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 하는 이스탄티노플 역사 기행 10
- 아야 소피아, 그 파란만장한 역사와 사건들
수수께끼 하나. 16세기 초반까지 10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컸던 단일 건축물은?
수수께끼 둘. 그리스 신전이었던 터에 3차례 기독교 성당을 짓고 그것을 그대로 이슬람 사원으로 쓰다가 박물관으로 바꾼 건물은?
수수께끼 셋. 건축 이후 1500년 동안 1000번 이상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위용을 자랑하며 현대의 건축가들에게까지 불가사의로 남은 건물은?
수수께끼 넷. 세계 각지에서 해마다 20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 건물을 보려고 찾아오는 곳은?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수수께끼들의 정답은 모두 하나, 그렇습니다, 바로 ‘아야 소피아’입니다. 그 이름만 언급했는데도 이내 그 웅장한 모습이 떠오르면서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스탕달이 만약 아야 소피아를 보았더라면 또 다시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만큼 아야 소피아는 ‘스탕달 신드롬’, 그 이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제격인 경이로운 ‘작품’입니다. 건물 자체는 물론 내부 구석구석, 장식품 하나하나가 모두 심금을 두드리는 걸작입니다. 게다가 거기에 깃든 역사적 숨결과 체온을 대하고 나면 감동은 증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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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야 소피아 박물관 부관장인 할릴 아르차 씨(왼쪽), 그리고 고고학자인 데피네 씨와 함께. 아야 소피아에 대한 정보가 담긴 신간 영문 책자를 선물한 아르차 씨와 친절한 안내를 해준 데피네 씨에게 감사드린다.
‘이스탄티노플’에서 첫 눈에 나를 사로잡은 것도 바로 이 아야 소피아였습니다. 2009년 1월과 2010년 1월, 국회의장 신분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해 이미 두 차례 아야 소피아를 다녀간 내가 지난 8월, 의장직을 마치자마자 다시 그 도시로 날아가 아야 소피아를 연 사흘 집중 탐사한 것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나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깊이 있는 설명을 듣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나눈 시간은 매우 유익했습니다. 서울에서 어렵게 입수해 번역한 책(『Hagia Sophia』,H Kἄhler, NewYork, 1967)과 현지에서 구입한 여러 권의 관련 서적은 훌륭한 개인교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도시를 떠나던 날 받은 진귀한 책을 한국에 처음 소개할 수 있는 행운도 누렸습니다.(후술)
그렇습니다, 아야 소피아야말로 내가 명명한 도시, 긴 세월 동안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과 그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사연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얼굴을 지닌 ‘이스탄티노플’의 의미를 대변할 만한 상징적 존재입니다. 거기에는 화해와 공존의 메시지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 서양과 동양, 콘스탄티노플과 이스탄불, 과거와 현재가 별다른 충돌 없이 한 건물 안에서 하모니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 이전에 그리스 신전이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미 BC 7세기부터 그리스 식민지였고,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의 높은 곳에 신전을 세우는 전통이 있었는데, 아야 소피아는 도성에서 가장 높은 ‘신성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현재의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성당으로 세 번째 (콘스탄티누스→테오도시우스→유스티니아누스) 새로 세워졌습니다. 물론 우리가 보고 온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 건물은 세 개의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변신을 거듭해 왔습니다. 물론 용도도 바뀌었습니다. 성당(Hagia Sophia)에서 모스크(Aya Sofya)로, 다시 박물관(Ayasofya Mϋzesi)으로 탈바꿈을 했습니다. 이런 예는 세계사를 통틀어 아마 유일할 것입니다. 스페인 코르도바에 있는 *메스키타도 견줄 만한 대상이 못 됩니다.
▲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종교와 피부 색깔, 국적이 다채로운 지구촌 여러 나라에서 온 관람객들로 개장 시간 내내 북적인다.(아래 사진) 모자이크 건축물에 어울리는 ‘모자이크 문화 현상’이랄까. 문을 열기 전부터 몰려든 인파로 장사진을 이룬다.(위 사진)
비잔틴 제국에서 기독교의 본산 역할을 한 하기아 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 성당으로 건립되었지만, 그 이듬해 지진 피해를 입고 404년 종교 문제로 촉발된 반란이 일어나 소실됩니다. 그러고는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재건축되었지만 532년 1월, *니카의 반란에 의한 화재로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맙니다.
▲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해 415년에 재건축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서쪽 측면 모습.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인 532년, 니카의 반란으로 인해 또 다시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자 반란을 진압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곧바로 불탄 자리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합니다. 목재가 아닌 석재를 쓰고 그전보다 훨씬 더 장대하게 규모를 키운 이 건물은 5년여(532년 2월~537년 12월) 만에 초스피드로 완공되었습니다. 황제는 거의 매일 공사 현장에 나타나 인부들을 독려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뛰어난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고, 황금 90톤의 비용을 투입하는 등 건축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1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군대 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일을 했습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동원된 연인원만도 무려 2000만 명을 헤아립니다. 마침내 대역사를 마무리 짓고 성당이 봉헌되던 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감격에 겨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솔로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
(아마 이 순간 황제도 ‘스탕달 신드롬’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프로코피우스 또한 다음과 같은 묘사로 중축된 하기아 소피아의 위용을 찬미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정도로, 돛을 올린 배처럼, 다른 건물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솟아올라 도시의 나머지 부분을 굽어보도다!”
▲ 정면에서 찍은 아야 소피아 박물관. 대칭과 비대칭 사이를 넘나들며 오묘한 건축미학적 매력을 자아낸다. 서로 다른 종교와 문명 간의 화해 및 공존을 상징하듯이….
*세계 건축사상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야 소피아는 1520년 세빌리야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1000년 세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지금도 성 베드로 성당, 성 밀라노 성당, 성 바울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를 자랑합니다. 물론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성당입니다.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아야 소피아는 ‘BC 8세기부터 1300년간 지어진 모든 예술적 조형물의 집합체’로서 건립(537년) 이후 줄곧 사원 건축 양식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축기술의 발달이 무색하게 그 뒤로도 오랫동안 아야 소피아를 뛰어넘을 만한 건축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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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성당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영욕이 엇갈려 교차합니다. 8세기와 9세기에는 아이코노클래즘(Iconoclasm, 성상 파괴 운동)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영예로운 일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큰 행사나 축제들은 관례처럼 하기아 소피아에서 치러졌습니다. 성대하고 호화로운 황제의 대관식도 여기서 열렸습니다.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 축하 의식을 행하던 곳도 이 성당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박해받는 사람들의 망명처였고, 동서 교회가 분리되면서 레오 6세의 대사들이 1054년 7월 16일 제단에 교황의 교서를 올려 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비잔틴 시민들이 소란과 폭동을 일으켜 문이 부서졌지만 니카의 반란 때처럼 건물이 파괴되는 불상사는 겪지 않았습니다.
▲ 532년 1월 니카의 반란 당시 화재로 소실된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가 세워져 있던 부지에서 발굴 작업 도중에 나온 비잔틴 유물들. 당시 건물은 구덩이에서 보듯이 지금보다 훨씬 지표면이 낮았다. 이 도시는 매장량이 풍부한 광산과도 같다. 땅을 파면 고고학적 가치가 빛나는 유물들이 나온다.
1204년 성지를 회복하겠다며 떠난 제4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발길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어 도성을 점령했을 때 하기아 소피아는 다시금 위기에 놓였습니다. 십자군들은 성당의 황금 모자이크 등 값진 성상과 성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베니스로 가져갔습니다. 보물을 수레에 쓸어 담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제단마저도 금으로 된 것으로 생각해 뜯어내어 베니스로 싣고 가다가 대리석 장식이 너무 무거워 배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261년 8월 15일 동로마 황제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재입성해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함으로써 옛 명성과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 건물 외벽에는 벽돌들이 거칠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원래는 대리석으로 바깥을 마감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래도 대리석으로 마감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외벽에 대리석을 고정시켰던 못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452년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황제와 조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피렌체 공의회에서 채택된 동서 교회 통합 율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외세(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구하려면 서방의 지원이 필요해 정치적으로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비잔틴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면서 신앙의 상징이었던 이 대성당에서 율령이 공표되면 아마도 통합에 동조할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부감은 컸습니다. 교회 통합이 공표되자 더 이상 공개적인 반발은 안 일어났지만, 반대파인 대다수 시민들은 통합을 지지하지 않은 사제가 집전하는 성당에서만 미사를 보았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졌습니다.
1453년 5월 26일,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으로 두려움에 떨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밤안개가 걷힌 뒤 이상한 빛 한 줄기가 하기아 소피아 돔 언저리를 어른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술탄 메메드 2세에게도 그 빛은 눈에 띄었습니다. 술탄은 “이런 현상은 진정한 신앙의 빛이 곧 그 성스런 건물을 비추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라는 현인들의 해석을 듣고 흡족해 했습니다. 반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도성 시민들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 빛을 바라보았습니다.
▲ 오스만 제국의 유명한 건축가 시난에 의해 첨탑들이 새로 세워지면서 성당에서 모스크로 용도를 바꾼 아야 소피아의 16세기 모습. 그 앞으로 예니체리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탄 술탄이 지나가고 있다.
1453년 5월 28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비잔틴 사람들은 간절하게 울려대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황금 모자이크가 수많은 등불과 촛불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하기아 소피아로 모여 들었습니다. 지난 5개월 여간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반대해온 도성 시민들이 애써 외면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던지 그날만큼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면서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갈망했습니다. 수많은 지진을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대성당이 전쟁으로부터도 자신들을 지켜 줄 거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절박한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장엄하고도 비장한 분위기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도 저녁 늦게 아라비아 말을 타고 대성당에 와서는 시민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평화를 간구하는 마지막 미사를 올렸습니다.
오스만 군의 함성과 귀청을 찢을 듯한 군악대 소리, 지축을 뒤흔드는 대포 소리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신자들로 가득 찼고 간절한 기도 소리도 높아져만 갔습니다. 도성 시민들은 선지자의 옛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이교도들이 성벽을 뚫고 이 거룩한 성당 안까지 쳐들어온다 해도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들을 지옥에 처넣을 것”이라는…. 시민들은 천사를 기다리며 철야 기도를 드렸습니다.
▲ 백마를 탄 술탄이 성벽이 허물어진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운명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름은 아야 소피아가 되었고, 지붕 위의 십자가가 내려진 대신 이슬람 사원을 상징하는 미너렛이 세워졌다.
그러나…,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천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투르크 군은 날이 채 밝기도 전 아야 소피아의 굳게 닫힌 청동 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따라 허락된 **‘사흘간의 약탈’ 기간을 의식한 듯 전리품을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반반하게 생긴 처녀와 건장한 젊은이들이 일차 표적이 되었습니다. 몇몇 젊은 수녀들은 유린을 당하느니 차라리 순교를 택하겠다며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투르크 군은 성당 안의 값진 물건들도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았습니다. 250년 전 이미 제4차 십자군들이 모자이크와 대리석 등을 약탈해 가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던 대성당은 머지않아 쑥대밭이 될 판이었습니다.
**오스만 군대의 전통. 항복하지 않는 도시에 한해서는 정복 이후 3일 동안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는 권한을 장병들에게 부여했다. 1453년 전쟁에서도 술탄의 최후 공언으로 오스만 군은 사기가 충천해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원동력이 되었다.
▲ 박물관 남쪽 출입구 근처에 있는 술탄 마무드 1세가 1740년에 지은 샤드르반. 모스크에 예배 보러 들어가기 전에 심신을 정결히 하기 위해 손발을 씻던 곳이다. 가운데에 분수대가 있지만 철망으로 가려놓아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앞에서 청춘 남녀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그 상황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은 술탄 메메드 2세였습니다. 도성 정복 이후 하기아 소피아에 다다른 그는 말에서 내려 바닥의 흙을 한 줌 집어 터번 위로 흩뿌린 다음 대성당에 들어가 제단 앞으로 걸어가다가 대리석 조각을 떼어내고 있는 투르크 병사를 발견하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왜 대리석을 파괴하는 것이냐?”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포로와 돈이 될 만한 물건이면 충분하다. 이 도시의 모든 건축물은 나의 것이다. 너 따위가 감히 이런 훌륭한 건물을 지을 수나 있겠느냐? 내 허락 없이는 문고리 하나 손대지 못한다.”
술탄은 병사를 향해 칼을 겨누었고, 그 병사는 질질 끌려 나가 성당 밖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 양 옆으로 돌출된 벽 위의 동그란 테두리 안에는 얼핏 꽃무늬처럼 보이는 색다른 문양이 조각돼 있다. 하산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스위스의 건축가 포사티 형제가 새겨 넣은 변형된 십자가 문양이라고 한다.
술탄은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비잔틴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고는 벽면을 가득 채운 모자이크가 내뿜는 장엄한 색채의 향연에 잠시 찬탄의 눈길을 보내다가 이 대성당을 즉시 모스크로 개조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설교단 위로 올라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점령 3일 후인 1453년 6월 1일, 모스크로 바뀐 아야 소피아에서는 최초로 메카 쪽을 바라보며 이슬람식 성(聖) 금요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우르자미(대사원)로 재탄생했습니다.
▲ 건립 연대와 건립 주체가 서로 달라 모양이 제각각인 아야 소피아의 미너렛들. 첫 번째 첨탑은 메메드 2세가 1453년 남동쪽에, 두 번째 첨탑은 그로부터 100년 뒤 셀림 1세가 북동쪽에 세웠다. 그 뒤 무라드 3세가 서쪽에 두 개의 첨탑을 세움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모스크의 미너렛은 보통 짝수로 만들어지며 2개 혹은 4개가 보편적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시기에 첨탑이 세워진 예는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정교회 신도들과 교회들은 그 후로도 존속했습니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이란 속설은 적어도 술탄 메메드 2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술탄은 정복한 땅의 이교도 백성들에게 통치 기간 내내 종교적 관용을 보였습니다. 정해진 세금만 바치면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교회 통합 반대론자인 학자풍의 그리스 수도사 겐나디오스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한 술탄은 그리스 정교회의 존속을 허용했습니다. **성사도 대성당이 모스크로 바뀐 하기아 소피아를 대신해 총대주교 성당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술탄은 그리스도 교인들도 자신들처럼 구약성서의 유산을 공유하는 ‘경전의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성당을 사원으로 바꾼 뒤에도 술탄은 기독교 성화를 훼손하지 않고 얼굴이 그려진 모자이크는 천으로 가리듯이 얇은 나무판자로 가린 채 의례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노플 주도로인 카리시오스 문(현 아드리아노플 문)에서 아야 소피아와 옛 황궁으로 가는 대로변에 있는 3중벽의 교회.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도 다른 성당과 달리 거의 파괴되지 않았다. 총대주교 겐나디오스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워 곧 거처를 규모가 작은 파마카리스토스 수도원 교회로 옮겨 이곳이 그리스 대주교 본산이 된다. 성사도 대성당은 그후 파티 자미(정복자 메메드 2세 수도원)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수도원 안에는 메메드 2세와 그 부인의 묘소가 있다.
사진출처: http://flic.kr/p/6kjr3t
나는 멕시코시티 중앙광장에 있는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을 보고 온 뒤로 이슬람 정복자들의 관대한 종교적 포용성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지진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대성당은 스페인이 멕시코를 점령한 이후 아즈텍 문명기의 대신전을 흔적도 없이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입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졸지에 종교와 언어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도 멕시코의 국교는 가톨릭이며, 모국어 역시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이슬람 정복자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각설하고, 그렇게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갑니다.(이 시기에 일어났던 아야 소피아의 변화는 2편과 3편에서 얘기할 생각입니다.)
▲ 보수 및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 이스탄불이 2010년 EU(유럽연합)가 지정한 유럽의 문화 수도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다. 반바지 차림의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이 여기가 이슬람 국가란 사실을 잠시 잊게 한다. 지붕 위에 올라가 아름다운 원형, 반원형 돔들을 사진 찍으려던 우리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수리 중이라서 위험하다며 부관장이 말렸기 때문이다.
1923년 10월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유럽 각국의 외교적 압력에 맞부딪쳤습니다. 그는 그 절충안으로 1935년 2월 이 유서 깊은 건물을 국립박물관으로 바꾸어 개장했습니다. 아울러 일체의 종교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대통령 자신도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첫 방문했을 때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원에 들어갈 때는 누구나 신발을 벗어야 하는 관례를 무시함으로써 이제 그곳이 더 이상 이슬람 모스크가 아님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무례(?)를 보면서 터키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아야 소피아는 916년간은 비잔틴 교회로, 481년간은 오스만 사원으로 사용되어온 곡절 많은 역사를 접고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공존하는 인류의 공동 유산, 세계인들의 자부심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 아야 소피아 박물관 쪽에서 바라본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드 자미) 전경. 6개의 첨탑 가운데서 2개는 카메라 렌즈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0년대 초에 아야 소피아를 모델 삼아 지은 이슬람 사원으로서 파란색과 녹색 타일로 장식돼 있는 내부가 트레이드마크이다.
나는 1500년 동안 영광과 오욕을 한 몸으로 겪으면서 비잔틴과 오스만, 두 제국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아야 소피아에서 쉽게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내 머리 위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날갯짓도 가볍게 날아올랐습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오늘도 눈부신 자태를 자랑하며 공존과 화해의 표상으로서 그곳을 찾는 불특정 다수의 지구촌 시민들에게 감동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스탕달 신드롬’도 경험하겠지요?
▲ 하산 박사(왼쪽)와 내 오랜 벗 우헌기 兄. 아야 소피아 탐사기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후속편에 쓰게 될 아야 소피아의 건축미학적 특징과 지금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하산 박사를 못 만났더라면 얻기 힘들었을 정보였다. 헌기 兄의 영문 원서 번역과 사진 취재 역시 큰 보탬이 돼 주었다.
※ "이스탄티노플"에 대해 포스팅한 모든 내용은 지속적으로 수정/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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