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형오가 만난 세상/김형오의 문화 카페

5월의 사릉(思陵)에서


5월의 사릉(思陵)에서

당신께서 이곳에 묻히셨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왜 뱀 사(巳.蛇)자가 먼저 떠올랐을까요? 왜 생각 사(思)자가 생각나지 않았을까요. 지금에야 실토하지만 당신같이 비운의 인생을 산 여성에게 뱀을 떠올렸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당신께 늘 미안했습니다. 더구나 내 책*에서 당신에 대한 언급을 수시로 하면서도 책이 완성될 때까지 와보지 않았던 나의 게으름에 대해 늘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내 책에서 가장 애틋한 마음으로 힘들게 쓴 부분이 당신과 당신 남편 단종과 관련된 것이지요.

 *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라는 제목의 국토순례 에세이

(교보문고 종합순위 5위, YES24 종합순위 6위)

청량한 5월 첫 일요일 큰 마음먹고 당신을 찾아갔습니다. 한평생 그리움에 지쳐서 쉽게 눈을 못 감았을 당신, 당신은 서울 근교 금곡 근처에 조용히 묻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인연일까요. 이곳 사릉에서 불과 11Km 떨어진 곳에는 당신을 그렇게 만든 시숙 세조와 시숙모 정희왕후의 묘 광릉(光陵)이 있었습니다. 같은 남양주시 내에 불구대천의 인연이 함께 영면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짠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홍살문에 본 사릉 전경, 릉이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은 규모이다.
                                                           ⓒ 국회의장비서실

단종과의 혼사를 맺어준 세조(수양대군)가 2년후 단종과 생이별을 시켰던 그 원죄를 끝까지 묻기 위해 여기까지 오신건가요. 그러나 당신이 이곳으로 온 이유를 안 순간, 절로 고개가 떨구어 졌습니다.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이후, 죽어서도 낭군한테 가지 못하고 더구나 시신을 수습할 사람도 없었다지요. 그나마 당신의 시누이신 정혜공주 시가(媤家)의 도움을 받아 해주정씨 선산에 더부살이로 유택을 마련한 것이라고 하니 그 곤궁함은 말할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해서 광릉인근 지역에 오게 되었으니 인연의 끈은 참으로 모질기도 합니다. 그후 숙종 24년(1698년)에야 당신은 단종과 함께 복위되고 그때부터 능호를 사릉이라 불렀다지요. 그래서 사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일반인의 묘가 철거되지 않고 함께 있는 이유일지 모릅니다. 죽은지 177년만에 왕후(定順王后)가 되신 이가 또 누가 있던가요.


겨우 산자락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있는 광릉은 수목원 때문에 유명한 곳입니다. 광릉과 사릉, 같은 시대에 살면서 권력과 영화를 위해 피의 역사를 써야 했던 가해자와 그 피해자가 공존하고 있는 공간, 이들은 지하에서 지금쯤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요.

                                 사릉, 난간석과 무인석이 없고 규모도 일반봉분과 비슷하다
                                                           ⓒ 국회의장비서실

사실 광릉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검소하게 조성되었습니다. 조선초기 왕릉의 기준이 되었지요. 석실도 병풍석도 없고, 왕릉을 지키는 석수(石獸)도 호랑이와 양이 각 두쌍씩 얌전히 있습니다. 왕릉을 지키는 엄장함 보다는 민화에 나옴직한 정겨운 모습입니다. 봉분을 둘러싼 난간석이 그나마 권위를 지켜줍니다. 세조보다 15년후에 돌아가신 왕후릉은 좀 더 작은 모습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하여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은 하나지만 왕릉과 왕후릉이 따로 조성되었습니다.

다른 왕릉보다 봉분도 낮고 크지 않았지만 산 높은곳에 조성함으로써 기품과 위엄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왕후릉은 광릉숲 전체를 조망하는 높은 소리봉을 안산으로 할 정도로 사위가 툭 트여 신록의 바다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사릉 석수(석양) 규모는 작지만 생생하다.
                                                           ⓒ 국회의장비서실


솔직히 당신이 묻힌 사릉은 시숙내외의 빛나는 광릉에 비할 바가 못되었습니다. 아예 난간석이 들어설 공간조차 없습니다. 겨우 문인석으로 치레는 했지만 무인석은 아예 있지도 않고, 석수도 양과 호랑이가 조그만 덩치로 겨우 한쌍씩 외롭게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호랑이(石虎)도 얼굴이 찌그러진 채 힘들게 서있는데 얼른 봐도 돌 자체가 그런 놈을 써서 별로 정성들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솔직히 정자각 옆의 숙종때 하사된 비각이 ‘정순왕후 사릉’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왕릉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신께선 조선조 왕비중에서 가장 슬프고 어려운 세상을 사셨습니다. 15세에 한살아래인 단종의 비로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왔을 땐 권력은 이미 수양대군의 손에 떨어진 후였습니다. 당신 편을 들어줄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었습니다. 하기야 세상 나온지 3일만에 생모가 돌아가시고 12살에 아버지(문종)를 여윈 남편 단종의 심정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2년간 왕과 비로서 소년부부가 함께 웃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갈 때 당신은 함께 하지도 못했습니다. 두분이 생이별한 청계천의 “영 이별 다리”는 “영영 건너가 버린 다리”라는 뜻의 영도교(永渡橋)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영도교 주변에서 염색업을 하며 근근히 생을 이어가는 당신께 동네 아낙네들이 채소전을 만들어 몰래 집안으로 먹거리를 넣었다지요. 얼마나 삶이 곤궁했겠습니까. 단종이 돌아가실 때 18세였던 당신께선 동대문밖에 초막(정업원, 지금은 청룡사)을 지어 흰옷과 소찬으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매일 가까운 언덕에 올라 단종의 넋이 있는 동쪽 영월을 보며 그리워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동망봉(東望峰)입니다.


                               광릉(정희왕후릉) 뒤편에서 바라본 전경, 난간석과 석물들.
                                                         ⓒ 국회의장비서실

                         광릉(정희왕후릉)의 석양(石羊) 석호(石虎)의 석수(石獸)와 문인석, 무인석.
                                                        ⓒ 국회의장비서실

 당신께선 82세에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시숙모 정희왕후보다 22년 뒤에 태어나서 그 분이 돌아가신 후 38년을 더 사셨습니다. 조선의 비빈중에 가장 오래 사신분입니다. 단종임금의 몫까지 사신 것입니다. 그리움이 사무치면 천명(天命)도 모질어지는가 봅니다. 살아실 제 당신은 온 백성의 사랑을 받았고 이승을 떠나도 남편과 함께 추앙받고 있습니다. 생전에 일곱분의 임금이 저세상 가시는 걸 보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당신이 묻힌 사릉이 조촐하다고 서운하실 것 없습니다. 하늘에 떳떳하고 땅에 떳떳했으니까요. 반면에 세조부부는 어떠했습니까. 자식과 며느리가 일찍 죽고 본인들도 몹쓸 병에 시달리는 등 업보에 지친 삶을 살았던 것 아닙니까.

정순왕후님, 짧은 신혼이 영원한 이별로 이어졌는데 지금은 도솔천에서 3백리 떨어진 영월 장릉 주인 단종과 뜨거운 포옹을 하고 있겠지요.

                                                     사릉의 소박한 정자각과 비각
                                                           ⓒ 국회의장비서실

                                                        광릉의 5단 높이의 정자각
                                                            ⓒ 국회의장비서실


사릉과 광릉 정자각의 규모는 비각과의 비율로 추측이 가능하리라.
우측 멀리 정희왕후릉이 보인다.


광릉(光陵)과 사릉(思陵), 역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 영욕과 성쇠의 철리(哲理)를 깨닫게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눈부시게 빛나는 5월 이곳에 오니 한편의 시가 떠오릅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중략)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국회의장비서실 

요새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사릉이라도 한 번 가서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해보는 것도 멋진 일이겠지요.
왕비님, 낭군님과 영원히 행복하세요.

  

ⓒ 자료출처

 글 : 김형오

사진 : 국회의장 비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