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일, 참진주아카데미 특강을 위해 진주를 찾았습니다. 수주 변영로 선생의 시 <논개>의 첫 연을 외우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강연 시작 전에 잠깐, 또 끝난 뒤에 30분 남짓 진주성에 들렀습니다.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해 삼국시대부터 조성된 성으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의 충혼이 서린 곳입니다. 의기 논개가 몸을 던진 촉석루 아래 의암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남강 물결 위에 돛단배가 떠 있는 아름다운 봄날 오후의 진주성 풍경을 내 아이폰으로 스케치했습니다.
촉석루(矗石樓)의 촉(矗)은 곧을 직(直)자 세 개가 모여 이루어진 동체회의문자(同體會意文字)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논개가 곧은 마음으로 곧게 떨어져 내림으로써 역사를 곧게 세운 누각이라서 곧을 直자 세 개 矗石樓인가?
논개의 낙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을 촉석루. 봄바람에 날리는 벚꽃 잎들이 왠지 논개의 구국혼처럼 느껴졌다. 논개의 숨결이 서린 촉석루 바로 옆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있다. 촉석루는 논개가 왜장을 안고 몸을 던진 날, 꽃다운 청춘을 삼킨 남강을 내려다보며 애통해 했으리라.
의암사적비가 서 있는 의기논개지문. 1740년 경남우병사 남덕하가 비각을 세웠으며, 비문에는 논개의 순국 정신을 기리는 다음과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 곳을 찾았겠으며 /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논개가 몸을 던진 의암에서 모형 황포돛배가 떠 있는 남강을 배경으로 찰칵! 원래는 위험한 바위란 뜻의 위암(危巖)이었는데, 논개의 순국 이후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의암(義巖)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람에 날리는 넥타이가 풍향과 풍속을 짐작하게 해준다.
진주성은 본래 토성이었으나 1379년 진주목사 김중광이 잦은 왜구 침범을 막기 위해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일제의 훼손으로 외성의 자취는 많이 사라지고, 지금은 내성만 복원해 놓은 상태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전망이 아름다워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린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창건하여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의 정문으로 사용하였으며, 경남도청이 옮겨 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으로도 쓰였다.
진주대첩으로 청사에 빛나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1592년 10월에 침공한 왜적 2만 대군을 불과 3800여 병력으로 이마에 적탄을 맞아가며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겼다. 그 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상에서 나랏일을 근심하다가 39세를 일기로 진주성에서 순절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 진주성은 왜적에게 함락되었다.
1927년 남강에서 바라보며 찍은 촉석루.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지만 이런 사진들을 기초 자료 삼아 1960년, 시민들의 성금으로 복원되고 재건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누대인 촉석루는 전시에는 지휘소로 쓰이고,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
진주성의 정문인 공북문(拱北門). 임금 계신 북쪽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2002년 홍예식 2층 다락루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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