는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이 장수들이 합심하고 정치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한다. 지난 총선과 대선, 작년의 지방선거를 되돌아봐도 전략 전술적 미비점에 못지않게, 장수 활용을 잘못해 실패하고 성과를 내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2) 장수에게 줄 수 있는 것, 장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서양 역사를 조금만 훑어봐도 지도자에게는 인정감(명예)이 최고의 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장수는 명예를 먹고 산다. 불명예를 당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설욕하려 들 것이다. 지금 나경원이 그런 상황에 몰리지 않았나 싶다.

  (*2) 지난 총선은 전장을 누빌 장수 부족에 코로나 대책이 전무했고, 대선은 대통령 후보를 뒷받침할 장수를 활용 못해 아슬아슬했고, 대통령 취임 직후의 지방선거 역시 장수 역할 분담과 이슈 주도를 못해 압승을 놓쳤다.

  이미 당대표 출마를 선언한 김기현도 이런 상황 전개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당당하게 살아온 그로서는 정당하게 승부를 가리고자 하지 자칫 ‘억압받는 나경원’ 이미지가 구축되거나, 선거가 감정에 의해 치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사태로 당은 또 한 번의 약점이 드러났다. 전당대회와 당대표 선거를 통해 당이 다시 뭉치고 뻗어나가느냐, 반대로 분열과 갈등이 증폭되느냐는 장수들에게 명예와 인정감을 얼마만큼 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총선 승리와 정국 안정으로 가는 첩경이 될 것이고 후자라면 당은 또 다시 패배할 것이다. 당내 선거에서 누가 이기고 지느냐는 그 다음이다. 국민은 냉정하다. 조금만 잘못해도 금방 돌아선다. 선거도 하기 전에 내부 갈라치기부터 하면, 선거 후의 모습이 지극히 우려스럽다. 거친 말과 날 선 공방으로 민심까지 날려버릴까 걱정이다. 위만 바라보면 한 사람을 만족시키지만 아래로 숙일수록 표(票)는 모이는 법이다. 군기(軍紀)를 세우는 곳은 군대이지 정당은 아니다.

  여론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목소리 큰 사람들이 뭐라 말하든 나경원에게 동정 여론이 일고 있다. 권력으로부터 핍박받고 그것을 극복한 사람은 대권 반열에 올랐다. 나경원은 YS나 DJ와는 시대나 경우가 다르지만 비슷한 점도 없지 않다. 그가 대표 출마를 선언하든 하지 않든 명예를 살리려는 정치인으로서의 심사숙고가 시작되었다. 장수로서의 나경원의 결단이 한국 정치 발전의 새로운 전기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