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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오가 만난 세상

침략신사 야스쿠니, 한국의 신사는 어땠을까?

"황국신민화 정책을 위해 신사제도를 가장 잘 정비한 곳이 조선이다."

현재 국회도서관에서 열리는 '침략신사, 야스쿠니' 기획전에서 가장 눈에 띈 문구였습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신사'였고, 일제가 조선을 침탈한 역사가 있었으니 조선 도처에 '신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전시회를 보면서 일본은 왜 한국(조선)에 신사를 세웠는지, 그 신사들이 어디에 세워져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 국회도서관에서는 11월 5~14일 10일간 '침략신사, 야스쿠니'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 일본의 침략전쟁 그리고 신사 ]


메이지 유신으로 정권을 잡은 신정부는 정치적 기반이 미약하였습니다. 그래서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국민들을 결속시키기 위해 대외팽창정책을 선택했습니다.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 확보를 위해서는 아시아에 대한 지배의 야욕을 꿈꿨고, 그것이 침략전쟁을 부추겼습니다.  

▲ "황국신민이 되려면 신사참배를 하라(?)" 참으로 기가 막힌 말입니다.

침략전쟁의 주된 대상 중 하나가 바로 조선이었죠. 그 조선을 발판삼아 대륙으로의 확장을 꾀하기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웠고, 이 과정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심과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를 뿌리 깊게 심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바로 '신사(神社)였습니다.


[ 한국의 신사들 ]

그러면 우리 나라에 가장 먼저 세워진 신사는 어디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 용두산 신사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일본의 신사는 부산에 세워진 '용두산 신사'입니다.

일본인의 입국-교역을 위해 왜관이 부산항에 설치되던 때가 1678년 3월. 당시 대마도 영주가 용두산에 한일을 오가는 배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금도비라(金刀比羅)신을 모신 것이 용두산 신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1894년에 거류지신사로 개칭했고, 1899년 규모를 확장해 용두산 신사로 개칭했습니다. 

■ 살아있는 신(神), 천황

메이지정부는 '천황' 중심의 정치를 선언하고
제국 헌법에서 '천황은 태초부터 하나의 혈통이며 신성불가침하다'고 규정하면서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모두 천황 아래 두었다.
전래 민간신앙인 '신도'의 종교적 색채를 지우고, 이를 '천황' 중심 국가종교로 재편했다.

- '침략신사, 야스쿠니' 기획전 중 -

일본은 이런 신사들을 어떤 형태로 확장해나갔을까요?

1876년 조선을 강제로 개항케 한 일본은 개항지를 중심으로 일본인의 이주를 확대했습니다. 이에 부산, 원산, 인천 등 개항장에 외교관이 주재하고 일본인 거류지가 설정되었습니다. 각 거류지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조선의 국권이 미치지 못했죠. 신사도 이 지역 공원에 주로 지어졌고, 이 지역들을 시발점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갔죠. 일본의 조선 침탈이 깊어지는 만큼 신사도 늘어났습니다. 

▲ 조선신궁풍경도

이들 중 일제 침략신사의 목적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바로 '조선신궁'입니다. 일본은 이곳을 식민통치의 성지(聖地)로 삼았다고 합니다. 1909년 통감부는 단군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함께 모신 조선신궁을 건립코자 했습니다. 그러나 '한일병합' 이후에는 아마테라스만 모신 신궁 건설을 1912년 추진해서 1925년에 완공했습니다. 

※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으로 일본의 시조 신으로 아마테라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늘에서 빛나다'라는 뜻입니다.
 
▲ 조선신궁을 하늘에서 본 사진(좌), 조선신궁 입구에 세워진 위압적인 황국신민서사주(우)

▲ 좌측 제일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평양신사, 대구신사, 군산신사, 강원신사

▷ 평양신사는 조선신궁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고 하는데, 평양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지였답니다.
▷ 대구신사는 관찰사 이용익이 천황에게 절하는 요배전 건설을 막기 위해 달성서씨들에게 뽕밭을 일구게 했으나 일본 거류민회 부회장, 도구라와 박중양 등의 반대로 개간이 중지되면서 1906년 11월에 준공됐습니다. 

▲ 청주신사(좌), 광주신사(우)


▷ 청주신사는 조선인 최초로 신직(神職)에 오른 이산연이 근무했던 곳입니다. 이산연은 '일본인 이상의 조선인'이란 말이 자자할 정도로'황민화 정책'의 최일선 있었던 인물로, 그는 일본인과도 동등한 최고의 물자배급을 받았는데, 당시 도지사급의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 창씨개명과 신사 ]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면서 벌인 대표적인 악행 중 하나가 바로 창씨개명이었습니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는 민족 말살책의 일환이었기 때문이죠.

■ 신사에서 취해진 학생들의 창씨개명

교사가 학생들을 신사에 끌고 가 일본의 신들과 천황에게 보고하는 신전보고식을 거행했다. 교사가 신전에서 학생들의 새로운 일본명 명부를 신직(神職)에 건내면 신주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읽는다. 학생들은 그 때 신사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노래와 같은 곡조로 신주가 축사를 읊조리고, 그 후 전원이 일어서서 신전을 향해 최고 경례를 해서 '일본명'으로 새롭게 바꿨다.

 - '침략신사, 야스쿠니' 기획전 중 -


[ 맺음말 ]

역사 속에는 여러 가지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선택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면은 계승-발전시켜야 하고, 부끄러운 부분은 되풀이 되지 않게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번 '
침략신사, 야스쿠니' 기획전을 통해 일제가 행한 일들을 떠올리니 참으로 치욕적이었습니다. 최근까지 자행된 일본 총리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도 더욱 분개할 수 밖에 없는 것도 같은 이유겠죠.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에는 여전히 일본 군국주의의 흔적과 아시아인의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신사의 역사를 봐서도 그러하거니와, A급 전범과 뜻하지 않게 묻힌 아시아인이 합사되어 있기 때문이죠. 일본이 야스쿠니 신사에 집착하는 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평화는 허울 뿐일 것입니다.

▲ 4개 지역의 합사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8월 행사를 가졌는데 그 때 그려진 그림

현재 한국, 대만, 일본 등 4개 지역의 합사자 유족과 시민단체가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를 요구하는 소송이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무고하게 묻힌 일부 아시아인의 넋이 '일본의 대외침략의 성전(聖戰)에 목숨 바친 영혼'으로 둔갑되었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