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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과 황제

38. 겔리볼루 요새와 차낙칼레 요새 & 에디르네 유적=『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406쪽 참고 (구간 333쪽 참고)

 Gelibolu Fortress, Çanakkale Fortress & the Remains of Edirne


16시 53분을 지나가고 있는 차낙칼레의 시계탑. 큰바늘이 1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면 나는 반사적으로 1453년을 떠올렸을 것이다.

 

차낙칼레 항구. 맞은편에 겔리볼루(유럽) 쪽 다르다넬스 해협의 끝이 보인다. 나는 이 항구에서 배를 타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겔리볼루로 갔다. 술탄 메흐메드 2세의 귀환 여정을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면서 스마트폰에 담은 겔리볼루 요새. 겔리볼루(유럽)와 차낙칼레(아시아)는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양쪽 해안에 요새를 구축해 놓았다.

 

다르다넬스 해협 한가운데에서 바라본 차낙칼레 요새. 보스포러스 해협보다는 폭이 넓지만 이런 전략적 요충지에 요새를 지은 것만 보아도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의지, 영토 확장 전략을 읽을 수 있다.

 

겔리볼루 요새에서 바라다본 차낙칼레 요새. 겔리볼루는 마니사를 떠난 메흐메드 2세가 1451년 2월, 정식으로 술탄 자리에 즉위하기 위해 에디르네로 가던 도중 후속 부대의 도착을 기다리며 이틀 간 머물렀던 도시이다. 그 때만 해도 바다(해협)는 여전히 베네치아·제노바 등 기독교 세력이 장악하고 있어 해군이 약한 오스만은 바다를 건널 때 매우 조심해야 했다.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는 겔리볼루 요새. 루멜리 히사르에 비해 지대가 높지는 않지만 해협 장악을 위해 단단하게 지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케말 무스타파 아타튀르크가 쌓은 요새가 바로 옆에 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터키는 연합군의 식민지가 되는 비극을 면하고 신흥 그리스 등과의 영토 협상에서 당당히 임할 수 있게 되었다. 500년의 시차를 두고 두 요새가 이웃하고 있다는 것은 시대를 떠나서 이곳이 얼마나 전략적 요충지였는가를 알 수 있다. 나무로 세운 전신주가 한국의 70년대식 풍경을 연상시킨다.

 

겔리볼루 요새가 있는 해역을 지나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 그 바로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차낙칼레 요새이다.


 

<에디르네 유적>

에디르네의 하렘 부속 시설인 여성 전용 하맘(공중 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기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타일 그림. 하반신은 대부분 가리고 있는 반면 상반신 노출은 비교적 자유로운 점이 이채롭다.

 

에디르네 박물관에서 스마트폰에 담은 산작 타르의 깃발(깃봉). 산작 타르는 국기나 군기를 들고 주군이나 지휘관 옆에서 행군하던 최측근을 일컫는다. 에윱도 선지자 무함마드의 산작 타르였다.

 

활과 화살, 화승총 등 에디르네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오스만 제국 건국 초기의 무기들. 화승총은 노끈에 불을 붙여 발사하던 전근대적 소총이다.

 

에디르네 옛 황궁 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적인 하맘. 개인이 운영한다. 화재로 소실된 옛 황궁 터엔 오스만 최고의 장인 마마르 시난이 건축한 셀레미예 자미(셀렘 모스크)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그 위용과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정복 전쟁을 성사시킨 옛 수도의 도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다.

 

에디르네 교외 강 건너에 있는 옛 별궁. 관광 안내 지도에도 없는 이 별궁 터를 찾기까지도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많은 유적 중 하맘과 식당이 1차 복원 대상이었다.

 

허물어진 채 흔적만 남아 있는 에디르네의 옛 별궁(신궁전) 터. 조감도(가운데 사진)를 보면 작지 않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