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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우체국(서신)/보낸 편지함

아름드리 거목으로 남은 당신


박완서 선생님을 추모하며 

아름드리 거목으로 남은 당신

김형오 전 국회의장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별세 소식이 전해진 겨울 아침, 저는 맨 먼저 선생님의 그 소설이 떠올랐습니다. 한국전쟁이 남긴 냉혹한 비극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제목입니다. 선생님 떠나신 이 겨울 아침은 혹한이 다소 가셨지만 선생님이 불혹(不惑)에 발표하신 처녀작 ‘나목(裸木)’처럼 왠지 헐벗은 나무로 겨울 벌판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향년 80세. 하지만 선생님은 언제나 ‘현역’이셨습니다. 시대의 어른으로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전범을 보이셨습니다. 당신이 경험한 혹독한 시련을 냉철한 리얼리즘에 입각한 분단 문학으로 승화시켰는가 하면, 여성 문제와 소시민적 삶에도 깊숙이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유려한 문체와 섬세한 감각, 게다가 품격 높은 익살과 풍자는 선생님 책에 날개를 달아 주었습니다. 문학성과 대중성, 양쪽 모두에서 선생님 앞에 세울 만한 작가가 또 있을까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소설 제목들은 그대로가 한 줄의 시였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도둑맞은 가난’ ‘창밖은 봄’ ‘배반의 여름’ ‘휘청거리는 오후’ ‘목마른 계절’ ‘도시의 흉년’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가을의 사흘 동안’ ‘너무도 쓸쓸한 당신’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혼자 부르는 합창’ 등 시집 제목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작품들입니다.
 

20년 전쯤 먼저 떠나신 부군을 기리며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이란 소설을 쓰셨지요? 선생님은 수십, 수백 편의 빛나는 작품을 주렁주렁 매단 ‘아름드리 거목(巨木)으로 남은 당신’이십니다. 나목으로 와서 거목으로 가신 선생님, 삼가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