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안에서 빛나야 진짜 보석이다
스마트폰으로 스케치한 이영미술관의 진짜 보물들
김형오
한 개인이 사재를 털어 운영하는 곳. 이영미술관(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은 자체 시설도 크고 훌륭할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과 풍광 또한 이만한 곳이 드물 것 같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오르세미술관이 기차역을 개조해 지어졌듯이, 이영미술관은 2001년 돼지우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3000여 마리의 돼지를 키우던 돈사(豚舍)가 지금은 그보다 두 배가 넘는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으로 거듭났으니, 다산성(多産性)인 돼지의 축복을 받은 걸까? 장미꽃밭으로 변신한 전남 구례의 쓰레기 매립장처럼 이영미술관은 역발상의 신선한 성공 모델이다.
다음은 내가 이영미술관에서 찾아낸, 다른 여느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진짜 보물들이다. 아이폰으로 스케치한 사진들이라서 퀄리티는 조금 떨어지지만, 이영미술관이 얼마나 매력 넘치는 곳인가를 알게 해주기에는 모자람이 없으리라. 진짜 보석은 가슴 안에서 반짝인다. 내 후각과 미각과 시각과 촉각과 청각 모두를 행복하게 해준 그날의 기억들은 지금도 내 가슴 한 기슭에서 보석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자, 그럼 이제부터 그 공감각적 보물찾기에 동행해 보자.
보물 1 : 금강산도 식후경, 밥상 위의 행복
▲빨갛게 달구어진 장작이 타고 있는 가마솥! 오늘 무슨 잔칫날인 줄 알았다. 이렇게 큰 무쇠 가마솥이 펄펄 끓고 있다니….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고 김이환 관장님이 준비를 단단히 하셨다. 모락모락 새어나오는 김에서 풍기는 구수한 냄새에 저절로 발목이 붙잡혔다. 저 안에서는 무엇이 익고 있는 걸까?
▲부뚜막과 나무 선반 등이 옛날 시골 부엌을 떠올리게 한다. 행주며 그릇들은 또 얼마나 정겹고 소박한지…. 뚜껑을 살짝 열어 놓은 이 가마솥 안에서도 밥 냄새가 구수하다. 오, 해피 데이! 장작불 가마솥에서 갓 지어낸 밥과 국을 맛보게 될 줄이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지푸라기로 엮은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온돌방에서 도란도란 맛있는 점심 식사를 했다. 갑자기 이 집 된장과 간장 맛이 궁금해졌다.
▲놋그릇과 도자 접시, 가마솥에서 나온 밥과 국, 통영에서 전영근 화백이 가져온 싱싱한 생굴과 맛깔스런 김치, 접시에 다소곳이 담긴 장떡(밥상 위쪽)…. 황제의 밥상이 부럽지 않은 소담스런 성찬이다.
보물 2 : 설치미술과 정물화, 휴식 같은 산책
▲뱃속을 든든하게 채웠으니 이제 본격적인 탐방에 나설 시간.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듯하여 가 보니 이제 막 볏이 돋기 시작한 토종닭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닭장이 나온다. 그런데 이 녀석들, 낮잠이라도 즐기고 있는 듯 꼼짝을 안 한다. 주인이 가끔씩 자리를 옮겨 주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작대기를 걸쳐 세워 놓은 저 지게는 또 얼마 만에 보는가. 검불이나 곡식 따위를 긁어모으던 나무 갈퀴 두 개가 소품처럼 지게 위에 얹혀 있다. 멋진 설치미술 작품이 따로 없다.
▲투박한 장독 위에 올려놓은 나무를 엮어 만든 소쿠리에서는 모과가 상큼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십리 밖에서도 모과향이 느껴질 것만 같다. 그대로가 한 폭의 아름다운 정물화이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 함이던가. 정원 한 편에 300년 세월을 살았다는 벽오동나무가 잎을 죄다 떨어뜨린 채 겨울날 채비를 하고 있다. 내년 봄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신록을 자랑할 때 그 진수를 보러 다시 와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백일홍나무(‘배롱나무’로도 불린다)를 만났다. 혹한의 겨울에 대비해 두터운 외투로 몸을 감싸고 있다. 그 뒤로는 빈 독인지 속이 꽉 찬 독인지 궁금해지는 배가 볼록한 독들이 백일홍 나무를 응시하고 있다. 혹은 수호하고 있는 걸까? 백일홍의 꽃말은 ‘가 버린 친구를 그리워함’이다. 문득 지난여름 난분분난분분 낙화했을 꽃들이 그리워졌다. 백일홍은 나뭇가지 틈새를 살짝만 건드려도 겨드랑이를 공습당한 새색시처럼 몸을 파르르 떤다 해서 일명 ‘부끄럼나무’ 혹은 ‘간지럼나무’로도 불린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독들이 ‘너희 정치인들도 우리를 본받으라’는 듯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도열해 있다. 저 안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나하나 열어 보고 싶게 만든다.
▲나무판자를 깔아 놓은 산책로. 우리는 정담을 나누며 이 길을 산책했다. 돌담 위에 나란히 얌전하게 포개져 앉아 있는 것들은 고풍스런 기왓장들이다. 7천 평의 넓은 면적을 훨씬 더 넓게 쓰는 것은 공간 활용을 그만큼 잘했다는 얘기다.
보물 3 : 깜짝 공개, 보물창고의 문을 열다
▲이제부터는 진짜 보물창고 탐방이다. 보통 사람들은 여기 이런 보물들이 숨어 있는 줄 짐작도 못할 텐데 우리 부부에게는 특별히 공개했다. 사진 속에서 빛나고 있는 공예 작품은 여덟 사람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전통 자개상이다. 통영 명인의 얼과 혼이 깃든 명작.
▲상다리는 사자 모양이다. 네 귀퉁이에서 갈기를 휘날리는 사자 네 마리가 튼튼하게 상을 받치고 있다. 천년을 써도 결코 부러지지 않을 것같이 위풍당당하다.
▲자개로 만든 용이 구름을 헤치고 밥상 위로 날아오를 기세다.
▲육중해 보이는 사자의 다리와 발목에는 아름다운 매화가 활짝 꽃잎을 열고 있다.
▲선반 위에 놓인 놋그릇과 찻잔. 50명 정도가 한꺼번에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다. 놋그릇엔 하나하나마다 인장을 찍어 외부 반출을 막았다. 요즘엔 닦기가 좀 쉬워졌겠지만 그래도 웬만한 정성 없이는 관리하기 힘든 그릇들이다.
▲보물 중의 보물을 발견했다. 이 보물들을 보고 온 뒤로 며칠 동안 얼마나 배가 부르던지…. 이게 뭔가? 맞다, 분명 전혁림 그림이다. 그런데 그 소재는? 김이환 관장 왈, ‘제주도 문짝’이란다. 허걱, 제주도 문짝 그대로를 캔버스로? 실제로 문이 열리고 닫힌다. 제주도 나무인 만큼 재질이 딱딱하다. 다른 나무보다 그림 그리기가 더 까다롭다. 그 대신 변치 않는다. 참 신기하고 매력적인 작품들이다.
▲제주도 문짝을 캔버스로 삼은 작품 앞에서 아내와 찰칵! 쪽문인 듯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다.
▲나룻배 모양 목기에 담아낸 저 현란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붓놀림! 그 옆에 붉은 글씨로 ‘全爀林’이라고 화가의 한자 이름을 써 놓았다.
▲통영의 목공예 명장이 만든 3층장에 전혁림 화백이 이미지와 색을 입힌 아주 특별한 작품. 이런 소장 가치가 높은 걸작은 대대손손 보관을 잘해야 될 텐데, 공개해도 괜찮은 건지 조금 걱정스럽다.
▲보물들을 향해 열심히 스마트폰 셔터를 누르는 내 모습이 유리창에 투영되었다. 사진 찍기란 어쩌면 자신의 내면과의 대화인지도 모른다.
보물 4 : 조각품들은 말한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미술관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눈길을 사로잡은 조각 작품들. 찬찬히 뜯어보니 정말 예사롭지 않다. 특이하게도 모두 하나같이 제목이 없다. <무제(無題)>라는 타이틀조차 달지 않았다. 작가가 아예 짓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 까닭은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 하는데 손가락만 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내 작품에는 어떤 해석이나 설명도 사양한다.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느껴지는 대로 느껴 달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갑자기 김춘수 시인의 <꽃> 중 이런 구절이 생각났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와 동시에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의 이름은 한용진. 1934년생으로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교수로 있다가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을 무대로 활동 중이다. 자연석에 최소한의 손질만 해서인지 그의 작품은 인위적이지 않고 투박하다. 자연과 일체를 이룬다. 맨 위 사진(두 번째, 세 번째 사진은 부분 촬영)에 담긴 조각 작품은 작가가 특별히 애착이 깊어 완성된 날 막걸리 한 사발을 붓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충남 보령 지역의 청석을 탑처럼 쌓아 세워 놓았다. 돌 하나의 무게만도 무려 5톤. 아침저녁으로 그 빛깔이며 질감, 이미지 등이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그대, 부디 이영미술관에 가시거들랑 이 모든 제목 없는 작품들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그대만의 이름을 불러 주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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