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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오가 만난 세상/김형오의 문화 카페

지도에는 없는 도시 '이스탄티노플'에 가다 1

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1
                              - 지도에는 없는 도시를 가다

  그대 혹시 이런 이름의 도시를 아시나요? 이스탄티노플(Istantinople).

  아마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지도를 펼쳐 놓고 아무리 찾아 봐도, 지명 사전을 열심히 뒤져 봐도, 네이버 지식 검색에 입력을 해봐도 결코 나오지 않는 도시. 그러면서도 왠지 익숙한 그 이름, 이스탄티노플. 이 도시가 지금으로부터 550여 년 전으로 나의 시계와 발걸음을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탄티노플은 다름 아닌 이스탄불(Istanbul)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합성어, 바로 내가 창안하고 개념 짓고 명명(命名)한 도시입니다. 절묘하지 않습니까. 신기하게도 이스탄불의 ‘불’과 콘스탄티노플의 ‘콘’, 그렇게 한 글자씩만 떼어낸 다음 조합하면 이스탄티노플이란 단어가 탄생하니 말입니다.

▲ 한여름 햇살이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날, 차양 넓은 모자를 방패삼아 쓰고 격전지 성곽 순례에 나섰다. 마치 종군 기자가 된 심정으로. (내 옆에 있는 ‘미녀 삼총사’는 왼쪽부터 해안 성곽을 전공하는 역사학도 니사, 터키어가 유창한 현지 통역사 이경숙씨, 이스탄불 총영사관 정은경 박사이다.)


  언어유희로 웃어넘기거나 폄하할 일이 아닙니다. 터키의 경제수도 격인 이스탄불은 실제로 그 도시의 옛 이름인 콘스탄티노플의 역사와 문화가 발길 닿는 곳마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입니다. 현재의 이스탄불과 과거의 콘스탄티노플이 공존하는 도시랄까요.


  잘 아시다시피 동서양의 교차로인 이스탄불은 민족·인종·지역·종교·문화가 얽히고설킨 곳입니다. 아시아 내륙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의 최종점입니다.


  나는 지난 8월 초순 나의 휴가를 온통 그 곳에서 보냈습니다. 3일은 그 유명한 아야 소피아(하기야 소피아, 성 소피아 성당)에 틀어박혀 있다시피 하였고, 또 3일은 배낭을 멘 채 1500년 된 성곽을 뙤약볕 아래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걷고 또 걸었습니다.


▲ 어디선가 본 듯 눈에 익은 꽃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입성하는 우리를 맞아 주었다. 저 하얗고 빨갛게 피어난 꽃들에 그 당시 숨진 병사들의 넋이 깃들어 있는 건 아닐는지….


  아야 소피아는 온종일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해마다 이 도시를 찾는 2700만 관광객들에게 필수 코스나 다름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우리 일행처럼 사흘 내내 아야 소피아의 1․2층은 물론 부속 건물들과 외벽, 지하실까지 보물찾기하듯이 뒤지고 살펴본 이는 드물 것입니다. 게다가 그 건물을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전문가(하산 박사)를 만나 열정적 토론을 한 이틀 반은 이 위대한 건축물의 숨소리, 눈물 자국마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 성곽 위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구시가지 모습.


  지금은 박물관이 된 아야 소피아에서 나는 1453년으로 돌아가 황제의 간절한 기도와 술탄의 장엄한 연설을 들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소리들은 관광객들이 쏟아내는 소음 가운데서 들릴 듯 말 듯 나를 애태웠습니다.


  “도시를 세운 이(콘스탄티누스 1세)가 도시를 망하게 한다(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전설과 *
선지자 모하메드의 예언대로 메메드 2세(모하메드 또는 마호멧의 터키 식 이름)가 정복자(‘파티’, Fatih)가 되는 이런 역사는 우연인가요, 필연인가요.


  *“한 쪽은 육지이고 다른 두 면은 바다로 된 도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삭의 7만 아들이 그 도시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심판의 시간을 알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 대포? 노! 성 아래에서 성 위로 물건을 들어올리기 위한 장치였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도 제대로 머물러 있지 않지만 세계사의 방향을 바꾼 획기적인 대 사건…. 이슬람 세력(오스만 투르크)이 기독교 세력(비잔틴 제국)을 포위한 채 총공격을 감행한 **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쟁은 세계 전사상 가장 처절했던 전투였습니다. 동원 가능한 인력은 물론 모든 역량과 지혜가 총집결되었습니다. 육전·해전·지하전이었고, 또한 외교전·첩보전·심리전이었습니다.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공식적으로는 이 전쟁을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는 전환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이는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계기로도 작용했습니다. 아시아계이면서 이슬람 신앙을 지닌 오스만 세력이 유럽에 속한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이 기념비적인 사건은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그 동안 세계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져 왔습니다. 서양인들로서는 애써 외면하고 싶은 ‘패배와 굴욕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잔인하고도 처절했던 사생결단의 전쟁이었지만, 정복 이후 오스만은 비교적 관대하게 기독교 문화를 포용했습니다. 어쩌면 그로 인해 오스만 제국이 500년 가까이 유럽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큰 의미와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건이건만 너무나 소홀히 다루어지고 덜 알려져 있는데 대한 안타까움이 역사학자도 아닌 나를 ‘1453년’에 심취하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9세기 성벽(왼쪽)과 12세기 성벽(오른쪽) 양식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 모두가 블라케르나에 황궁(테플 사라이)을 지키던 성벽이다. 물론 보수 및 복원의 손길을 거친 모습이다.

  2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성곽은 3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개 면은 바다와 만(마르마라해와 골든혼)에 접해 있고, 한 개 면은 육지 위에 세워졌습니다. 육지 부분은 3중 성벽으로서 1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위용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로마 제국을 1000년 넘게 지켜 준 난공불락의 철옹성인 ‘테오도시우스 성벽’입니다.

▲ 짧게는 40미터, 길게는 90미터 간격으로 방어용 타워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멀리서 보면 톱니바퀴 모양이다.


  나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살피고 또 살폈습니다. 병정놀이하는 아이처럼 성곽의 앞과 뒤를 가로지르고 성벽의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포탄 자국과 혈흔을 더듬었습니다. 총공격을 독려하는 술탄(메메드 2세)의 우렁찬 목소리와 죽음으로 성을 지키려는 황제(콘스탄티누스 11세)의 발자국을 찾으려 했습니다.

  

▲ 통상 성곽 앞에는 군데군데 묘지가 조성돼 있다. 묘지는 성곽 터를 측정하는 주요 지표로 쓰이기도 한다.

  내가 그 도시에 머문 기간은 너무나 짧고 한편으로는 길었습니다. 순간과 영원 사이를 오고간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그 도시를 생각하면 어떤 때는 열 권의 책이라도 써낼 수 있을 것 같다가 또 어느 때는 한 줄의 글조차 감히 적어내기가 막막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두 번은 짧게, 한 번은 조금 길게 그 도시에 다녀왔습니다. 짧은 두 번의 방문 이후 나는 그만 그 도시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뛰고 설레는 도시가 돼 버렸습니다. 도서관을 뒤져 수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영문 혹은 터키어로 된 책자도 구해 보았습니다.


▲ 성 안에서 만난 천진난만한 아이들. ‘꼬레’(한국)에서 온 ‘꼬레리(한국 사람)’인 걸 알고는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이런 아이들만 보면 외손자·외손녀가 생각나서 덥석 안아주고 싶어진다. 

  국회의장 직을 마치자마자 나는 이 도시 방문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대표에 출마하라는 주변의 권유와 스스로의 유혹도 뿌리친 채 배낭을 꾸렸습니다. 녹음기와 카메라와 지도는 소중한 탐사 자원이었습니다. 현지의 명망 높은 학자들을 만나 궁금증을 풀었습니다. 귀중한 자료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4명의 단출한 ‘역사 탐방대’가 50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밤낮으로 헤집고 누비고 다녔습니다. 문명과 문명, 그 충돌의 현장에서 많은 물음표들이 지워졌고 새로운 물음표들이 생성되었습니다.


▲ 최후의 날 당시의 황궁 터. 블라케르나에 황궁(테플 사라이) 중 비잔틴 양식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으로서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이번에 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스탄불보다는 콘스탄티노플을 더 많이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터키와 그리스, 두 나라의 미묘한 국민감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것이 나에게 하등의 고려 요소나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느낀 역사적 전율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열망으로 길을 떠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550여 년 전의 치열했던 전투로 세계사는 바뀌었습니다. 한 제국은 사라지고 또 한 제국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터키는 독립전쟁(1919~1923년)을 거쳐 공화국으로 거듭났습니다.


▲ 황궁이 끝나고 삼중 성벽이 시작되는 곳. 방어용 탑이 망루라 해도 좋을 만큼 높고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진실은 역시 현장에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는 망원경으로 본 듯 느껴지던 것들이 직접 현장을 답사하니 현미경으로 보는 듯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무너진 성곽 더미에서,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에서 두 제국의 실체를 느꼈습니다. 나에게는 두 제국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거대한 울림으로 동시에 다가왔습니다.


  심금을 두드리는 이 웅대무비의 교향곡을 나는 연주할 능력도 해석할 재주도 없습니다. 다만 보고 들었을 뿐입니다.

  어느 순간 내가 느낀 ‘이스탄티노플’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것이 나의 소명처럼 여겨졌습니다. 나는 오직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에 입각할 것입니다. 때로는 즐거운 상상력도 동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능력과 상상력 부족으로 본의 아닌 왜곡이나 의미가 잘못 전달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고 내 잘못입니다. 모든 것을 오로지 진실의 창을 통해 보려 했던 나의 신념이 부디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 과연 그럴 시간이 있을는지, 생생한 기억들이 희석되지 않을는지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서 혹시 오류를 발견하거나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분이 있다면 서슴없는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 카리시우스(에디르네카프) 성문 진입로. 여기를 통과하면 당시 성사도 교회(지금의 파티 자미. 자미(Camii)는 모스크, 곧 이슬람 사원을 의미한다)로 이어지던 메인 로드가 펼쳐졌다. 내 옆에 있는 아가씨는 박사 과정 역사학도 니사.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내 어드벤처에 앞장서 동행해 주었다.

  우선은 이 블로그에 짬짬이 간단한 캡션과 함께 사진으로 ‘이스탄티노플’을 소개할 생각입니다. 훗날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내기 위한 워밍업 삼아서 말입니다. 최대한 편안하고 부담 없이 써나가려고 합니다. 영화로 치면 예고편일 수도 있고 시놉시스일 수도 있는 그런 작업입니다.

▲ 매실? 노! 한때는 두려울 게 없었던 투르크 전사의 후예인지도 모를 중년의 사내가 뱃가죽을 늘어뜨린 채 무딘 칼로 호두 껍데기를 벗겨내고 있다. 1500년 역사를 지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현주소라기엔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허물어졌던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격전지 성곽을 탐방한 사진 몇 컷으로 여러분과의 만남을 매듭짓겠습니다.

▲ 이중 성벽이 허물어진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난공불락 철옹성도 세월의 무게는 견디지 못하는가.

▲ 제법 근사한 사진이 나왔다. 옛 성곽에선 누구나 프로추어(프로+아마추어) 사진작가가 된다. 구도를 어설프게 잡아도 피사체 스스로가 너무나 멋진 모습으로 작품을 완성시켜 주기 때문이다.

▲ 허물어진 성벽 너머로 모스크의 뾰족 탑이 보인다. 어느 사원인지는 이름을 잊었다. 이런 사원들이 수 백 개를 헤아리니까. 


※일러두기=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전체 성곽 중 골든혼(할리치, 금각만)이 끝나는 지점에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까지의 성곽 중 일부를 탐사한 기록입니다. (답사 지도의 하늘색 표시부분) 2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성곽 탐방로의 극히 일부분임을 밝힙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453년 당시 지도에 비해 현재 크게 달라진 4가지 포인트

1. 붉은색 표시
145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가로질러 흐르던 리쿠스 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새 도로(아드난 멘데레스 불와르)가 나 있다.


2. 초록색 표시
성 로마노스 시민문(톱카프) 부근에서 시내로 새 길이 나 있다.
길 이름은 밀렛 자떼시(Millet Caddesi). ‘시민의 도로’란 뜻이다.


3. 파란색 표시
마르마라 해변을 옆에 끼고 기찻길이 펼쳐져 있다. 이 레일 위로 파리에서 이스탄불 사이를 오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가 달린다. 그 종착역 겸 시발역이 바로 시르케지 역이다.


4. 노란색 표시
마르마라해 바다 성벽은 매립으로 해안 성벽이 돼 버렸고, 또 일부는 철도와 자동차 도로 등이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노란색은 바다를 매립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