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있던 군대 훈련소에서는 유급제도가 있었습니다.
0점에서 시작해서 100점의 과실점수를 받으면 유급이 되어 훈련소 생활을 한 번 더 받는 구조였습니다.
과실점수를 주는 유형은 다양했습니다.
1. 수류탄 투척
수류탄 훈련에 앞서 귀가 닳도록 주의사항을 교육받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훈련용 수류탄을 전방으로 투척하는 훈련이 진행됐습니다.
훈련용이라서 인명을 살상할 만큼의 위력은 없지만, 폭발은 하기 때문에 꽤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풍채 좋고 사람 좋아 보이는 해병대 원사(계급)님께서 교육을 담당하시고 훈련을 진행하였습니다.
훈련이 중간쯤 진행되고 있을 무렵 교관이 한 명의 훈련병을 가리키며 소리를 쳤습니다.
"야! 너! 던져! 던져! 빨리 던져!"
당황한 그 동기는 짧은 시간 동안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교관을 향해 (훈련용)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쾅!
연기가 자욱하게 퍼지고,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정적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교관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연기 속에서 스르르 나타났습니다.
(훈련용이기 때문에 놀라긴 했지만 다치진 않았습니다.)
"전부 대가리 박아!"
우리는 실제 수류탄은 던져보지도 못한 채, 철모에 머리를 박고 그날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과실점수 5점을 받았습니다.
2. 이함훈련
배에서 탈출하는 훈련을 이함훈련이라고 합니다.
높은 다이빙대에서 물속으로 뛰어내리는 훈련인데요,
덩치가 커다란 동기 한 명이 자신은 죽어도 못 뛰겠다고 했습니다.
한참 동안 얼차려를 받고 온 그 동기는 무척이나 해맑은 표정으로 대열로 돌아왔습니다.
그 동기는 과실점수 20점을 받았습니다.
3. 기타 등등
그 밖에도 청소불량 10점, 지나가다 경례 안 하면 10점, 이런 식으로 과실점수는 쌓여만 갔습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과실점수의 명확한 기준이 없어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과실점수를 기록지에 표기하여 주말에 과실자 훈련을 받았는데, 과실점수가 없으면 그 시간을 이용해 편지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과실점수를 받지 않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과실을 만회하기 위한 양호라는 것도 있었는데요, 양호점수는 과실점수보다 매우 뜸하게 주었습니다.
과실제도를 통해 실제 유급이 되는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옥 같은 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이 느끼는 유급에 대한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영혼이라도 팔겠어!"
4. 상관 모독
시간이 흘러~ 수료를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 날,
정식 군복도 지급받고, 교관들도 우리를 어느 정도 편하게 대우해주며,
훈련소에 갓 들어온 한기수 후임들의 부러움 가득한 눈빛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해가 져서 어두워진 연병장에 정렬하여 앉아 무엇인가 교육을 받던 중에 날카로운 교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너 이 자식! 상관모독! 과실보고 해! 과실 50점!"
무슨 잘못을 했기에 수료를 코앞에 두고 과실 50점이라니요.
"아닙니다! 교관님, 잘못했습니다!"
"넌 상관을 모독했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교관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고, 그 친구는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교관님! 50점이면 저 유급입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교관은 너무나 냉혹한 태도를 보이며 급기야 그 동기의 짐까지 싸서 들고 나왔습니다.
1,000여 명의 동기들이 모두 쳐다보는 앞에서 그 친구는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교관에게 매달렸습니다.
코 파다가 교관과 눈이 마주쳤답니다.
사실 훈련소 마친다고 끝이 아닌데, 인생 다 산 듯 행동하는 이등병들이 얼마나 우스웠을까요?
그런 이등병들이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교관님의 극약처방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게 하필 코 파다가 걸린 것이라니, 그 친구도 참 운이 없었지요.
결국, 그 친구는 다시 양호점수를 받아 유급은 면했다고 들었는데,
두 번 다시 함부로(?) 코를 파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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